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 주고 약 주고. - (1) >
***
술자리가 끝난 것은 저녁 아홉시가 넘어서였다.
아홉 시간이나 이어진 술자리, 마지막 잔을 테이블에 놓았을 때 주진만 의원이 성윤에게 엄지손가락을 척 세웠다.
그리고 그는 혀 꼬인 목소리지만 조금은 측은하게......
“대한당 알콜중독자의 호칭을 넘기지.”
“네?”
“역시 젊은 놈은 못 이기겠어. 이렇게 내 세대가 가나 봐.”
정말 술로 이기고 싶었는지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후로 주진만 의원의 보좌관이 들어와 그를 부축해 호텔방을 잡아 들어갔다.
보좌관의 행동이 능숙한 것을 보니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다.
호텔 밖으로 나온 성윤은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정우야. 끝났어. 데리러 와.”
-한 삼십 분 걸려요. 흡연실에 계세요.
성윤은 자판기에서 차가운 콜라를 뽑은 후 흡연실로 이동했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자 알콜 때문에 머리가 핑핑 돈다.
하지만 그냥 있을 수는 없다.
오늘 들었던 말을 정리해야 한다.
‘백형욱 의원의 여자 문제......’
사실 이 바닥에서 여자 문제는 도로에 깔린 돌멩이만큼 흔하다.
여자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거론되는 일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들은 다른 문제는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물고 씹고 뜯지만 여자 문제만큼은 관대하다.
자신들 역시 더럽기는 마찬가지기 때문.
그래서 영웅호색 어쩌고저쩌고 낄낄대며 웃고 즐길 뿐이다.
그런데, 주진만 의원이 백형욱 의원의 일을 문제 삼았다.
그렇다는 것은 정치인의 관점에서도 한참 벗어났다는 것.
‘도대체 뭐지?’
성윤의 입에서 한숨 섞인 담배 연기가 흘러 나왔다.
꿈속을 통틀어서 성윤이 손에 꼽는 정치인 중 한 명이 백형욱이었다.
사채업자 때문에 어이없게 은퇴하기는 했지만 강직한 성품과 청렴한 사생활은 계속해서 칭송되었다.
그런데 여자 문제가 사실이라면......
‘다행이네.’
백형욱 의원이 말했던 중앙 청년 위원회 위원장, 술을 마신 상태였기에 보류했지만 잘 한 일인 것 같다.
자칫 물살에 휩쓸려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을 뻔 했으니까.
그건 그렇고.
“깨끗한 놈 하나 없네.”
“안 대통령은 깨끗할 걸요?”
언제 왔는지 정우가 성윤의 옆에 앉았다.
“안재열 대통령님?”
“네, 심각할 정도로 명예를 중요시 생각하는 분이잖아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정우가 담배를 꺼내 물며 묻는다.
“그런데 주 의원이 뭐래요?”
“자기 뽑으래.”
“그걸로 몇 시간을 내리 술 마신 거예요?”
“응.”
“그런데 안주는 뭐였어요?”
“삼선짬뽕만 기억 나. 다른 것은 다 처음 보는 거라.”
“아, 사선, 오선이 아니라 삼선 짬뽕. 재선이나 초선보다는 맛있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쓸데없는 말을 하는 정우다.
성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발 다른데 가서는 그런 개그 하지 마.”
“매력이죠. 흐흐.”
정우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다.
“들어가시죠.”
“그런데, 넌 어디 갔다 왔어?”
“글쎄요. 아직은 기획단계라 좀 더 구체화되면 말씀드릴게요.”
뭔가 꾸미는 것 같은데, 속마음을 들어봐도 ‘흐흐흐.’ 웃음만 흘리고 있다.
정우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며 성윤은 생각에 빠졌다.
꿈속에서 봤던 미래는 걷잡을 수 없이 비틀리고 있다.
성윤은 십년이나 빠르게 의원이 되었고 은퇴했어야 할 백형욱 의원이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역사의 물줄기는 크게 틀어져 새로운 미래로 향하고 있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나보다.
물줄기가 틀어졌어도 물은 물.
백형욱 의원은 은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백형욱 의원이 사라진다면......’
대한당의 한 축이 무너지는 거다.
어쩌면 주진만 의원이 말했던 당대표 1인 독재당이 될 수도 있다.
꿈에서는 당대표 역시 계파 갈등의 후유증으로 비리비리 했지만 지금은 그 미래가 바뀌었다.
그래서 독재당만큼은 막아야 한다.
민주주의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당 중 하나가 독재라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여기까지 생각하던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당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이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당이고 나발이고 어느 포지션에 서야 할지 고민해도 모자란 시간이다.
국회의원이라고 하지만 산들 바람에도 뿌리가 뽑혀 사라질 수 있는 임기 1년짜리 초선.
사람들이 짓밟고 지나가도 모를 들풀이나 마찬가지인 무명이다.
지금은 생존만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이 판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
고심 끝에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
다음 날, 국회의사당 내에 있는 대한당 회의실.
며칠 후에 있을 정기 국회를 앞두고 의원들이 모여 앉았다.
상석에 앉은 원내대표 대행을 맡은 원내수석부대표가 ‘큼큼’ 헛기침을 한다.
회의는 오후 1시 시작이었는데 30분이 지나도 절반 이상이 비어 있어서다.
그래도 오십 여 명의 의원들이 자리했다.
그곳엔 성윤도 있었다.
하지만 주진만 의원은 아직 호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시작할까요? 보자......”
원내대표 대행이 서류를 휙휙 넘겨본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알아서들 찬반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국회가 열리기 전 토론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 없다.
어차피 대행이다.
새로운 원내대표가 뽑히면 내려 갈 자리, 고민해서 회의를 이끌어 갈 이유는 없었다.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다시 한 번 원내대표 대행이 말했다.
조용한 가운데 사무총장이 가볍게 입을 연다.
“원내대표 선거로 다들 바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 분이 원내대표가 되어도 잘 해주실 거라 믿어요.”
성윤은 사무총장이 무슨 말을 하려고 뜸을 드리나 집중했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원내대표 선거가 끝나면 우리는 곧바로 총선 준비에 들어가야 해요. 그래서 총선의 홍보 수단으로 원내대표 선거를 활용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원내대표 선거가 국민의 관심을 받고 그 기세를 이어가면 꽤 훌륭한 홍보 수단이 될 수 있다.
의원들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무총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보통 원내대표 선거의 공약에 내세우는 것이 ‘어떤 법안을 통과 시키는 것에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 이런 것이잖아요? 이번엔 국민의 관심을 모아야 하니까 공약 중 하나는 민생을 위한 것이 어떨까요?”
한 의원이 손을 들었다.
“요즘 취업하기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일자리 늘리기 법안을 공통으로 내세우는 것이 어떨까요?”
사무총장의 시선이 그 의원에게 향했다.
“일자리?”
“일자리를 오십만 개쯤 만드는 법안을 추진한다고 하는 거죠.”
다른 의원이 입을 열었다.
“이왕 할 거면 오십만 개는 적지 않나? 백만은 가야 그럴듯하지.”
“에헤이, 요즘 사람들 눈치가 빠삭한데 백만을 누가 믿어? 칠십만 정도로 합시다!”
“잠깐만 이건 어떨까요? 단순히 숫자만 말하면 안 믿잖아요. 그러니까 요즘에 핫한 에너지, 환경 그리고 4차 산업에서 신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중소기업을 육성해서 일자리를 만든다고 하는 거죠.”
국민을 위한 대화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닌데 달콤한 공약을 만들어 국민을 속일 고민만하고 있다.
게다가 4차 산업이라니, 자기가 말하고도 뭔지 모를 거다.
이들의 말은 국회의원이라는 것을 믿지 못할 정도로 병신 같고 한심했으며 씁쓸했다.
이들의 목적은 며칠 전 봤던 시의원처럼 당선뿐이다.
위나 아래나 똑같다.
성윤의 시선이 사무총장에게 향했다.
이름은 박무혁, 화두를 던져 놓고 그 자리에서 쏙 빠진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턱을 괸 채 느긋하니 갑론을박 싸우는 의원들을 보는 그의 눈빛은 참 묘하다.
한심하게 보면서도 즐기고 있다.
생각을 읽어 보려 했지만 어떤 생각도 없다.
무심하다.
그는 재벌가 출신으로 대정 전자의 최대 주주이기도 하다.
선거 때 상대 후보가 ‘핫도그는 먹어 봤습니까!’라는 질문에 ‘미국에서 먹어봤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실제 우리나라 핫도그를 보여줬는데 처음 보는 음식을 보는 눈빛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꿈속에서 그는 약 3년 후 당권을 쥐게 된다.
그리고 대통령의 자리까지 노리지만 민국당의 대선 후보가 너무 세서 큰 표로 패배했다.
성윤은 툭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생각에 빠졌다.
백형욱 의원이 사라지면 대한당은 당대표의 독재당이 될 가능성이 크다.
주진만 의원이 권력을 노리고 있지만 그는 너무 비주류.
하지만 박무혁 사무총장이 움직인다면?
그때, 성윤의 눈길을 느꼈는지 박무혁 사무총장이 고개를 돌리며 눈이 마주쳤다.
“새로운 의원인데, 이름이......”
“서안시 동구 이성윤이라고 합니다.”
“미안, 내가 사람 이름을 잘 기억 못해서. 이성윤 의원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젊은 것 같은데, 의견 있으면 말해 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성윤에게 향했다.
‘너 따위가 뭘 말할 수 있겠어.’라는 눈빛,
하지만 박무혁 의원의 눈빛은 다르다.
여전히 묘한 눈빛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한심하게 보면서도 즐기는 듯한......
“제 생각에는 원내대표 선거를 요란하게 알려봤자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이유는?”
“전임 원내대표가 좋지 않게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당의 쇄신을 알려야 할 자리에 대선에 가까운 공약을 내세우는 것은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민국당에서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요.”
꿈속에서 봤던 미래, 원내대표 선거에서 대한당은 똑같은 짓을 한다.
말도 안 되는 공약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 하는 짓.
반응은 싸늘했고 오히려 지지자들에게도 욕을 처먹었다.
“성급하게 만든 공약으로 관심이나 끌려 하면 관심종자로 취급될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조용히 당의 쇄신을 보여주는 게 민심을 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종자?”
“아,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그런데, 지금 이성윤 의원은 원내대표 선거의 기세를 총선까지 끌어가자는 내 의견에 반박하는 거지?”
성윤은 가만히 박무혁 사무총장의 눈빛을 살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재밌네.
젠장, 쓸데없는 소리다.
게다가 목소리의 톤마저 높낮이가 없으니 비웃는 것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은......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도 들어보니까 그렇게 생각해.”
박무혁 사무총장은 성윤을 희미한 미소와 함께 바라본다.
그러다가 다시 전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성윤 의원의 의견도 타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무혁 사무총장의 눈치를 보는 의원들은......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흐흐.”
비굴하게 웃을 뿐이다.
회의가 끝나고 성윤은 가장 먼저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나오는 의원들에게 일일이 인사한다.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 사람은 백형욱 의원의 오른 팔이면서 뒤통수를 갈기려 했던 전략기획위원장.
막 그가 밖으로 나왔다.
성윤은 그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어? 어......”
전략기획위원장은 호랑이 앞의 토끼 같은 표정이다.
다른 의원들이 있어서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데 워낙 당황했는지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다.
성윤이 빙긋이 웃었다.
“제가 의원직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 병 주고 약 주고. -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