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일비재. - (6) >
***
투표가 끝났고 개표도 끝났다.
사회자가 개표 결과를 들고 단상에 오른다.
“개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사회자에게 집중되었다.
출마한 주진만 의원은 고개를 숙인다.
마치 판사 앞에서 형을 기다기는 사람 같다.
반면에 당대표는 담담하다.
이길 것을 기대하는 눈치다.
성윤의 옆에 앉은 김대성 의원은 말이 없어졌다.
기도하듯 손을 잡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사회자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이어졌다.
“총 106명의 의원이 투표해서 65표 대 41표, 24표 차이로 주진만 의원이 원내대표에 당선되었습니다.”
“와!”
찬바람이 불던 행사장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주진만 의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지한 사람들은 손을 번쩍 들며 일어섰다.
손바닥으로 탕! 탕! 탕! 책상을 치며 좋아하는 의원도 보였고 펄쩍펄쩍 뛰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당대표와 그 라인의 인상은 확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의 속마음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씨발!’
하지만 그들 역시 정치가다.
찌푸렸던 인상이 금세 펴졌다.
당대표는 주진만 의원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한다.
“원내대표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악수하자 다시 ‘와!’ 소리가 퍼졌다.
비주류의 완벽한 비상.
이 순간 당 권력의 그림이 새롭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시끌벅적한 가운데 김대성 의원만이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그가 놀란 눈을 껌뻑거리며 성윤을 본다.
‘진짜 24표 차이잖아?’
전문가들도 네다섯 표차를 예측했다.
승리할 후보를 명확히 점찍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성윤은 표차까지 정확히 찍어 냈다.
김대성 의원의 눈빛에 의심이 차오른다.
‘혹시, 이놈이 다른 의원들의 약점을 잡고 있는 것 아냐?’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생각이 그쪽으로만 향한다.
김대성 의원의 마음을 듣고 있던 성윤이 조용히 입을 연다.
“찍었는데 맞췄네요.”
“어? 찍어?”
“분위기가 그럴 것 같았거든요.”
성윤이 쭉 기지개를 켜며 말을 이었다.
“뭐든지 해주신다고 했죠?”
김대성 의원의 얼굴이 확 굳어진다.
원내대표 선거 때문에 잊고 있었다.
성윤은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서서 조종하려는 놈이다.
그리고 농담처럼 던진 ‘뭐든지 해준다.’는 말을 진짜 실천할 나쁜 놈이다.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그런데 뭘 원하지?”
“생각해 볼게요.”
노리는 것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말할 생각은 없다.
지금은 승리의 기쁨을 즐기게 놔둬야 한다.
사람은 풀어줬다 잡아줬다 하며 다루는 거니까.
성윤의 시선이 주진만 의원에게 향했다.
인사라도 하고 떠나려 했는데 주진만 의원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는 의원들이 줄을 서 있다.
머뭇대던 김대성 의원도 사진 한 방 박으려고 가세하며 한 명이 더 추가됐다.
‘인사야 나중에 하면 되지.’
성윤은 행사장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틀었다.
“의원님! 이성윤 의원님!”
뒤를 돌아보자 주진만 의원의 보좌관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그가 성윤의 앞에 멈춰 서서 숨을 고른다.
“주진만 의원님이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 했습니다.”
“저도 축하한다고 말씀 전해주세요. 직접 인사드리려 했는데 사람이 많네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진만 의원님이 전하라는 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뭐죠?”
주진만 의원의 보좌관은 주변에 듣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후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천,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진만 의원은 성윤이 원하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냈다.
고개를 끄덕이자 보좌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조만간 술 한잔하자고도 말씀하셨는데, 이성윤 의원님과 술을 드시면 며칠 동안 환자처럼 누워계셔서......”
“하하, 적당히 마실게요.”
“그럼, 감사하겠습니다.”
보좌관은 멋쩍은 표정으로 웃는다.
주진만 의원의 술 때문에 고생인가 보다.
복도로 나오자 정우가 보였다.
어딘가에 전화하고 있다.
성윤을 확인한 정우가 통화를 종료하며 말한다.
“제가 예전에 뭐를 준비한다고 했잖아요?”
“어.”
주진만 의원과 처음 술을 마셨을 때, 정우는 다른 곳에 다녀왔다.
어디 있었냐고 물었더니 “글쎄요. 아직은 기획단계라 좀 더 구체화되면 말씀드릴게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우가 입을 연다.
“의원님, 방송 출연 한번 하실래요?”
“방송?”
“선거법에 걸리지 않을 시기, 하지만 총선이 임박했을 때,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오늘 보니까 인지도가 영 아니어서......”
성윤이 픽 웃었다.
“그동안 PD 만났어?”
“PD도 만나고 작가도 만나고 여러 사람 만나고 다녔죠. 어때요? 의원님만 콜하면 진행할게요.”
“글쎄.”
방송 출연은 독이 될 수도 있고 득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토론 방송.
잘만 하면 똑똑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어버버하는 순간 지울 수 없는 흑역사가 탄생한다.
게다가 논객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토론이 직업이나 마찬가지다.
정치인이 혓바닥으로 먹고산다고 하지만 그들 역시 만만치 않다.
토론이 시작되면 논객들은 꼬투리를 잡을 순간만 기다린다.
그러다가 잡히는 순간 물고 뜯고 씹으며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공격한다.
토론에 나가려면 완벽한 준비를 해야 한다.
“고민 좀 하자.”
“알겠어요. 일단 홀딩 할게요.”
성윤과 정우는 국회 의원회관에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의원회관은 의사당 옆에 있는 10층 건물이다.
이곳은 의원들의 사무실과 회의실 등등이 존재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해장 라면이 맛있다는 소문도 있다.
어쨌든, 이곳은 국회의원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그래서 국회가 시작되며 사무실을 배정받을 때 눈치 싸움이 벌어진다.
가장 선호하는 명당은 대통령을 배출했거나 한강 또는 국회 광장의 조망을 즐길 수 있는 6, 7, 8층이다.
하지만 방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3선 이상 중진은 되어야 했다.
초선은 어쩔 수 없이 저층으로 간다.
게다가 성윤은 선택의 기회조차 없었다.
박대철 의원이 있던 방을 써야 했으니까.
복도를 걸으며 정우가 말했다.
“먼저가 계세요. 매점에서 주전부리 좀 사서 올라갈게요.”
“응.”
정우가 떠났고 성윤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선거 때문에 지금껏 태우지 못한 담배가 땡겼다.
띵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흡연실이......’
흡연실은 6층에 있다.
그런데 흡연실을 찾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계단에서 피우는 사람, 테라스에서 피우는 사람 등등 난리도 아니다.
흡연 금지라는 표시가 무색할 정도다.
국민에게는 지키라고 하면서......
하지만 성윤은 지킬 것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전화를 붙잡고 서둘러 올랐다.
7층을 꾹 누르며 전화에 대고 말을 잇는다.
“어, 예상과 달리 주진만 의원이 됐어.”
중저음의 목소리, 성윤은 누군가 해서 옆을 쳐다봤다.
검은 뿔테 안경에 깡마른 체형.
그리고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눈매.
‘오대민 의원!’
민국당 지지자들에게도 호응을 받는 몇 안 되는 대한당 의원이다.
국정감사나 청문회에 나서면 상대가 누구든 시원하게 박살을 내는데 그 모습이 청량감을 준다나 어쩐다나......
하지만 그는 아직 비주류다.
‘내 말은 맞지만 네 말은 틀렸다.’라는 독선적인 태도 때문에 세력이 모이지 않는다.
논란을 빚은 적도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 빼고는 다 잘하는 국회의원.’이라는 이상한 칭호를 달아줬다.
그를 보며 성윤은 빙긋이 웃었다.
‘반갑네.’
꿈속의 성윤은 오대민 의원과 친했었다.
민국당으로 이동해 배지를 달았을 때였다.
가끔 만나 소주 한잔을 했었는데 몇몇 정책을 제외하면 말이 잘 통했다.
다른 사람은 그의 말과 행동을 독선으로 봤지만 성윤은 신념으로 봤었으니까.
시선을 느낀 오대민 의원이 시선을 틀어 성윤을 향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서안시 동구 이성윤 의원입니다.”
“아......알아. 이번에 당선됐지?”
현실에서 오대민 의원을 가까이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그는 대한당의 행사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
이번 원내대표 선거도 패스했다.
그는 신념과 엘리트 의식으로 무장한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악수 한 번 하고 ‘항상 응원했습니다.’라는 말을 할까 생각했는데......
오대민 의원의 입술이 살짝 틀어지는 걸 봤다.
뭔가 비웃는 느낌.
감각이 서늘해졌다.
순식간에 희미한 미소로 바뀌었지만 성윤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뭐지?’
그때, 그가 손을 쑥 내민다.
“반가워, 앞으로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임 가입한 것 있나?”
“아직 없습니다.”
“생각 있으면 우리 모임에 드는 것은 어때? 가끔 모여서 등산하는 모임인데, 의원들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직업군도 있어서 즐거울 거야. 전문직이 많으니까 견문도 넓힐 수 있고.”
세력이 약하니까 초선 의원을 넣겠다는 의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윤은 오대민 의원의 성격을 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잔챙이를 가까이 두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방금 봤던 비틀린 입술은 호의적인 목소리로 포장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성윤은 그의 속마음을 듣기 시작했다.
한껏 협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발로 기어왔네?
그때, 엘리베이터가 6층에서 멈췄다.
성윤은 복잡한 생각을 갖고 엘리베이에서 내렸다.
그리고 오대민 의원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오대민 의원이 빙긋이 웃으며 손을 흔든다.
‘도대체 왜?’
성윤은 오늘 오대민 의원과 처음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왜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흡연실에 앉아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는데 정우가 들어와 커피를 건넨다.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땡큐.”
“표정이 왜 그래요?”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오대민 의원을 만났거든?”
정우가 눈동자를 움직이며 오대민 의원을 떠올린다.
“재선 의원이죠? 청문회 파괴자.”
“어, 맞아.”
“그런데요?”
“자기가 있는 등산모임에 들어오래.”
“잘 된 거잖아요? 그 사람 앞으로 거물 될 것 같던데.”
성윤이 고개를 저었다.
“속이고 있어.”
“네?”
“자기 모임에 불러놓고 뭔가를 할 생각인 것 같아. 망신을 주거나 아니면......”
“왜요?”
지이이잉, 정우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네, 국회의원 이성윤 보좌관 이정우입니다. 아, 기자님. 알겠습니다. 사무실에서 기다릴게요.”
정우가 통화를 종료하며 성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김미선 기자요. 원내대표 선거 끝나고 의원님 인터뷰 따려고 찾아다녔나 봐요. 사무실로 오라고 했어요.”
성윤은 담배를 비벼 끈 채 일어섰다.
그리고 내려간 사무실 앞에는 김미선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 가지 소식이 있어요.”
그녀는 앉자마자 말한다.
인터뷰하러 온 게 아닌 모양이다.
성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윤채아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성윤이 픽 웃었다.
오대민 의원 때문에 답답했던 마음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그걸 왜 생각 못해서......’
윤채아를 비례대표로 추천한 것은 오대민 의원이었다.
엘리트의식으로 무장한 오대민 의원에게 윤채아는 최고의 액세서리였으니까.
그런데 윤채아와 포지션이 겹치는 성윤이 나타났다.
그것도 어리바리 뒤처지는 게 아니라 앞서고 있다.
‘그러니까 이번 공천에서 날 내리고 윤채아를 올리려고 하는 거지?’
헛웃음이 흘렀다.
오대민 의원, 꿈속에서는 친했다.
‘이번에는 어떨까?’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 바닥에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니까.
< 비일비재. -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