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일비재. - (5) >
***
서안시로 돌아가는 길, 성윤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반은 누워 있는 자세로 창밖을 보는 중이다.
봉사활동을 한 후 마신 술 한 잔이 몸을 참 피곤하게 한다.
하지만 지친 몸과 달리 머릿속은 팽팽 돌아가는 중이다.
‘박무혁 의원......’
친의가 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계속해서 경고음이 울린다.
속을 알면 좋겠지만 어떤 생각도 읽을 수 없으니 답답했다.
꿈속을 기억해도 다를 것은 없었다.
박무혁 의원이 당권과 대권에 도전했을 때 성윤은 운전대를 놓고 업무에 시달리던 때였다.
“기사 떴어요. 읽어 보세요.”
정우가 휴대폰을 건넸다.
봉사활동에 관한 기사가 보였다.
기자가 장담했던 대로 내용은 참 감동적으로 잘 썼다.
아이들이 성윤을 잘 따랐고 마지막에는 가지 말라며 울었다는 내용.
하지만 댓글은 두 개.
복사해서 베낀 기사들을 찾아봐도 마찬가지였다.
초선 의원의 봉사활동에 관심 쏟을 사람은 많지 않다.
이리저리 기사를 찾아보는 성윤을 향해 정우가 말한다.
“악플 없는 게 어디에요.”
“있는데?”
“있다고요?”
“읽어줄까? 이성윤은 박무혁 의원에게 붙어먹는 병풍이래. 공감도 두 개나 찍혀 있어.”
정우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래도 사진이 잘 나와서 총선 때 적절히 쓸 수 있겠어요. 들어가면 의원님 SNS에도 바로 올릴 게요.”
“땡큐.”
“그런데, 내일이 선거네요.”
원내대표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예상했던 대로 당대표가 내세운 후보와 비주류였던 점집 매니아 주진만 의원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네다섯 표 차로 승부가 갈릴 것 같다는 전망이에요.”
성윤이 팔짱을 끼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슬아슬한 승리는 또 다른 계파 갈등의 씨앗이 된다.
패배한 측은 ‘잘 하면 이길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을 갖고 승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한당은 계파 갈등과 비리 적발로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런데 총선이 가까운 상황에서 또 밥그릇 싸움을 하면 지지율은 폭락.
민국당은 ‘감사합니다.’하고 넙죽 절을 할 거다.
그럼 성윤의 재선도 흔들흔들 위험한 상황에 돌입할 수 있다.
‘원내대표가 결정되면 바삐 움직여야겠어.’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정우가 떠났고 성윤은 뒷목을 꾹꾹 주무르며 계단을 올랐다.
현관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앞집 문이 삐걱 열린다.
“이제 오세요?”
가수 지망생 전소희다.
“아, 네.”
“저...커피 한잔 사도될까요?”
“산다고요?”
“네, 제가 살게요.”
성윤이 슬쩍 웃으며 손가락으로 집을 가리켰다.
“그럼, 5분 후에 뵐까요? 옷 좀 갈아입게요.”
5분 후, 성윤은 편안하게 티셔츠에 모자를 눌러 쓰고 나왔다.
모자를 쓰지 않아도 알아 볼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항상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조심해야 한다.
두 사람이 가까운 편의점 파라솔에 앉은 시간은 밤 10시 30분.
취객이 왔다 갔는지 테이블 위에는 맥주 캔이 한 가득이었다.
성윤이 테이블을 치우자 전소희가 편의점 커피를 들고 나온다.
아이스 컵에 비닐에 담긴 커피를 뜯어 담는 종류다.
그녀가 건네서 입에 댔는데 생각보다 맛있다.
“괜찮네요?”
“자주 먹어요. 양도 많고 맛있어서요.”
“그런데, 어쩐 일로?”
성윤이 비밀번호를 누를 때 문을 열었다는 것은 그녀가 기다렸다는 거다.
이유가 있겠거니 물었다.
“아, 저 소속사 찾았어요. LHL이라는 대형 기획사인데요. 혹시 아시나요?”
텔레비전을 뉴스 보는 용도로 쓴다고 해도 LHL을 모를 수 없다.
워낙 큰 기획사니까.
성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잇는다.
“연습생 조금 하다가 제가 만든 곡으로 데뷔하기로 했어요.”
“정말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비극적이었던 그녀의 미래는 완벽하게 바뀐 것 같다.
성윤이 활짝 웃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자랑은 하고 싶은데 할 사람이 없어서요. 의원님만 기다렸어요.”
‘자랑할 사람이 없다고? 부모는? 친구는?’
묻고 싶었지만 말았다.
사람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성윤이 커피를 내려둔 뒤 일어섰다.
“이거 커피로 끝날 일이 아닌데요? 제가 거하게 술 살게요.”
“괜찮아요. 그냥 자랑만 들어주시면 되는데......”
“잠시만요.”
성윤은 편의점에 들어가서 정말 거하게 들고 나왔다.
캔 맥주 두 캔, 육포, 새우깡......
육포를 뜯는 성윤을 보며 전소희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거하게 라면서요?”
“육포 비싸요. 아, 먼저 먹는지 물어봤어야 하는데......”
육포를 안 먹는 사람도 있다.
대답을 기다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그녀가 맥주를 입에 대며 성윤을 빤히 바라본다.
시선을 느껴 마주보면 휙 눈을 내리고.
그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계속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원님께서 제 노래를 칭찬 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포기했을 거예요.”
성윤이 맥주를 들었다.
“엘범 나오면 싸인해서 주세요. 제가 1번 팬 할 게요.”
“네! 제일 먼저 드릴게요. 약속.”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내었다.
그 모습이 참 귀엽다.
성윤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주한 사람은 대부분 뱃속에 능구렁이를 키우고 있었다.
속은 더러우면서 선한 미소를 짓는 자들, 역겨웠다.
그런데 겉과 속이 똑같은 전소희를 만나 대화하니 즐거웠다.
편하기도 하고.
성윤의 웃는 모습에 그녀의 얼굴이 민망하게 변한다.
내밀었던 새끼손가락을 조심스레 접으며......
“죄송해요! 제가 예의 없게......”
“아뇨, 아니에요.”
성윤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손가락에 걸었다.
“제일 먼저 주세요. 내가 1번 팬인 것 잊지 말고요.”
“네.”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마시는 맥주 한잔은 참 맛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성윤은 다시 뱃속에 능구렁이를 키우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국회 본청에는 대한당 원내대표 선거라는 플래카드가 크게 걸려 있었다.
그 아래로 기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카메라 기자를 제외하고도 오십여 명, 꽤 많은 숫자다.
모두 집권당의 새로운 원내대표가 누가 될지 기대하고 있었다.
원내대표는 의회 내에서 정당을 대표하는 직책이다.
보통 중진 의원이 선출되며 원로들은 출마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당대표에 밀려 2인자라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원내대표 선거는 조금 달랐다.
대한당의 갖은 구설수로 당대표의 지도력이 문제되고 있었다.
당대표를 갈아야 한다는 의견도 속속 나오는 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 선거를 지켜보며 다가올 총선의 공천권을 가늠하고 있었다.
당대표가 다시 한 번 당권을 휘어잡을지 아니면 비주류의 반란이 일어날지......
“누가 될 것 같아?”
“전 당대표 측이요.”
“왜?”
“아무래도 주진만 의원은 비주류잖아요. 세력을 만들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을 것 같은데......”
다른 기자가 반대 의견을 낸다.
“난 주진만 의원이 될 것 같은데? 대한당 내부에서도 새로운 인물을 원하잖아? 주진만 의원이면 이름값이 없으니까 딱이지. 얼굴도 푸근한 옆집 아저씨고.”
정치 기자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그만큼 접전이었다.
그리고 대한당 의원들이 하나하나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다를 떨던 기자들이 의원들을 붙잡았다.
그리고 취재를 시작했다.
“어느 후보를 지지하십니까?”
“앞으로 대한당의 방향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성윤도 복도에 들어섰다.
하지만 다가오는 사람은 없다.
유명 정치인을 향해 걸그룹 따라 다니듯 하던 기자들이다.
그런데 성윤이 나타나자 모세의 기적처럼 쫙 피한다.
정우가 머리를 북북 긁었다.
“의원님의 인지도를 높일 방법을 생각해봐야겠어요. 이것들이 미래의 대통령을 놔두고......”
모시는 의원이 찬밥신세가 되는 것은 보좌관에게 짜증나는 일이다.
하지만 성윤은 대수롭지 않았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서 좋잖아?”
“아뇨, 마음에 안 들어요. 제가 저 기자들 얼굴 기억해 둘게요. 그리고 나중에 유명해졌을 때 인터뷰 들어오면 까야겠어요.”
정우는 이상한 곳에서 불타오르는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선거행사가 시작됐다.
사회자의 목소리로 당대표가 연단에 오른다.
그러자 떠들썩하던 행사장은 한 순간에 얼어붙었다.
피부에 칼날이 닿는 것 같은 날카로운 분위기.
말 그대로 엄숙하다.
오늘 선거로 당의 권력 지도가 새롭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당대표가 마이크를 조절하며 의원들과 기자들을 둘러봤다.
탐욕스러운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 자기 뱃속만 채우면 끝이다.
그가 이번 선거에서 자기 사람을 원내대표로 출마시킨 것도 욕심 때문이다.
독재당을 만든 후 여론 몰이를 통해 대권에 도전하려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한당은 체질 개선을 위해 전당적 총력체제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계파 갈등을 끝내고 하나 된 마음으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합니다. 오늘 원내대표 선거는......”
허례허식으로 가득한 말이 이어졌다.
성윤은 귓등으로 흘리며 사람들을 살폈다.
‘한 백 명 왔나?’
중요한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전부가 참석하지 않았다.
함께 봉사를 했던 박무혁 의원도 보이지 않는다.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원내대표 선거에 관심 없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렇게 주변을 확인하던 성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서 멎었다.
전략기획위원장 김대성 의원이다.
그는 백형욱을 찍어 죽이며 철저한 배신자로 찍힌 사람.
특히 백형욱 의원의 지지자들에게는 원수다.
그래서 김대성 의원에게는 그 누구보다 이 선거가 중요하다.
주진만 의원이 승리하면 배신자에서 당의 비리를 씻어낸 킹메이커로 포장될 수 있다.
하지만 패배하면 쓰레기.
김대성 의원의 뻣뻣한 얼굴은 초조함이 가득하다.
속마음은......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진짜 간절하다.
하나님, 부처님 다 찾고 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순서에 따라 먼저 주진만 의원이 정견발표를 하겠습니다.”
주진만 의원이 연단으로 올랐다.
술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마이크를 쥐는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보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긴장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한당 여러분......”
‘툭.’
누군가가 성윤의 어깨를 쳤다.
고개를 틀어보니 긴장으로 일그러져 있던 전략기획위원장 김대성 의원이다.
그가 손으로 밖을 가리킨다.
“얘기 좀 하지.”
주진만 의원의 정견발표를 뒤로하고 복도로 나갔다.
김대성 의원이 넥타이를 거칠게 푼다.
그리고 참고 있던 깊은 숨을 푸우욱 내쉰다.
그의 속마음은 뒤집어지는 중이다.
-미치겠네. 지면 어떻게 하지?
성윤이 복도에 놓인 티테이블을 보며 말했다.
“커피 한잔 뽑아드릴까요?”
긴장이 심할 때 단 것은 도움이 된다.
김대성 의원이 고개를 끄덕.
“어, 냉으로 부탁할게.”
성윤이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내밀었다.
김대성 의원이 커피를 받아들며 물끄러미 성윤을 본다.
이번 선거, 자신뿐만 아니라 성윤의 미래에도 중요한 순간이었다.
주진만 의원이 당선되면 원내지도부에 꽤 큰 뒷배를 갖게 되니까.
하지만 패배하면 처음부터 시작이다.
생길 뻔 했던 뒷배가 사라지고 공천을 받기 위해 박박 기어야 한다.
그런데, 성윤은 지나칠 정도로 여유롭다.
김대성 의원이 묻는다.
“괜찮아?”
“어떤 게요?”
“선거 결과, 만약에 우리가 패배하면......”
“이길 거예요.”
“허허.”
김대성 의원이 헛웃음을 지었다.
모두가 박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태연히 이길 거라고 자신하다니......
대범한 것인지 둔감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성윤이 행사장으로 고개를 틀며 말했다.
“스물네 표 차이로 주진만 의원님이 이길 거예요.”
“스물네 표?”
“네.”
“허허허, 내 긴장을 풀어 주려고 한 것은 알겠는데, 그건 너무 나갔어. 다른 사람들은 네다섯 표 차를 말하는데......”
성윤은 다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스물네 표요.”
성윤의 얼굴을 빤히 보던 김대성 의원이 가소롭다는 듯 픽 웃는다.
“이성윤 의원 말대로 되면 뭐든지 해준다. 진짜.”
성윤은 의원들의 속마음을 듣고 판단한 결과다.
그런데, 김대성 의원은 안 믿고 있다.
뭐, 아슬아슬한 승부라는 전망이 우세하니까.
성윤이 시선을 돌려 김대성 의원을 향했다.
“뭐든지요?”
“그래!”
< 비일비재. -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