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 주고 약 주고. - (2) >
전략기획위원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을 내달라니......
이유를 알고 싶지만 생글생글 웃는 성윤의 얼굴에서는 어떤 의도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내 사무실로 가지.”
이곳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햇병아리 같은 초선 의원에게 절절매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전략기획위원장의 이름은 김대성.
늘어진 볼 살이 꼭 불독같이 생긴 남자다.
그가 몸을 돌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성윤은 그 뒤를 조용히 따를 뿐이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국회를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복도를 쓸고 닦고.
성윤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아주머니는 성윤의 인사가 자신에게 향한 것인지 모른다.
그저 똑같이 복도를 쓸고 있을 뿐이다.
성윤이 다시 인사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그제야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어 성윤을 본다.
“아...네. 안녕하세요.”
전략기획위원장 김대성 의원은 청소부에게까지 인사하는 성윤이 같잖아 보였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큰 일 하는 사람이 함부로 고개 숙이는 거 아니야.”
“똑같은 국민이에요. 국민에게 인사도 못하면서 큰 일을 입에 담는 것은 아니죠.”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성윤을 보며 김대성 의원이 입술을 꽉 깨문다.
그리고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의사당 내 김대성 의원의 사무실이다.
김대성 의원의 보좌관이 테이블에 찻잔을 놓고 방을 떠났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대화는 없다.
딱히 안부를 물을 만큼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김대성 의원에게 성윤은 불편함 그 자체였으니까.
사무실은 적막 그 자체다.
김대성 의원은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들고 홀짝 거리며 성윤의 눈치를 살폈다.
성윤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김대성 의원의 속마음을 듣는 중이다.
지금 그의 마음은......
-새끼, 무게 잡고 있네.
이제 그의 마음을 뒤흔들 시간이다.
성윤이 찻잔을 탁 내려놓음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음...확실히 하고 싶어서 왔어요. 의원님은 백형욱 의원님을 왜 배신하려 한 거죠?”
김대성 의원의 눈빛이 일그러진다.
“그때 화장실에서 다 말했잖아! 백 의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고 얼마나 더 솔직히 말해야 해!”
“권력욕?”
“배지 달고 일하면서 없다고 말하면 그게 가식이지.”
“단지 그뿐?”
“그래!”
김대성 의원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그가 큰 소리로 말하며 센 척하는 이유는 약점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질질 끌려 다닐 인생, 조금이라도 센 척해야 숨 쉴 구멍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성윤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김대성 의원이 백형욱 의원의 여자 문제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눈치다.
알고 있었다면 사채업자를 끌어들이는 치졸한 방식 대신 정면으로 칼을 들이 댔을 놈이니까.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했다.
“...의원님, 제가 어디서 못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어떤 거?”
“백 의원님이요. 여자 문제가 심각하다고......”
“씨발, 이 바닥에서 아랫도리 깨끗한 놈 있으면 그게 고자......”
김대성 의원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
“못된 이야기를 들었다고? 여자 문제?”
“네.”
짚이는 부분이 있나 보다.
눈동자가 위로 솟구쳤다가 떨어진다.
성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속마음에 집중했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래도 설마.......
생각을 이어가는 김대성 의원의 표정은 어둠이 다가오는 것처럼 어스름해진다.
-아닐 거야.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는......
‘하, 씨발, 미성년자?’
생각해보면 그 정도 스캔들이 아니고서는 은퇴할 리가 없다.
아들과도 나누지 않는다는 권력을 포기하는 일이었으니까.
‘이런 개새끼.’
백형욱 의원이 훌륭한 정치인이었다고 생각했던 머릿속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애써 참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꿈속에서는 스캔들이 터지기 전에 은퇴했었지? 그 뒤로 가끔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면서 고고하게 살아갔고.’
이제 백형욱 의원에게 그런 달콤한 미래는 없다.
산산이 조각내어 추악한 가면을 벗겨줄 테니까.
사람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
그게 선출된 국회의원이라면 더욱 엄격한 잣대로 심판 받아야 하고.
문제는 법이라는 게 서민에겐 엄격하지만 권력자에게는 참 관대하다는 거다.
성윤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형욱 의원님의 문제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요.”
“그 문제가 뭔데? 여자 문제는 흔한 거라니까.”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있다.
정치인의 스킬이다.
“아시잖아요? 제 입으로 거론하기는 좀 더러워서요.”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성윤의 표정.
김대성 의원의 눈썹이 꿈틀 댔다.
그리고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입을 뗀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성윤은 당장 대답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툭툭 움직이고만 있다.
‘백형욱 의원의 문제.’
그를 박살내기 위한 판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벌을 주면서도 이득이 될 길을 생각해야 한다.
이득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 총선은 이제 약 10개월 정도 남았다.
그런데, 다음 공천을 받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지금 서안시 동구는 대한당의 노른자 같은 존재여서다.
처음 성윤이 서안시 동구 재보궐 선거에 나갈 때 당선될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박대철이 있는 힘껏 똥을 싸질러 놓은 자리였고 상대가 5선을 해 먹은 거물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떡하니 당선됐다.
어떤 업적도 없는 젊은 놈이......
그래서 서안시 동구는 대한당 깃발만 들면 당선되는 곳이라 여겨지고 있다.
배지를 달고 싶은 놈들이 개나 소나 몰려들 게 뻔하니 경선부터 치열할 것이 예상된다.
그래서 이번 백형욱 의원의 문제가 중요하다.
어떤 이득을 얻느냐에 따라 당내 입지가 확고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움직일 수는 없다.
성윤은 아직 정치적 기반이 없기에 어디까지나 뒤에서 움직여야 했다.
햇병아리 같은 놈이 백형욱을 짓밟는 꼴을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
특히 백형욱 의원의 지지자들.
그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도 달려들 거다.
테러를 당할 수도 있고.
성윤은 힐끗 김대성 의원을 살폈다.
김대성 의원은 권력욕이 충만하다.
잘만 활용하면 팔을 걷어붙이고 움직일 거다.
성윤이 입을 열었다.
“저 같은 놈도 백형욱 의원님의 문제를 알고 있어요. 그렇다는 것은 국회에서 침 좀 뱉는다는 기자들은 다 알고 있을 거라는 거죠. 지금은 쉬쉬하는 중이지만 곧 불거져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전 백형욱 의원님을 존경하지만 그보다 당의 앞날이 더 걱정됩니다.”
김대성 의원의 눈에 의구심이 잔뜩 들었다.
그런데 그 눈빛은 조금 전과는 다르다.
성윤을 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함께 할 아군으로 보고 있다.
정계에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고 하지만 김대성 의원의 태세 변화는 참 빠른 것 같다.
그가 웃으며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폭로하자고? 좋아. 그런데,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시간이 걸린다고요?”
“저격이라는 게 총알만 준비한다고 쏠 수 있는 게 아니야. 전쟁에서 갑자기 장군이 죽어봐, 밑에 병졸들이 우왕좌왕하겠지? 그러다 보면 와해되고 전멸당하는 거야. 그 전에 계파 사람들을 설득해야지. 백형욱 의원을 저격하는 명분이 있어야 하거든.”
빌어먹을 명분.
그놈의 명분 때문에 백성과 국민은 고생했다.
그런데 그 명분을 위해 시간을 기다리라니.
중요한 것은 백형욱 의원의 스캔들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거다.
꿈속을 기억하면 사채업자 사건이 터진 이후 백형욱 의원은 곧바로 은퇴했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오늘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잖아?’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빨리 폭로해야 한다고 징징되면 신 내림 받았냐며 병신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다.
그렇다고 갑자기 스캔들이 터지거나 또는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은 백형욱 의원이 조용히 은퇴하면 닭 쫓던 개가 될 수도 있다.
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 라고 외쳤다는 누군가의 답답한 마음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김대성 의원의 사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으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점집 매니아 주진만 의원에게 거는 전화다.
백형욱 의원의 여자 문제를 어디서 들었는지 물어야 했다.
그래야 진원지를 알아내 입을 막을 수 있으니까.
벨 소리가 들린다.
곧 ‘전화를 받지 않아......’.
성윤은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역시 한참이나 벨이 이어졌지만 받지 않는다.
‘아직도 자는 거야?’
오후 세 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지만 주진만 의원은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이다.
계속 통화 버튼을 눌러도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소리샘 목소리를 들으며 성윤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주진만 의원이 깨어나면 열통도 넘게 온 부재 중 통화를 보고 전화할 거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답답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느새 차에 다가온 성윤이 조수석 문을 열고 앉았다.
서류를 넘기고 있던 정우가 시동을 걸며 입을 연다.
“지역구에서 민원 들어왔어요. 아파트 앞에 실외 골프 연습장 들어오는 것 막아 달래요. 그리고......”
민원은 참 가양각색으로 들어온다.
특히 많이 들어오는 게 유치원 설립이나 체육 시설 같은 것.
해줄 수 없는 것도 있지만 가능하면 처리해주려 한다.
“하나씩 말해봐. 골프 연습장?”
“네, 골프장이 들어오면 딱딱 소리 나잖아요? 그게 싫은 것 같아요.”
“골프장이 들어오기에 법적으로 문제 있는 지역이야?”
“전혀.”
“그럼, 소음 기준 찾아서 보고해줘.”
“옙.”
다음 스케줄을 위해 이동할 때 성윤은 정우에게 백형욱 의원에 관한 일을 전했다.
정우의 눈빛이 심각해진다.
“그럼, 세 발 자전거 계획은 물거품이네요?”
성윤과 정우는 세 개 계파의 중심에 서려했다.
하지만 백형욱 의원이 무너지면 아무리 김대성 의원이 노력한다고 해도 걷잡기는 힘들 거다.
남은 세력은 두 개.
당대표와 주진만 의원이다.
정우가 중얼댄다.
“체급차이가 너무 큰데요? 초등학생하고 이종 격투기 선수가 붙는 것이나 마찬가지 같아요.”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성윤이 입을 열려고 할 때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주진만 의원인가 싶어서 꺼내 봤는데 한동일보 김미선 기자다.
“네, 기자님.”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더스트 매니지먼트 있잖아요?
“아, 네.”
-알아봤어요. 더러운 매니지먼트가 있다는 말은 풍문으로 들어봤지만 이놈들은 그 중에서도 더 악질이던데요?
더스트 엔터테인먼트, 일전에 성윤은 김미선 기자에게 한 번 알아봐 달라고 했다.
앞집 사는 가수 지망생이 계약하려는 곳인데 찝찝한 생각이 가시지를 않아서다.
“악질이라고요?”
성윤이 되묻자 김미선 기자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의원님만 알고 계세요. 백형욱 의원이 더스트랑 연관되어 있나 봐요. 우리 기자 하나가 그쪽을 파고 있는데......
< 병 주고 약 주고. -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