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치. - (1) >
성윤의 입에서 한숨이 흘렀다.
선거로 향하는 길이 너무 쉽다고 생각했다.
‘변수만 없었으면 했는데......’
그런데 변수가 아니라 악재가 왔다.
백형욱 의원이 대한당에 똥을 뿌렸다.
대한당의 지지율은 폭락할 테고 재선을 향한 길도 험난하게 변할 거다.
“죄송합니다만 혹시...의원님도 연루된 겁니까?”
-무슨 개소리야!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김대성 의원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사건에 연루되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었다면 총대를 메고 저격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런데도 불안해하는 이유는 하나다.
악에 받친 백형욱 의원이 없는 사실을 진실처럼 떠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거론된 사람은 누구도 이겨내지 못할 거다.
사람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결백이 입증되어도 믿을 사람은 없다.
마녀사냥처럼 날조된 비난을 받으며 이 바닥을 떠나야 했다.
-백형욱 그 새끼는 내 이름을 1번으로 말할 거라고!
통화가 종료됐다.
정우가 휴대폰을 건넨다.
“실검에도 올랐어요.”
성윤은 화면을 확인했다.
메이저 언론은 눈치를 보는지 조용하다.
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소규모 업체는 경쟁하듯 기사를 올려대고 있다.
댓글은 광란의 도가니였다.
-폭로? 뭘 폭로하겠다는 거지?
-뭐겠어? 그놈의 아랫도리 이야기지.
-딱 봐도 각 나오네. 혼자 했겠냐? ㅋㅋㅋㅋㅋ
-씨발 꿀잼. 팝콘 준비요!
-대한당 당명 바꿔라 대물당으로.
-더러운 새끼들. 이놈들은 거세해야 해.
-누가 누가 걸려들까? 전자발찌차고 반성해라 새끼들아.
-이런 기사 나오는 시기가 참......뭘 물타기 하려고.
백형욱 의원은 무엇을 폭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 스캔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우가 십 년은 늙어 보이는 얼굴로 한숨을 내뱉는다.
“대한당 지지율이 더 떨어질 것 같아요.”
“응, 어디서 멈추느냐가 관건일 것 같아.”
성윤의 건조한 대답에 정우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특집 기사까지 따내고 분위기 좋았는데 백형욱 그 새끼......이러다가 특집 기사도 없어질 것 같고 진짜 미치겠네.”
처음 들어올 때는 기사 반응이 좋다며 의기양양했던 정우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반대의 모습으로 방을 떠나고 있다.
힘없이 터벅터벅.
그리고 ‘탁’ 문이 닫혔다.
성윤은 창밖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백형욱...’
권력과 선을 긋고 법에 따라 심판했던 대쪽 판사였다.
배석판사와 단독판사들에게 존경하는 법관을 물으면 항상 거론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명예로운 법복을 벗고 배지를 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서.
그때는 진심이었을 거다.
하지만 변했다.
권력의 길을 걸을 때마다 그가 생각했던 신념은 허상이 되었다.
그 위로 먼지가 묻고 피가 뿌려졌다.
순수했던 마음은 욕망이 되었고 권력을 통해 성욕을 채웠다.
그리고 지금은 악만 남아 추악하게 발버둥을 치고 있다.
‘복수일까? 아니면 협박일까?’
모든 사람의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
그것이 정치인이라면 더더욱.
백형욱 의원이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거다.
성윤이 생각하는 것은 우선 복수였다.
뒤통수를 맞고 좋아할 사람은 없다.
친했던 사람이 등을 돌릴 때 백형욱 의원의 마음은 썩어 들어갔을 거다.
간절한 부탁에 돌아온 냉소적인 목소리는 복수를 다짐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백형욱 의원의 진심이 복수라면 대한당은 끝장이다.
잃을 것 없는 백형욱 의원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다음은 협박......
백형욱 의원은 모든 것을 폭로하겠다며 스스로 벼랑 끝에 서 있다.
극단적인 협상 전술이다.
하지만 뒤돌아섰던 의원들이 전전긍긍하는 걸 보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복수와 협박......뭘까?’
결론 내렸다.
‘협박이야.’
복수였다면 무작정 폭로해 버리고 아비규환을 즐겼을 거다.
하지만 백형욱 의원은 기자 회견을 예정했다.
시작되기 전에 누구든 와서 카드를 제시하라는 뜻이다.
‘원하는 게 뭘까? 형량을 줄이는 것?’
머릿속이 차가워지자 생각이 점차 긍정적으로 변해갔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를 동반하는 법.
그럼, 이걸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우선이다.
백형욱 의원의 물귀신이 성윤까지는 오지 않을 거다.
막말로 누워서 구경만 하면 된다.
‘선거가 문제 되기는 하지......’
하지만 선거까지는 아직 몇 달이 남았다.
그 전에 다른 사건이 터질 거다.
대한당에는 사건을 사건으로 덮는 전문가가 많다.
때마다 터져주는 연예인의 스캔들도 참 감사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대한당에 그런 문제가 있었나?’라는 정도만 남아 있을 거다.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주진만 원내대표다.
-오늘 밤에 내 사무실로 와. 기자 안 붙게 조심하고.
“네, 그럼 밤에 뵙겠습니다.”
짧은 통화를 종료했다.
지금 대한당에서 가장 똥줄 타는 사람 중 하나가 주진만 원내대표다.
비주류였던 그가 갑자기 세력을 불려 원내대표까지 된 이유.
백형욱 의원의 뒤통수를 친 김대성 의원과 그 배신자들이 우르르 들어왔기 때문이니까.
백형욱 의원이 입을 뻥끗하는 순간 세력은 한순간에 박살 날 수도 있었다.
성윤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번호를 누르자 곧 목소리가 들린다.
-우명진입니다.
우명진, 지난번 김미선 기자와 함께 만났던 기자다.
그러니까 몇 년 후 ‘리얼팩트’라는 정치 전문 언론사 대표가 될 사람.
“이성윤입니다.”
-전화 올 줄 알았어요. 흐흐흐.
눈치는 빠른 사람이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볼게요. 백형욱 의원이 할 폭로에 진실이 담겨 있을까요?”
-음......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적어도 진실은 없을 거예요.
“대한당 의원 중에 연루된 사람이 없다는 것인가요?”
백형욱 의원의 말이 단순 협박인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사실 확인은 해야 했다.
우명진 기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지는 않은데요. 거기까지 까발려지면 백형욱은 한국에서 못 살아요.
한국에서 못 살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적당히 이빨 털어서 배신했던 사람들이나 끌고 갈 것 같아요.
성윤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방을 벗어나 사무실로 나왔다.
“정우야.”
정우는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성윤을 향했다.
“아직 고민 중이에요.”
“고민은 계속하고 원내대표님 호출이야. 준비해.”
정우가 노트북을 챙겨 일어났다.
여전히 표정이 복잡하다.
잔뜩 죄를 지은 얼굴......
보좌관으로서 한 수를 내야 하는데 답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한가보다.
성윤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꿈속에서 본 정우는 악마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악독했다.
물론 그 악마 같은 짓은 성윤을 위해서였다.
신념을 갖고 길을 걸으라며 앞에 놓인 먼지를 다 처리해줬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마흔이 넘은 이후였다.
지금의 정우도 엄청나게 우수했지만 시간이 주는 경험을 채울 수는 없다.
특히 이 바닥에서는......
성윤은 정우가 더 발전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천천히, 급하지 않게.
차에 올랐다.
출발하며 정우가 빵과 우유를 건넨다.
“생각해보니까 오늘 한 끼도 안 드셨어요.”
“넌?”
“여기.”
정우가 빵을 들어 보인 후 입에 문다.
가만히 보니까 정우의 얼굴이 수척하다.
“됐어. 시간 넉넉하니까 먹고 가자.”
옛말에 일을 시켜도 먹이면서 시키라고 했다.
성윤과 정우는 가까운 김밥 가게에 들어가 앉았다.
참치김밥 두 줄과 라면 두 개.
정우는 떡라면을 시켰고 성윤은 만두 라면을 시켰다.
음식을 기다리며 정우가 말한다.
“국회의원 식비 까보면 우리가 제일 적을 거예요.”
“왜? 가끔 한정식 먹잖아.”
“가끔이잖아요, 대부분은 편의점, 분식 그리고 자장면과 패스트푸드.”
“난 분식하고 자장면이 제일 맛있어.”
정우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래요. 먹는 시간도 오래 안 걸리고요. 그런데, 제가 이 동네 자장면을 돌아가면서 시켜 먹었거든요? 어디가 제일 맛있는 줄 아세요?”
정우는 자장면에 대해 일장 연설을 시작했고 성윤은 잠자코 들어줬다.
먹는 이야기로 침울한 기분이 사라지면 다행이니까.
정우가 한참을 떠들 때 라면과 김밥이 동시에 나왔다.
아침에 빵 한 조각 먹고 온종일 굶어서 그런지 정말 맛있게 보였다.
“먹자.”
성윤이 라면에 젓가락을 댔다.
그 순간 휴대폰이 진동을 울린다.
정우가 팍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예요?”
“박무혁 의원님.”
재벌 출신 박무혁 의원이다.
“아...먹을 때는 좀 피해서 전화 주지.”
“전화하고 올게. 먼저 먹고 있어.”
성윤은 휴대폰을 들고 가게를 벗어났다.
“이성윤입니다.”
-걱정돼서 전화했는데 목소리가 밝아. 낙관적으로 잠시 지나가는 비라고 생각하는 건가?
박무혁 의원도 대한당이다.
하지만 그는 동떨어진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낮고 느긋하게......
‘하긴......’
대한당이 무너져도 박무혁 의원은 상관없다.
본사가 있는 곳에 출마하면 무소속이어도 몰표를 받을 수 있으니까.
박무혁 의원과 대한당의 지지율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대한당의 능력만 보면 지나가는 비로 끝나겠지. 하지만 그것은 민국당을 무시하는 태도야. 민국당은 기우제를 준비하고 있을 거야.
그 한 마디에 많은 것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민국당의 브레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얼굴.
총선을 준비하는 민국당 당대표.
대한당이 계파 갈등으로 갈가리 찢기고 있을 때 그들은 힘을 모으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윤 의원......
“네, 의원님.”
-상대가 벼랑 끝에 서서 협박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네?”
-밀어버려. 벼랑 끝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겨우 매달려 있게 만들어. 살려달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 그럼, 협박의 주체가 바뀔 거야. 살려주기만 해도 감사하다고 절을 하겠지.
성윤은 침을 삼켰다.
정치인은 벼랑 끝 전술을 보면서도 명분을 찾는다.
하지만 박무혁 의원은 상황을 유리하게 바꾸려 한다.
이게 재벌의 생각인가 보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성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다.
...성윤 역시 상황을 바꾸려 했다.
박무혁 의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정치는 선과 악이 아니야. 선하게 살려면 다른 일을 찾아봐.
성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무혁 의원이 낮게 웃는다.
-정치가는 국민을 위해 악마가 될 수 있어야 하지. 기대할게.
툭, 통화가 종료됐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이 인간 도대체 뭘 생각하는 거지?’
성윤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박무혁 의원의 속마음에서 들었던 말은 대부분 ‘재미’였다.
‘나를 갖고 노는 건가?’
***
주진만 원내대표의 사무실.
“김대성 의원, 진짜 아닌 거 맞죠?”
주진만 원내대표가 세상 모든 걱정을 끌어안은 표정으로 물었다.
김대성 의원은 입을 꾹 닫고 눈을 감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주진만 원내대표는 손에 쥔 종이컵을 거칠게 쓰레기통에 넣으며 다시 묻는다.
“대답 좀 해봐요. 백형욱이랑 같이 어린 연습생들 만나고 그랬던 겁니까?”
“......”
“말 좀 해봐요. 지금 이 문제로 난리가 났잖아요! 인터넷 댓글을 보면 김대성 의원과 다른 의원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어요!”
김대성 의원이 머리를 북북 긁으며 주진만 의원을 향했다.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말을 해야 믿든 안 믿든 하죠!”
“안 했어요! 안 했어! 연예인 건든 적은 있지만 난 가려가면서 만나요! 에이 씨발, 이성윤은 왜 안 와요? 빠릿빠릿한 애가 와야 아이디어도 내고 그럴 텐데.”
“잠깐만요. 뭐요? 씨발?”
이 두 사람은 원래 친하지 않다.
뜻을 위해 함께 모였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가 일어나니 가깝지 않던 마음의 거리가 더 벌어지고 있었다.
사무실의 분위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때, ‘딸칵’ 문이 열리고 보좌관이 들어왔다.
“이성윤 의원 왔습니다.”
주진만 의원이 반색한다.
“빨리 들어오라고 해!”
마음이 급한지 손까지 파닥파닥 흔든다.
그리고 성윤이 들어왔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김대성 의원이 묻는다.
“방법이 있을까?”
“네?”
“이성윤 의원, 잔머리 좋잖아! 뭐라도 말해 봐.”
주진만 의원도 고개를 끄덕끄덕.
조금 전까지 인상을 쓰던 두 사람은 성윤을 보며 대동단결했다.
아무래도 성윤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참신한 해결 방법을 원하는 것 같다.
성윤이 턱을 매만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름을 붓는 것은 어때요?”
< 가치. -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