< 물밑 작업. - (4) >
당직자 세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이 집에서 흥신소 직원들이 쓰던 노트북과 휴대폰을 챙기기 시작했다.
성윤이 가장 끝에 있는 당직자의 팔을 끌었다.
그리고 책상에 있던 서류 봉투를 건넸다.
“뭐죠?”
“검찰에 갈 때 필요할 겁니다.”
“아, 네.”
성종그룹에서 대관업무를 하던 장형곤 상무라고 있었다.
박무혁 의원이 전화 한 통으로 검찰에 보내버렸던 사람이다.
그는 윤채아와 관계가 있었고 그 일을 김미선 기자가 캤다.
지금 건넨 서류 봉투는 김미선 기자가 확보한 기록.
그러니까 윤채아가 검은돈을 받았다는 증거다.
그렇게 정리가 끝나자 당대표가 말했다.
“데려가.”
당직자들이 윤채아를 향했다.
“의원님.”
이제 그녀는 검찰에 넘어갈 때까지 대한당의 관리를 받게 될 거다.
윤채아가 고개를 틀어 성윤을 향했다.
갈아 먹을 것처럼 노려본다.
이럴 때 해줄 수 있는 말은......
“잘 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윤채아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노려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가시죠.”
당직자의 말에 그녀는 비척비척 집을 빠져나갔다.
거실에는 성윤과 당대표 그리고 주진만 원내대표만 남아 있었다.
무거운 적막이 가득할 때 당대표가 주진만 원내대표를 향했다.
“술 한잔하겠습니까?”
“그러죠.”
두 사람의 얼굴은 피곤하다.
같은 당 의원을 사찰하고 옷을 벗고 성폭행으로 고소한다 어쩐다.....
짧은 시간에 믿을 수 없는 일이 한 번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오늘을 마무리할 수는 없었다.
거대 정당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며 해결해야 할 일이 존재했다.
이제 윗선의 잘잘 못을 따질 시간이다.
윤채아는 당대표의 사람, 원내대표가 이 문제로 당대표를 잡고 늘어지면 큰일이었다.
다행히 주진만 원내대표는 호전적인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총선을 목전에 앞두고 있다.
주진만 원내대표는 적절히 받을 것만 받고 조용히 묻을 생각이었다.
성윤은 혼자가 되었다.
책상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흐릿한 연기가 흐른다.
꿈속의 윤채아는 정말 쓰레기였다.
그런데, 꿈이라 그런지 미화됐나 보다.
현실의 윤채아에게 쓰레기라고 부르면 쓰레기에게 미안할 것 같았다.
‘윤채아가 저 정도면......’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이준대.
꿈속의 그는 악마나 괴물이라는 표현도 모자랐다.
그런데, 직접 마주한다면 어떨지......
‘상상도 안 되네.’
문이 열리고 정우가 들어왔다.
“흥신소하고 경호하던 사람들도 당직자 따라갔어요.”
“고생했어.”
성윤이 담배를 비벼 끌 때 정우가 주변을 둘러봤다.
바닥에는 신발 자국이 가득했다.
의자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노트북과 연결되었던 여러 전선은 덩어리가 되어 엉켜 있다.
말 그대로 개판.
“어떻게 됐어요?”
성윤은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윤채아의 성폭행 협박을 들은 정우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다.
“진짜 미친년 아니에요?”
“정상은 아니지.”
“귀싸대기는 의원님이 날렸어야죠. 그걸 참았어요?”
“그럼 진짜 고소당했어. 상대가 당대표니까 윤채아도 가만히 있던 거지. 내가 때렸으면 오히려 기뻐했을 거야.”
“그래도 짜증이 나네요.”
성윤이 슬쩍 웃었다.
“네가 윤채아 모습 봤으면 그런 생각 못했을 걸? 진짜 무섭게 생겼었거든. 립스틱 이렇게 번졌는데 다크 나이트에서 히스레저가 연기한 조커 같더라.”
“네? 조커요?”
한참 대화가 오갔다.
정우가 벽에 걸린 시계를 뜯어낸다.
“집에 가서 봐야겠어요. 궁금해 죽겠네.”
벽걸이 시계에는 몰래카메라가 붙어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거다.
성윤이 책상에서 엉덩이를 떼며 말했다.
“이 방은 사람들 모르게 정리해.”
오늘 있었던 일이 주변의 귀에 들어가면 좋지 않다.
조용히 수습해야 한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두리번댄다.
“그렇지 않아도 흥신소 사람들한테 이 방에 관해 물어봤거든요? 가격도 괜찮고 사무실도 가까운데, 이참에 제가 들어와 살까요?”
“그건 알아서 하고.”
“옙!”
잠시 후, 성윤은 계단을 걸어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오늘 많은 일이 있었다.
피곤했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어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밥은 정우랑 먹었어요.”
-또 치킨 먹은 거 아니야?
“맞아요. 하하.”
정우와 치킨에 맥주 한잔 마셨다.
-밥을 먹어야지.
“걱정 안 하셔도 잘 챙겨 먹어요.”
-맞다. 혜민이가 내년이면 2학년이 되잖아.
“아, 네.”
-2학년 되면 아빠가 학교에 찾아와서 수업하고 그런 것 있다던데......
혜민이는 여덟 살짜리 친척 조카.
친척 누나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혜민이를 키우기 위해 밤낮없이 직장에 다녔다.
그래서 대학 수업이 없는 날이면 성윤이 혜민이를 전담했었다.
자존심이 센 아이라 학교에서 아빠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벌써 내년 걱정을 하더라고. 네가 왔으면 하는 눈치더라.
“웬만하면 가는 거로 할게요.”
이런저런 말을 더하고 전화를 끊었다.
소파에 가방을 놔둘 때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성윤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발신 번호는 원내대표다.
다급히 귀에 댔다.
“네, 원내대표님.”
-당대표하고 이야기 잘 끝났어. 자네에게 가장 먼저 알리고 싶었네.
협상 테이블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궁금했다.
성윤이 봤던 꿈속의 미래에서는 당대표가 패악을 저질렀다.
그리고 공천권을 휘둘러 대부분 국회의원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었다.
현실에서는......
-전략 공천의 절반을 내놓겠다고 말하더군.
미래는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래는 성윤이 바꾸는 중이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짧은 가을이 끝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성윤은 후원회를 만들었다.
후원회장은 성종 물산 사장이었던 이덕근 사장에게 부탁했다.
후원회장은 보통 유명한 사람이 맡는다.
이런 대단한 사람이 나를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얼굴마담이다.
이덕근 사장은 월급쟁이 신화까지는 아니어도 그 세계에서 한 획을 그은 사람.
나름 유명 인사다.
선거 캠프에 이덕근 사장이 얼굴 한번 들이미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금 이게 후원회장을 대접하는 꼴이냐?”
성윤은 이덕근 사장이 한 번만 도와줬으면 했다.
그런데, 그는 박 노인과 함께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성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파전이랑 막걸리도 드셨잖아요?”
“이놈아! 먹이기만 하면 끝이야? 입만 즐거워서 뭐해? 귀도 즐거워야지. 와서 재밌는 이야기 있으면 좀 해봐.”
“재밌는 이야기요?”
“그래!”
성윤이 정우를 바라봤다.
그러자 정우가 어깨를 당당히 폈다.
“재밌는 이야기라면 또 박 보좌관이죠.”
이덕근 사장이 큰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그래. 보좌관이라도 재밌어야지.”
정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들과 마주 앉았다.
가뜩이나 사나운 인상의 정우다.
그런데, 표정을 굳히고 있자 심각한 말이 흐를 것만 같았다.
정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이스크림이 차에 치였대요.”
“아이스크림이 차에 치여? 사람이 아니라?”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문제입니다. 아이스크림은 왜 차에 치였을까요?”
이덕근 사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문지른다.
“아이스크림을 배달하는 차의 운전사가 신호를 못 봤나?”
고민하던 이덕근 사장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 저었다.
“답이 뭐야?”
“차가와서요.”
“어?”
“아이스크림이 차가와서요.”
사무실에는 욕설이 난무했다.
“그럼, 다음 문제!”
“하지 마!”
“중동의 석유가 한국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몰라 이놈아!”
“재밌는 이야기해 보라면서요? 그래서 하는데 왜 그러세요?”
“그게 재밌냐?”
“잼 있냐고요? 잼은 냉장고에......”
떠들썩한 가운데 박 노인이 고개를 틀어 성윤을 향했다.
“이 의원, 오늘 전략 공천 나오는 날이지? 시간이 언제인가?”
성윤이 시간을 보며 답했다.
“슬슬 발표될 시간인데요.”
이덕근 사장과 박 노인은 공천 발표를 같이 듣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발표 시간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다.
물론 성윤은 전략 공천이 확정적이다.
하지만 언제나 변수는 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수많은 변수를 이겨내야만 했으니까.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따르르르릉.
사무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떠들던 이덕근 사장과 정우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장난기 가득했던 정우의 표정도 긴장으로 물든다.
정효순 주임이 전화기의 발신 번호를 보며 말한다.
“...중앙 당사예요.”
기다리던 전략공천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우가 책상으로 다가가 전화기를 들어 올린다.
그의 표정은 심각할 정도로 굳어 있었다.
“네, 국회의원 이성윤 사무실 수석 보좌관 박정우입니다.”
-안녕하세요? 중앙 당사 당직자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성윤 의원님께서 서안시 동구 국회의원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 내용은 정우만 듣고 있었다.
모두 정우의 표정을 살핀다.
표정의 변화를 보고 내용을 예상하기 위해서......
하지만 정우의 얼굴은 변화가 없다.
굳어 있던 그 모습 그대로다.
정우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렀다.
이덕근 사장이 초조한 얼굴로 묻는다.
“왜? 뭐래?”
정우가 고개를 돌려 이덕근 사장을 향했다.
이덕근 사장은 긴장됐는지 목울대까지 움직인다.
정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거 준비, 계속해야겠어요.”
“어?”
“재선 가야죠. 대한민국에서 서른 전에 재선 의원이라는 최초 기록 세워야죠.”
이덕근 사장이 소파를 치며 크게 웃는다.
“하하하하!”
박 노인은 목이 탔는지 막걸리를 입에 댔고 정효순 주임은 손을 모아 기도했다.
하지만 성윤과 정우는 웃지 않는다.
공천은 통과 점일 뿐이다.
이제 선거 시작이다.
그 시각, 민국당 안종기 의원 사무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의 보좌관이 들어왔다.
안종기 의원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창밖의 조경을 즐기는 중이었다.
“의원님?”
휙, 의자가 돌며 안종기 의원이 모습을 나타냈다.
마른 체형, 단정하지 않고 헝클어진 머리는 소탈해 보인다.
그가 금테 안경을 올려 쓰며 슥 웃어 보인다.
“결정됐나?”
“예상대로 이성윤 의원이 대한당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안종기 의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잘됐네. 상대가 공략할 점이 많은 후보라 다행이야.”
안종기는 아홉 시 뉴스 앵커 출신으로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4선 의원이다.
이번에 5선에 성공하고 차기 대권에 도전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정치적 힘을 키울 장소로 서안시를 선택했다.
아직 민국당의 공천은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그가 성윤의 상대가 될 것은 분명했다.
보좌관이 말한다.
“어떻게 할까요?”
안종기 의원이 손으로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 옷을 툭툭 털며 말한다.
“예정대로 험로 한번 걷고 대선으로 가야지. 하지만 알지? 난 옷에 먼지 묻는 것 안 좋아해. 쉽게 쉽게 하자.”
“그럼, 예정대로 하겠습니다. 배우는 준비해왔습니다. 오디션 보시고 캐스팅하면 됩니다.”
보좌관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파일을 건넸다.
안종기 의원은 창틀에 앉아 태블릿 PC의 화면을 휙휙 넘긴다.
“아.”
그가 낮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반갑다는 표정이다.
그가 보좌관에게 화면을 보였다.
“이 사람, 지금 뭐하지?”
화면에 나타난 사람은 대한당 소속의 전 국회의원이다.
“지난 선거에서 떨어지고 아직 빚을 갚는 중이라고 합니다.”
“괜찮네. 이 사람으로 하지. 돈이라면 환장하니까. 빚 갚아주고 1억 정도 주면 굽실거릴 거야.”
지금 선택한 사람을 서안시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시킬 생각이었다.
대한당 소속이었던 무소속 후보가 성윤의 표를 가져가는 전략.
대한당 지지자의 평균 연령은 꽤 높다.
성윤을 향해 ‘어린 새끼가 왜 설쳐?’라고 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불만을 가진 지지자들 앞에 전 국회의원이 무소속 후보로 등장하면 표는 분명히 갈린다.
물론 그 사람이 당선될 일은 없다.
하지만 대한당 출신의 진흙탕 싸움을 보여줄 수는 있다.
비방하고 욕하고......
유권자들은 눈살을 찌푸릴 거다.
“이성윤도 똑같구나.”
성윤의 지지율은 흔들리다가 빠지기 시작할 거다.
거기에 그 사람이 5% 이상을 뺏어 준다면......
안종기 의원은 고고하게 선거를 즐기다가 당선될 수 있었다.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접촉해보겠습니다.”
안종기 의원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한다.
“쉽게 가자. 쉽게.”
< 물밑 작업. -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