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의원 이성윤-63화 (63/300)

< 물밑 작업. - (3) >

성윤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벅저벅 사무실을 벗어났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 번호는 정우다.

“거기 있어. 지금 갈 거니까.”

-넵.

통화가 종료됐다.

성윤은 곧장 주진만 원내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술 드시는 것은 아니죠?”

다시 윤채아의 사무실.

보좌관이 휴대폰을 내려두며 입을 연다.

“모두 연락했습니다.”

그녀는 수고했다는 말도 건네지 않고 코트를 걸친다.

“지금 한가한 분이 누가 계실까?”

“염 의원님이 괜찮아 보이는데, 다시 연락 넣어볼까요?”

“염 의원님?”

대한당 지도부 중 한 명이다.

나이는 일흔 하나.

윤채아를 딸처럼 예뻐한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전화할게.”

그녀는 보좌관의 옆을 스치며 휴대폰을 귀에 댄다.

애교 가득한 목소리가 흘렀다.

“채아예요. 건강식품 하나 샀는데, 의원님 생각이 나서요. 드리고 싶은데, 지금 찾아봬도 될까요?”

-허허허, 윤 의원이 온다고 하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지. 어서 와.

그녀의 뒤를 쫓아 걷던 보좌관은 재빨리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보좌진들에게 건강식품을 구해 놓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시간이 늦었지만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 놓을 거다.

윤채아의 히스테리를 감당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통화를 끝낸 윤채아가 입을 연다.

염 의원과 통화하면서는 콧소리를 내뱉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목소리는 냉랭하다.

“지금 시간이 9시, 염 의원님 사무실 들렀다가 오대민 의원님께 갈 거니까. 건강식품은 두 개 준비해. 오대민 의원님은 홍삼 좋아하는 거 알지?”

“알겠습니다.”

오대민 의원은 엘리트 의식으로 무장된 사람이다.

비록 아웃사이더지만 누구도 무시하지 못 한다.

그의 한 마디는 무게가 크다.

복도를 걸으며 윤채아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이성윤이 나를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 음모를 꾸민다고 말하면... 어린놈이 벌써 그러냐며 화를 낼 거야.’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다.

잔머리를 쓰며 험담이나 늘어놓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대한당 지도부는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그들은 윤채아의 말만 믿고 성윤의 공천을 적극 반대할 거다.

비틀어졌던 그녀의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공천받을 수 있겠어. 고맙네, 이성윤......’

그녀의 가방에서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손에 들었던 휴대폰 화면을 본다.

‘어?’

발신번호에 이성윤이라고 적혀 있다.

그녀가 표정을 바꾸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반갑게 입을 연다.

“어머, 이성윤 의원님? 어쩐 일이세요?”

이번에도 애교가 철철 흘렀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 어두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친근한 목소리...재밌네요. 혹시 가면무도회 아세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더러운 욕망은 가면으로 안 가려져요. 냄새가 나거든요.

윤채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모른척한다.

휴대폰은 음성 녹음이 가능하다.

조심해야 했다.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제가 언짢게 한 일이 있었나요?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 사무실 앞에 방을 구하셨던데, 집들이에 초대도 안 하고 섭섭해요.

윤채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 의원님의 사무실에 방을 구한 적 없는데요.”

딱 잘라 말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리고......

-여의도에서 서안시까지 한 시간. 그 안에 오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 방에서 만난 사람, 노트북에 적힌 내용. 휴대폰의 메시지. 전부 기자에게 던질 겁니다.

“네?”

-국회의원이 국회의원을 왜 감시합니까?

뚝.

통화가 종료됐다.

그녀의 안면 근육이 굳어간다.

어떤 말도 없이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다.

보좌관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의, 의원님? 무슨 전화인지......”

“기자들에게 전화해봐.”

“네?”

“전화해! 내 이야기 도는 게 있는지 확인해! 어서!”

같은 당 의원의 뒤통수를 사찰했다는 것.

그 지역을 먹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것.

기자들에게는 참으로 군침 도는 기삿거리다.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어 뼈까지 씹어 먹을 거다.

보좌관이 확인하는 동안 윤채아는 초조한 낯빛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기사가 터지면 막을 수 없다.

어뷰징 기사가 봇물 터지듯 터질 거다.

그럼, 당에서도 알게 된다.

공천이 문제가 아니다.

같은 당 의원의 지역구를 뺏으려고 사찰까지 한 미친년, 또라이......

정치 인생이 끝장난다.

통화를 종료한 보좌관이 윤채아를 향했다.

“...없는 것 같습니다.”

윤채아가 손톱을 물어뜯던 입술을 멈췄다.

살벌한 눈빛으로 중얼댄다.

“이성윤......”

그 시각, 윤채아가 차명으로 계약한 월세방.

15평 정도의 집이었다.

방 두 개에 작은 거실이 하나.

성윤은 거실에 있었다.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창문을 보는 중이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건물 입구가 보인다.

“이렇게 잘 보일 줄은 몰랐네. 경치가 아주 좋아.”

성윤이 몸을 돌려 앉았다.

정우와 험상궂게 생긴 남자 세 명이 서 있다.

이 남자들은 주진만 원내대표에게 지원받은 경호팀이다.

그들의 아래로 무릎을 꿇고 앉은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이 방에서 나오던 두 사람을 정우와 경호팀이 잡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흥신소 직원이라 소개했다.

성윤은 흥신소 직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쏘아 보거나 노려보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살폈을 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바들바들 떨고 있다.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지 국회의원을 괴물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무릎 안 꿇으셔도 돼요.”

“이, 이게 편합니다.....”

안 편해 보였다.

성윤은 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살아요?”

“서, 서안시 동구에 삽니다.”

“재보궐 선거에서 누구 뽑았어요?”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이성윤 의원님 뽑았습니다! 저희는 골수 대한당 지지자예요. 앞으로도 이성윤 의원님만 쭉 뽑을 거예요!”

성윤이 슬쩍 웃으며 다리를 외로 꼬았다.

“골수 지지자면 이 세계를 조금은 아시는 것 같네요. 그럼, 질문 하나만 할게요. 비례대표하고 지역구 의원하고 누가 셀 것 같아요?”

“지, 지역구 의원이요!”

“맞아요. 제가 더 세요. 그러니까 솔직히 대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흥신소 직원에게 윤채아에 대한 충성심은 없다.

없는 말도 지어내겠다는 결심이 눈에 보인다.

성윤이 시선을 틀어 정우에게 향했다.

“이분들, 우리 사무실로 모셔.”

흥신소 직원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눈알이 벌겋다.

도대체 무슨 영화를 봤는지 모르겠다.

성윤이 최대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냥 솔직히 말해주시면 됩니다. 누가 지시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두 분께 해 끼칠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흥신소 직원 둘은 힐끗 정우의 얼굴을 힐끗 본다.

아...... 영화를 봐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정우의 얼굴이 문제였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처럼 사납게 생겼으니까.

‘얼굴만 무섭지 싸움은 못 하는데.’

정우가 경호팀과 함께 흥신소 직원을 데리고 길 건너편의 사무실로 향했다.

성윤은 혼자 남았다.

담배를 물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느긋하게 천장을 바라봤다.

흐린 연기 속에서 꿈속이 떠오른다.

성윤을 저격하며 악랄하게 굴었던 윤채아.

아내가 죽을 때 그녀가 깔깔대며 말했었다.

“내 탓이라고? 약해서 죽은 거야. 타고난 명줄이 그런 것을 왜 내 탓이라고 해!”

정치를 선택한 사람 중 괴물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괴물도 있다.

윤채아는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성윤의 아내는 그 괴물에게 집어 삼켜졌다.

성윤의 머릿속에 꿈속의 아내 얼굴이 스쳤다.

마지막에 성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던 그녀.

‘이번엔 오래 살아라. 나 같은 남자 만나지 말고. 더러운 정치 세계에 관여하지 말고. 평범하게, 네 인생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성윤은 상념과 함께 담배를 비벼 껐다.

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린다.

굳은 표정의 윤채아가 거실 앞에 서 있었다.

“뭘 원하지?”

성윤이 픽 웃었다.

“나도 반말이 편했는데, 마음에 드네.”

“뭘 원하냐고!”

성윤은 어떤 감정도 없는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평소 단정한 그녀다.

하지만 얼마나 쥐어뜯었는지 머리는 산발이고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다.

성윤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하나만 묻자. 너 혼자 벌인 일이야?”

그녀의 긴 속눈썹 아래에 있는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당연히 혼자 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코너에 몰려 있다.

어떤 수라도 써야 한다.

“혼자 했겠어?”

성윤이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윗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성윤이 툭툭 손을 털며 물었다.

“좋아. 그럼, 이제 비즈니스를 해야지? 제시해봐. 내게 뭘 줄 수 있는지.”

윤채아는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꾹 물었다.

“창문 닫아.”

“닫으면?”

그녀는 창문으로 다가가 드르륵 닫아 버린다.

커튼도 친다.

그리고 다시 성윤을 향했다.

“나랑 자고 싶니?”

성윤이 크게 웃었다.

“미치겠네.”

그녀의 몸뚱이는 전혀 관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방에서 붉은 립스틱을 꺼내 입술을 칠한다.

“솔직히 말해. 그게 좋을 거야.”

“윤채아 씨,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할 말인가?”

윤채아가 다 칠한 립스틱을 가방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넌 유리하다고 생각하겠지? 이곳에 있는 노트북, 휴대폰. 모두 나를 가리키고 있으니까. 그런데, 네가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은 못 하니?”

성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치밀한 사람일수록 놓치는 부분이 있어. 네가 놓치고 있던 것은 난 여자고 넌 남자야. 이곳엔 우리 둘만 있지.”

툭, 툭,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를 채우고 있던 단추가 뜯어졌다.

동그란 단추가 방바닥을 뒹군다.

“하고 싶으면 해. 안 하면 손해지. 어차피 넌 성폭행으로 감옥에 갈 거니까.”

블라우스가 벌어지며 그녀의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그녀는 손으로 입술을 문댄다.

칠해졌던 립스틱이 흉측하게 번졌다.

그녀가 계속 말한다.

“혈기왕성한 국회의원 이성윤. 같은 당 비례대표로 있는 예쁜 누나를 성폭행하다. 기사 제목으로 어때? 변명하고 싶으면 해. 그런데,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거야. 성범죄는 유죄추정의 원칙을 따르고 있으니까. 여자의 일관된 주장이 곧 증거지.”

“......”

“넌 전화를 걸어 나를 불러냈고. 우리는 둘만 있었어. 넌 내 옷을 뜯으며 거칠게 키스했지. 아, 내가 반항을 해야 하니까 흉터도 있어야 하나? 우리 싸울래?”

그녀가 차갑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붉은 손톱이 날카롭다.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꿈이나 현실이나 똑같아.”

“내 꿈도 꿨어? 나랑 하고 싶어서? 그럼 잘됐네. 선택해. 나랑 자고 고소당할지 아니면 억울하게 당할지. 둘 다 싫다면 다른 조건을 걸 수도 있는데.”

“다른 조건?”

“서안시를 넘기고 조용히 꺼져. 여기 있던 노트북은 원래 내 것이었으니까 내가 가져갈게.”

그녀가 살짝 웃는다.

헝클어진 머리, 번진 립스틱, 뜯어진 블라우스.

지독한 악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성윤은 여전히 느긋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뒤를 가리켰다.

“뒤.”

그녀의 눈빛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성윤이 조용히 말했다.

“계약할 때 안 봤나? 여기는 방 두 개, 거실 하나야. 다른 방에 손님을 모셔두고 있었는데.....”

당대표와 원내대표가 서 있었다.

윤채아의 얼굴이 삐거덕거렸다.

“대, 대표님......”

“윗선에서 지시했다고?”

“그, 그게 아니라.”

“윗선이면 나를 말하는 겐가!”

“아뇨, 아니에요. 정말 그게 아니라. 그냥 말이 나오다 보니까......그래요. 이거 다 이성윤이 짠 거예요. 전 그냥 여기......”

성윤이 쿡쿡쿡 웃었다.

“변명이 노벨상급이야. 그냥 죄송하다고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윤채아가 다급히 말했다.

“죄송해요. 대표님!”

하지만 늦었다.

당대표의 솥뚜껑 같은 손이 그녀의 뺨을 휘갈겼다.

윤채아는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붉게 변한 뺨을 만질 뿐이다.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천천히 당대표를 향한다.

당대표가 그녀를 향해 낮게 말한다.

“같은 당 의원을 사찰해? 그리고 감히 나를 끌어들여?”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파르르 떨고 있을 뿐이다.

당대표의 말이 이어졌다.

“기억해. 네 인생은 오늘이 끝이 아니야. 너의 내일은 감옥일 거야. 눈을 떠도 감옥일 거야. 늙고 병들어도 감옥일 거야.”

< 물밑 작업. -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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