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중요한 것. - (4) >
‘정우가 정치를 한 이유......’
현실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정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떠벌리는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꿈속에서는 들었었다.
불과 몇십 년 전.
시대 자체가 누아르였던 적이 있다.
어둡고 어두운......
정권은 불안했고 깡패들은 활개를 쳤다.
세상의 눈을 돌리기 위해 정권은 여러 방법을 썼다.
북풍을 이용한 적도 있다.
그 과정에서 진짜 간첩도 있었지만 억울하게 끌려간 사람도 존재했다.
정우의 아버지가 그랬다.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끌려갔다.
이유는 학생 운동을 하던 대학생이 옆집에 살았다는 이유였다.
고문을 당했고 허위 자백을 했다.
그리고 옥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정우가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추억은 빛바랜 사진에 있을 뿐이다.
‘그 중심에 있던 사람인가?’
생각에 빠져 있던 성윤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물을 많이 마셨나 봐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생각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직접 물어볼 생각이다.
밖으로 나온 성윤은 정우를 찾았다.
정우는 로비에 있었다.
성윤은 힐끗 주변을 살폈다.
김대성 의원의 운전기사가 보였고 오강민과 함께 온 것 같은 남자가 있었다.
여기서 말할 수는 없다.
“담배 있어?”
두 사람은 1층에 마련된 흡연실로 향했다.
쌀쌀한 바람이 담배 연기를 흔든다.
성윤이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알아? 아버지 이야기는 알고 있어. 그러니까 어떻게 아는지만 이야기해.”
“네?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요?”
“지난번에 술 취해서 말했어.”
정우가 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놈의 술이 문제네......”
“뭐, 어쨌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고. 그때 어머니를 찾아왔어요. 돈을 들고.”
“돈?”
“입 다무는 조건이요. 어린 나이였지만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좀 천재잖아요.”
“받았어?”
“받았겠어요?”
성윤은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이해했어.”
세상이 변하고 많은 사람이 억울함을 풀었다.
하지만 아직이다.
땅속에 파묻혀 해소되지 못한 원통함이 존재한다.
“어떻게 할까? 네 결정에 따를게.”
정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정보통으로 쓴다고 했죠?”
“네가 반대한다면......”
정우가 성윤의 말을 끊었다.
“쓰세요. 끈을 만들어 뒀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계속 찾아다녔는데 성종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다시는 숨지 못하게 잡아뒀으면 좋겠어요.”
“...복수야?”
정우는 대답하지 않는다.
성윤이 다시 말한다.
“복수라면 말해. 도울 테니까.”
정우는 성윤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다.
정보통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하지만 정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가는 가족 나들이, 가족끼리 모여 앉아 먹는 식사. 제 기억 속에는 없어요. 그 생각을 하면 치가 떨려요. 하지만 복수를 생각했다면 얼굴 본 김에 칼을 들었을 거예요.”
심각한 얼굴로 말하던 정우가 손을 저으며 픽 웃는다.
그리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냥개 잡아 구워 먹는다고 속이 풀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사냥개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주인이 잘못이지. 그 주인 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네요. 그리고 그놈에게 죄를 묻고 싶어요. 이미 죽어있다면 무덤을 파서라도.”
정우는 오강민을 통해 배후에 있던 놈들을 알아낼 생각이다.
역사에 드러난 놈이 아니라 수면 아래에 숨어 있는 놈들.
그 이름 하나, 하나에게 죗값을 묻는다.
죽어 있다면 무덤을 파서라도 벌을 준다.
정우의 생각이었다.
성윤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좋아. 그건 네 의견에 따르지.”
정우가 성윤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성윤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김대성 의원이 화장실을 전세 냈냐며 타박했다.
자리에 앉자 술잔이 채워지고 비워졌다.
의미 없는 말이 이어졌고 깊지 않은 웃음이 흘렀다.
그러다가 오강민이 성윤의 잔을 채우며 말한다.
“제가 먼저 연락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정보라는 것은 필요한 게 아니면 쓰레기나 마찬가지거든요. 전 원치 않는 쓰레기를 전해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번엔 성윤이 오강민의 잔에 술병을 기울이며 물었다.
“하하, 어떤 정보를 다루시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물어보죠.”
“제 전공이 국회입니다. 부전공은 정부 부처고요. 어느 의원이 누구와 만났는지 싸웠는지 술을 마셨는지 하루만 지나면 다 제 귀에 들어옵니다. 의원님이 궁금할 정보를 예시로 알려드릴까요?”
“제가 궁금한 게 뭐가 있을까요?”
“서안시 동구에 나설 민국당 후보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성윤이 잔을 비우며 말했다.
“예측은 됩니다. 서안시 당협위원장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으니까요.”
오강민이 고개를 천천히 흔든다.
“안종기 의원입니다.”
“네?”
안종기라니......
뉴스 앵커 출신으로 4선 의원이다.
성윤과는 인지도 자체가 다르다.
그는 전국구니까.
조용히 술을 마시던 김대성 의원도 크게 눈을 떴다.
“안종기? 그 사람이 왜 서안시 동구에 나와요? 정치적 기반이 다른 곳에 있잖아요.”
“총선 이후에 있을 대선을 위해서죠.”
김대성 의원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대선을 노린다면 서안시가 딱 맞긴 하네.”
안종기 의원은 지금껏 민국당의 텃밭에 앉아 편안한 생활을 영위했다.
하지만 텃밭에 있을수록 정치인의 가치는 커지지 않는다.
3선, 4선을 해도 ‘거기는 개나 돼지나 민국당이면 다 당선되는 곳이잖아?’라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크려면 불모지를 깎아 터를 만들고 험로를 걸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묻은 먼지와 묻힌 피는 정치인의 훈장이다.
대선을 노리는 안종기 의원에게 텃밭에서만 당선됐다는 것은 콤플렉스였다.
그러던 그의 눈에 서안시 동구가 들어왔다.
서안시 동구는 대한당의 텃밭이라 불린다.
민국당 5선 의원이 가서 깨진 곳이고 민국당의 깃발을 용납하지 않는 곳이다.
말 그대로 불모지.
하지만 안종기 의원은 다른 생각을 했다.
“서른도 되지 않은 꼬맹이가 지역구 의원을 하고 있어.”
“지난 재보궐 선거도 갑질 사건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겼을 거야.”
“대한당의 지지율도 떨어지는 중이지.”
“승산은 충분해. 정치적 커리어를 만들 수 있어.”
전국구 인지도와의 싸움......
성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요.”
“어?”
“안종기 의원을 꺾으면 제 인지도가 전국구가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김대성 의원이 무릎을 치며 웃기 시작했다.
“이 의원, 긴장 좀 해라. 상대는 안종기야. 안종기! 으핫핫핫핫!”
김대성 의원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성윤은 다시 오강민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보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더욱이 안기부 출신에 성종 그룹 전략기획본부에 자리 잡은 사람이다.
오강민이 술잔을 들며 말한다.
“저도 죽기 전에 의원님 소리를 한번 들어보고 싶어요. 그런데 대한당이고 민국당이고 대학 때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했던 인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때가 되면 힘 좀 써 주십시오.”
성윤은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앞으로 친해집시다. 오강민 씨. 내가 연락하지 않아도 정보를 싸 들고 오게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당신을 이용한 개장수들 이름 좀 들어봅시다.’
그 시각, 대한당 중앙 당사.
당대표 계파의 인물들이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백형욱 의원과 거론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순간, 대한당 당대표의 목소리가 쩌렁대게 울렸다.
“도대체!”
그는 말을 잇지 못한다.
꽉 쥔 두 주먹만 파들파들 떨린다.
지난 1년 동안 원내대표로 시작해서 박대철 의원, 백형욱 의원으로 이어진 스캔들.
지지율은 뚝뚝 떨어졌고 지지기반도 흔들렸다.
그 책임은 모두 당대표에게 향한다.
그가 화를 참는 듯 치아를 꽉 물며 말한다.
“이거 주진만이 짓이지?”
백형욱 의원의 입 때문에 당대표 라인이 둘이나 갈려 나갔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는 법이다.
그가 말을 잇는다.
“주진만 최근 동향 파악해서 올려. 누굴 만났고 누구와 밥을 먹었고 어떤 새끼와 전화를 하는지 전부!”
회의실에 앉은 스무 명의 의원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옛!”
당대표의 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국감 끝나면 바로 총선 준비로 들어가. 쇄신을 위해 의원의 절반은 물갈이될 거라고 언론에 알려. 그 절반은 주진만 계파가 될 거야.”
***
국정감사에서 스타가 되기 위해 단단히 준비했던 의원들이 있다.
하지만 백형욱 게이트가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성윤은 애초에 국정감사에서 스타가 될 생각이 없었다.
재보궐 초선에게 스타가 될 기회를 줄 리가 없어서다.
그렇게 국정감사가 끝난 다음 날.
성윤도 선거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선거 기간이 아니니까 당연히 ‘날 뽑아주세요!’라는 말을 하며 돌아다닐 수는 없다.
조용히 우군을 만드는 거다.
그 첫걸음은 시민단체 엄마손 대표를 만나는 것이었다.
낡은 상가 건물의 4층.
엄마손 대표는 쉰두 살의 임향숙이었다.
만약 배우를 했다면 일일 드라마에서 푸근한 엄마 역할을 많이 했을 것 같은 상이다.
“서안시 동구 이성윤 의원입니다.”
성윤의 얼굴을 본 임향숙 대표가 ‘풉’ 웃음을 터뜨린다.
‘어...왜 웃지?’
그녀가 미안한 듯 손을 흔든다.
“웃어서 죄송해요. 어제 가족들이랑 식사하다가 오늘 의원님이 찾아온다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의원님의 이름을 들은 제 딸이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싸인까지 받아 달라던데요?”
“...싸인이요?”
“그...소리치는 남자 아니세요?”
옆에 서 있던 정우가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성윤은 한숨을 푹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저도 어제 아이가 보여줘서 봤는데, 정말 웃겼거든요. 의원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사진 생각이 났어요.”
“하하.”
“인기 많으시던데요? 시민단체까지 찾아오실 필요 없을 것 같던데......”
성윤이 시민단체를 찾아오는 이유를 정확히 파악한 것 같다.
그런데, 인기가 많다니.
임향숙 대표가 ‘몰랐어요?’라는 눈빛을 보이며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장판교 장비 이성윤.’이라는 이름이 박힌 카페 화면이 보인다.
회원 수 5만.
임향숙이 말한다.
“팬 카페래요.”
“이게요?”
팬 카페면 보통 대상자가 알아야 하는데, 있는 줄도 몰랐다.
성윤은 휴대폰을 건네받아 이것저것 내용을 살폈다.
주로 소리 지르는 장면을 합성한 사진들이 올라온다.
정우가 SNS 관리를 하며 올린 사진을 퍼간 것도 종종 보이고.
성윤의 어깨 너머로 팬 카페를 보던 정우가 말한다.
“의원님, 소리 한 번 더 지르셔야겠어요.”
“됐어.”
성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찰칵.’ 정우가 들고 있던 휴대폰으로 성윤을 찍었다.
“뭐해?”
“인상 쓰는 모습 찍었어요. 이거 올리면 또 얼마나 합성이 될까 궁금해서요. 흐흐.”
놀리듯 말했지만 성윤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작업하는 거다.
팬 카페 활성화가 되면 나쁠 것은 없으니까.
정치인은 최악의 사건이 아니라면 계속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좋은 일이다.
정우는 몸을 돌린 뒤 팬카페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윤은 다시 임향숙 대표와 마주봤다.
“제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계시니까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민단체와 정치인이 손을 잡으려면 정치적 이념이나 목표가 같아야 하잖아요.”
임향숙 대표는 엷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저희는 정치적 이념을 따를 생각이 없는데요. 아이들이 배부르게 먹으면 되는 거죠.”
“그걸 돕고 싶습니다.”
“봉사활동 사진 몇 장 찍자고 오시는 것은 싫어요. 번거롭거든요.”
성윤은 국회의원이다.
하지만 임향숙 대표는 속에 있는 말을 편하게 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활동도 하고 후원도 하는 형식으로 돕겠습니다. 사진은 몇 장 찍겠지만 방해하지 않고 똑같은 회원으로 활동하고 싶습니다.”
“우리 회원은 도시락부터 날라야 하는데요?”
“저희 집 근처에 도와야 할 아동이 있다면 아침 식사는 제가 배달해 주고 싶은데요.”
임향숙 대표는 조금 놀란 얼굴이다.
“직접 하신다고요?”
“네.”
“보좌관이나 비서를 시키는 게 아니고요?”
“제 보좌관은 그런 일 안 해요.”
말과 동시에 정우가 확고한 눈빛으로 고개를 흔든다.
“전 제 밥도 못 챙겨 먹어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제게 도시락을 주면 가다가 먹어버릴 겁니다.”
임향숙 대표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이거 진짜야?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입니다.”
임향숙 대표의 입가에 있던 엷은 미소가 깊어진다.
“그럼, 국회의원이 아닌 청년 이성윤으로서 저희와 함께하시겠어요?”
“사진은 찍을 거예요. 하하.”
“그러세요. 사실 우리도 사진은 많이 찍어요. 봉사자를 모을 광고 효과가 있어서요. 당연히 소리치는 남자 사진도 올릴 거고요.”
“감사합니다.”
임향숙 대표가 소파에서 일어선다.
“그럼,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 보여드려야겠죠?”
책상으로 향한 그녀는 앨범 하나를 들고 왔다.
펼쳐서 한 장씩 보여준다.
결식아동이었는데 잘 자라서 지금은 이 봉사를 함께 한다는 청년.
그리고 폐지를 주워 아이들을 후원한다는 할아버지까지.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어?’
성윤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전생에서 성윤의 아내였던 사람이 아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다.
< 가장 중요한 것. -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