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치. - (3) >
***
집으로 들어온 성윤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다가 멈칫했다.
‘꼭두각시?’
전소희가 잘 못 들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백형욱과 손을 잡았다는 것.
그리고 그 목적은 아마도 살생부.
살생부는 성윤만 생각하던 게 아니었다.
‘하.......’
한숨이 흘렀다.
그들이 기획한 살생부가 누구를 겨냥하는지는 뻔하다.
주진만 원내대표의 계파, 나가서는 대한당.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누구지?’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이 스친다.
주진만 원내대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당대표 측 사람들.
대한당을 밟고 올라설 기회를 찾는 민국당.
주류가 되기를 바라는 진보당.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
생각이 이어질수록 모두가 적으로 보인다.
의심이라는 이름의 씨앗이 그렇다.
한번 자라기 시작하면 넝쿨처럼 퍼진다.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의심된다.
정치는 그런 바닥이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
다른 사람이 무너져야 내가 올라간다.
대한민국 오천만 인구 중 단 300명에게만 허락된 자리니까.
“잠 못 주무셨어요?”
다음 날, 책상에 앉은 성윤에게 정우가 커피를 가져오며 물었다.
“좀 설쳤어.”
성윤은 얼굴을 쓸어내린 후 커피잔을 손에 쥐었다.
따듯한 기운이 느껴지자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정우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한다.
“먼저 안타까운 소식부터 전할게요. 한동 일보 특집 기사가 보류됐어요.”
백형욱 의원 문제로 대한당 이미지가 쓰레기가 됐다.
한동 일보도 태풍은 피하려는 모양이다.
예상하던 것.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가 말을 잇는다.
“그리고 등산모임 있잖아요?”
“어, 언제 모인데?”
“일정 모두 취소됐대요. 지금 시기에 의원들이 모여 낄낄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이해한다.
사회적 문제가 커질 때면 나오는 기사가 있다.
국회의원이 골프를 치러 갔다는 등 비싼 음식을 먹었다는 등.......
국민에게 찍히기 전에 알아서 기는 거다.
“다음은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는 소식. 대한당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 중이래요. 그런데 의원님 지지율은 소폭 상승한 것 같아요. 대한당 연구소에 있는 사람에게 들은 정보예요.”
“땡큐.”
좋지만 좋은 소식은 아니다.
개인의 지지율이 높아도 선거에서는 어렵다.
당의 뒷배가 든든해야 한다.
이리저리 앞으로 갈 길에 가시가 뿌려지는 중이다.
정우가 가져온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여의도 갈 거니까 준비해.”
“어디요? 국회?”
“아니, 기자 만나러.”
일단은 우명진 기자를 만나 백형욱 의원의 입에 처박을 정보를 얻어야 했다.
두 사람은 곧장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랐다.
여의도로 가는 길에 성윤이 입을 열었다.
“어제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있어. 백형욱 의원을 컨트롤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네? 컨트롤? 누가요?”
성윤이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는 몰라.”
정우의 입에서 답답한 한숨이 뱉어진다.
특집 기사가 기획되는 등 재선을 향한 청사진이 그려졌던 게 바로 어제다.
그런데 하루 만에 모든 게 뒤틀리고 계속해서 구석으로 밀리고 있다.
“진짜 굿이라도 해야 하나......”
“굿은 됐고, 그 사람을 찾아보기는 해야 하잖아. 그런데, 우리가 알아내기는 힘들 것 같아.”
스스로 모든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정보를 손에 틀어쥘 수 있다면 최고의 시나리오가 될 거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성윤에게는 세력도 정보원도 없다.
가벼운 문제야 정우가 조사할 수 있지만 검은 물 밑에 숨은 이야기까지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말인데, 원내대표에게 요청해야 할까?”
정우가 콧잔등을 긁으며 픽 웃는다.
“원내대표눈 점집 매니아잖아요? 진짜 굿하는 거 아니에요?”
“설마......”
정우가 콧잔등을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겠죠? 백형욱과 우리는 체급 차이가 크잖아요. 욕심을 부리지 않고 협조를 요청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오케이.”
성윤은 바로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주진만 원내대표에게 전화를 거는 거다.
“이성윤입니다.”
-말해, 말해.
주진만 원내대표는 급하게 대답한다.
성윤은 어제 전소희에게 들었던 말을 전했다.
“꼭두각시였을 수도 있대요.”
심각하게 듣던 주진만 원내대표는 조용히 알아보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성윤의 휴대폰 화면은 검게 변했다.
이제 주진만 원내대표는 자신의 세력을 이용해 검은 물밑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할 거다.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어 정보를 찾아올 거다.
“이건 부럽네.”
“뭐가요?”
“모래밭에 떨어진 바늘도 찾아낼 수 있는 능력.”
“의원님도 곧 그렇게 될 거예요.”
“그렇게 만들어줘.”
“네.”
정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고 여의도에 도착했다.
항상 가는 한정식집.
먼저 와 있던 우명진 기자가 성윤과 정우를 반겼다.
두 번째 만남인데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5:5 가르마는 참 익숙해지기 어렵다.
“백형욱의 입을 틀어막을 입마개를 알려달라고요?”
“사나운 애완견한테는 입마개가 필요하니까요. 아무 곳에서나 짖고 물면 민폐잖아요. 주시는 김에 개목걸이와 줄까지 주시면 더 감사하고요.”
애완견이라는 말에 우명진 기자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백형욱이 검찰을 오가는 입장이라 해도 거물은 거물.
대한민국에서 그 누가 백형욱을 애완견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우명진 기자가 성윤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일까 아니면......’
잠시 생각에 빠졌던 우명진 기자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묻는다.
“그럼, 제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어쩌죠? 지금 당장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우명진 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리스크가 커요. 얻는 것 없이 드릴 수는 없죠. 그리고 외상은 사절이라......”
“눈앞에 놓인 마시멜로우 하나보다 나중에 먹을 두 개를 기다리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글쎄요. 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생이라 나중 일은 기약할 수 없네요. 흐흐.”
우명진 기자는 절대 손해 보지 않으려 한다.
그의 속마음을 들어봐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대통령이어도 기브 앤 테이크야.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정보를 맞교환하죠.”
“뭐, 들어봐서 괜찮은 거면요.”
“A 건설 사장의 아들, 알고 보니 잘나가는 연예인 B 씨의 자식.”
물을 마시던 우명진 기자의 행동이 멈칫한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성윤이 슬쩍 웃는다.
“정보 맞교환하시겠어요?”
우명진 기자는 정치인 신변잡기 전문 기자다.
하지만 기자는 기자.
연예인의 이야기와 상관이 없을 법하지만 궁금한 것은 못 참을 거다.
양념을 조금 더 쳤다.
“A 건설사 사장은 지금도 자기 자식인 줄 알고 뻐꾸기 새끼를 키우는 중이죠. B 씨는 한류스타고요. A 건설사 사장 마누라가 B 씨에게 한 달에 주는 돈이......”
꿈속에서 봤던 스캔들이었다.
1년 후 쯤 터질 이야기.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었다.
여중생 중에 우리 오빠가 그럴 리 없다면서 자살 소동까지 벌인 애도 있었을 정도다.
우명진 기자는 말 없이 마른 침을 삼키며 성윤을 바라봤다.
잔잔히 웃고 있는 성윤은 말 그대로 어리다.
하지만 거래를 끌어내는 힘은 탁월하다.
상대의 간지러운 부분을 긁는 것도 능력이다.
‘하룻강아지는 아니었어.’
생각해 보면 이십 대의 나이에 지역구 의원이 된 사람은 수십 년 동안 없었다.
역사를 탈탈 털어도 몇 명 되지 않는다.
‘정치권에서 사, 오십대까지 버틸 수만 있다면......’
괴물이 탄생할 수도 있다.
이제 생각은 다른 쪽으로 흐른다.
하룻강아지인가 아닌가에서......
‘최악의 괴물이 될까? 차악의 괴물이 될까?’
생각을 끝낸 우명진 기자가 마시려던 물 컵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절래 저었다.
“좋아요. 맞교환하죠.”
“좋은 선택 하셨습니다.”
“연예인 문제는 제 전공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성윤 의원님께는 투자한다고 치죠. 미래의 거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하고요. A 건설사는 예측이 되는데 연예인 B가 누군지는 정말 모르겠네요.”
“힙합 가수 MC정근이요.”
“엥? 정말?”
성윤은 꿈속에서 보고 들었던 스캔들을 가볍게 설명했다.
우명진 기자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
중간중간 ‘아...’ ‘개새끼...’등의 추임새를 넣으면서.
그리고 이제 우명진 기자가 말할 타이밍이 왔다.
“...백형욱이 또 어떤 잘못을 저질렀냐 하면요.”
말을 하려던 우명진 기자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목이 타는 것 같다.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먼저 백형욱이 왜 법복을 벗었는지 알아요? 그 새끼가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말했지만 그거 다 구라예요.”
“무슨......”
“그 새끼 그때부터 그 아랫도리 흔들고 다녔으니까. 세 살 버릇 여든 갑니다.”
우명진 기자의 말을 들으며 성윤은 착잡함을 느꼈다.
벌써 썩어빠진 세상에 물들었나 보다.
판사일 때부터 아랫도리를 흔들고 다녔다는 말을 들으며 ‘그게 왜 대한민국에서 살 수 없다는 거지?’ 이 딴 생각을 했으니까.
우명진 기자가 말을 잇는다.
“그때 그 새끼가 했던 짓이 피고인의 아내들에게.......”
재판에 서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심정이다.
특히 밖에 있는 가족들은 더 그렇다.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죄인이지만 그들에겐 가족이니까.
백형욱은 그걸 이용했다.
피해자 가족 중에 젊고 예쁜 여자가 있으면 은밀히 접근해서.....
지금껏 구석에 앉아 조용히 있던 정우가 확 인상을 찌푸렸다.
“쓰레기 새끼네.”
“그게 한두 명이 아니에요. 그 새끼가 그거 들통날까 봐 법복 벗은 거지. 지금 출소한 사람들도 있고 그거 밝혀지면 돌 맞아 뒈질걸요?”
정우가 성윤을 본다.
“의원님, 그냥 돌 맞아 죽게 만들죠. 그런 새끼는 그냥......”
성윤이 잠깐 손을 들었다.
정우의 입이 닫혔다.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참는 모습이다.
성윤의 시선이 다시 우명진 기자에게 향했다.
백형욱이 돌 맞아 죽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살생부는 말하고 죽어야 한다.
“명단 있습니까?”
우명진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날 저녁.
성윤은 강남에 있는 회원제 룸살롱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로 정치인과 기업인 등 고위층이라 불리는 것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룸살롱인 주제에 회원권을 받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급이 있어야 회원권을 준다나 뭐라나.
대한민국 300명만이 갖는 직업인 국회의원도 회원권을 받기는 쉽지 않다.
거대 정당에 속해 있어야 하고 또 뭐가 있어야 하고 이리저리 재고 있다.
기업인도 마찬가지다.
재계 순위에 올랐는지 회사에서의 위치는 어떤지......
입장하는 것부터 프리미엄을 따지는데도 장사는 폭발적이다.
사회적인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찾기엔 최고였으니까.
건물에도 룸살롱이란 간판은 없다.
그저 보통 건물.
하지만 그 안은 말 그대로 별천지다.
천장에는 최고급 샹들리에 바닥에는 매끄러운 대리석까지 고급이라는 말을 잘 모르는 성윤이 보이게도 비싸 보였다.
“이런데도 오시네요?”
성윤을 이곳에 부른 사람은 주진만 원내대표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갑이 얇아서 자주는 못 와. 누가 사준다고 할 때만 오지. 술 먹고 취하는 것은 똑같은데 이런 곳에 돈 쓰고 싶지도 않고. 막걸리나 양주나 그게 그거지. 그렇지 않나?”
“그런데, 왜 여기서 보자고......”
“찾았어.”
“네?”
“백형욱의 뒤에 있는 놈.”
낮에 말했다.
그런데 저녁에 찾았다고 한다.
국정원이라도 움직였나 싶을 정도로 빠른 결과였다.
역시 권력은 좋다.
“이 술집이 뭐하는 곳인지는 알지?”
“돈 많은 사람이 돈 쓰는 곳이요.”
주진만 의원이 픽 웃는다.
“각 방에는 정치인과 기업인이 모여 앉아 있어. 내일의 주가가 결정되고 국가 정책이 만들어지는 곳이야. 이놈들은 술에 취해 여자를 품에 안고 허세를 떨지. 자기가 뭘 하는지 어쩌고저쩌고. 그러니까 이곳엔 고위급의 정보가 돌고 있어.”
예전에는 그런 정보가 흐르는 곳이 고급 요정이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화하며 이런 식으로 바뀌고 있나 보다.
딸칵.
문이 열렸다.
시선을 틀자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삼십 대 초반의 여성이 들어온다.
아나운서 같은 단발머리, 이국적인 이목구비, 청순과 섹시가 함께 있는 것 같은......
그녀가 성윤을 향해 살짝 허리를 굽힌다.
“처음 뵙겠습니다.”
< 가치. -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