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했던 거야? -(2) >
“더스트 엔터테인먼트? 혹시 연예인 기획사인가요?”
“네.”
김미선 기자가 고개를 저었다.
“연예계 쪽은 잘 몰라요. 그래도 동료 기자들이 있으니까 알아봐 드릴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제 가수 지망생 전소희를 만난 후 알 수 없는 찝찝함이 계속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성윤은 연예인의 얼굴을 잘 모른다.
탑이라 불리는 연예인도 거의 모를 정도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희미하지만 기억에 남아 있다.
뉴스만 보는 사람이 연예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대마, 폭력, 죽음 등에 관련된 일이다.
그중에서도 성윤이 의심하는 부분은 스폰.
몇몇 의원들의 이름이 머릿속에 스쳐간다.
“그럼, 인터뷰를 시작해도 될까요?”
“그러죠.”
성윤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상당히 사근사근했다.
이유는 어젯밤에 일어난 백형욱 의원의 스캔들 때문이다.
정우는 사채업자를 잡은 후 곧바로 그녀에게 연락했고 그녀는 다른 기자보다 한 걸음 빨리 기사를 올릴 수 있었다.
그 일에 대한 호의.
정치인과 기자의 공생 관계가 시작되는 거다.
그녀는 당 출입 기자다. 웬만한 사람보다 대한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다.
성윤이 적절히 소스만 넘긴다면 큰 도움을 줄 사람이다.
인터뷰는 예상했던 대로 날선 질문도 없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순조롭게 흘렀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친 그녀가 녹음기를 종료하며 묻는다.
“하나만 더 여쭤 봐도 될까요? 오프더레코드로.”
오프더레코드, 지금부터 이어질 대화는 어디에서도 공개하지 않겠다는 뜻.
언론인으로 긍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만큼은 신념처럼 지킨다.
물론 세상에는 기자라는 이름의 기레기가 절반이었지만 적어도 김미선 기자는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니었다.
“좋아요.”
성윤의 대답에 그녀의 눈빛이 천천히 변한다.
날선 기자의 눈빛이다.
“윤채아 의원을 싫어하나요?”
무슨 말을 하려고 인상을 쓰나 했더니......
성윤은 픽 웃었다.
당연히 싫어하지.
윤채아는 꿈속에서 아내가 죽었던 이유이며 현실에서도 사사건건 방해를 준비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이런 질문을 하는 김미선 기자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녀의 속마음을 들어봤다.
-난 싫어. 그년을 죽여 버릴 거야.
의도는 들리지 않고 갖은 저주가 들려온다.
그래서 성윤은 일단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줬다.
“좋아하지는 않죠.”
자신의 생각과 동일했는지 김미선 기자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리고 조금 더 굳은 표정을 짓더니 커피 잔을 들며 입을 연다.
“얼마 전에 민국당이 대한당의 원내대표를 날려 버렸잖아요?”
“네? 아, 네.”
“윤채아가 이성윤 의원님을 의심하고 있어요. 민국당에 비리를 넘긴 게 이성윤 의원님이라고......”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성윤이 넘긴 게 맞다.
윤채아의 자동차를 털어 원내대표의 비리를 찾았고 그것을 안재열 전 대통령에게 넘겼으니까.
그게 국회에서 빵! 터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 그거 사실이에요. 제가 했어요!’라고 말하면 병신이지.
“하하, 그때 전 수행 비서였는데요? 박대철 의원을 쫓아다니느라 잠 잘 시간도 부족했어요.”
“그러니까요.”
김미선 기자가 입에 댔던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두며 조용히 말을 잇는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법은 팩트를 가진 쪽이 승리하지만 정치는 선동을 성공한 쪽이 승리하니까요.”
“조언, 감사합니다.”
잠시 후, 김미선 기자가 떠났다.
성윤은 팔짱을 끼고 창가에 섰다.
‘윤채아가?’
김미선 기자는 윤채아가 단순히 뒷말을 하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윤채아의 의심은 가능하다.
원내대표의 비밀을 성윤이 손에 쥐었던 것은 그녀의 운전기사가 트렁크를 맡기고 떠났기 때문이니까.
‘그래서 김미선 기자와 처음 인터뷰를 할 때 나를 짓눌러 달라고 부탁한 건가?’
친한 기자를 이용해 치졸한 짓을 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제야 그 답을 알겠다.
성윤의 입술이 꽉 닫혔다.
‘서둘러야겠어.’
예로부터 길을 막는 돌덩이는 치우고 가라 했다.
성윤은 그 돌덩이를 다시는 기어오를 수 없는 낭떠러지에 던져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이이잉.
테이블에 올려뒀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세비가 입금되었다는 메시지다.
정우가 싱글벙글 웃는다.
매서운 눈으로 웃는 게 아니라 진짜 좋아서 웃는 것.
돈은 정우도 웃게 만든다.
“의원님, 오늘 삼겹살 아니면 치킨?”
“어제 먹었잖아.”
“월급날은 원래 먹는 거예요.”
“저축이나 해둬. 쓸 일이 있을 테니까.”
“어...설마 악덕고용주가 월급까지 빼앗아 가려는 것은 아니죠?”
정우의 쉰 소리를 들으며 성윤은 휴대폰을 들어 목공 동호회 카페에 접속했다.
정모는 물론이고 투자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벤처 사업가도 소식이 없다.
아니, 카페 회원들의 활동이 점차 적어지는 느낌이다.
‘직접 찾아가야 하나?’
그때,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박 노인과 이덕근 사장이다.
성윤이 활짝 웃으며 허리를 굽히자 이덕근 사장이 혀를 끌끌 찬다.
“안녕하세요?”
“이놈아, 사무실 차려 놨으면 초대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서요.”
“됐어, 이놈아.”
이덕근 사장과 달리 박 노인은 흐뭇한 미소로 사무실을 구경한다.
“잘 꾸며놨어. 사내 놈 둘이 있기에는 딱 좋아.”
정우는 박 노인과 이덕근 사장이 누군지 모른다.
그래서 일단 가만히 서 있는데 성질 급한 이덕근 사장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이 의원, 이놈 잘라. 인상 더럽고 뻣뻣한 놈을 데리고 있어서 뭐해?”
두 노인은 소파에 앉았고 정우는 삐뚜름한 눈빛으로 성윤을 바라봤다.
누구냐고 묻는 거다.
하지만 성윤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지 않는다.
정우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지역 당원들과 대의원들 그리고 국회의원 및 시의원 등의 얼굴은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두 노인의 얼굴은 분명 초면이다.
아무리 어른들이라 해도 난데없이 들어와 이놈 저놈 하면 기분이 나쁜 법.
거기다 계속되는 지시.
“커피나 한 잔 가지고 와 봐.”
정우가 몸을 틀어 두 노인을 향했다.
“이성윤 의원의 보좌관 박정우라고 합니다. 누구신지 존함을 알고 싶습니다.”
“커피 타오라니까 존함은 무슨...... 후원자다 이놈아!”
“후원자요?”
이덕근 사장이 빙긋이 웃으며 품에서 하얀 종이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탁 올렸다.
그러자 박 노인도 똑같이 봉투를 올리며 말한다.
“법으로 오백만 원까지 후원할 수 있다고?”
후원금은 선거가 없는 기간에는 한 명에게 최대 오백만 원을 받을 수 있으며 총 1억 5천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지금 받는 돈은 합법이다.
어쨌든 박 노인의 말을 들어보면 봉투 당 오백만 원이 들어있다는 뜻.
그러니까 봉투 두 개면 천만 원.
정치인들이 후원금을 채우기 위해 목숨 거는 걸 보면 단 번에 천만 원이 들어온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정우가 다급히 허리를 굽혔다.
돈은 정우도 인사하게 만든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아래 커피 전문점 가서 제일 맛있는 것으로 타오겠습니다.”
이덕근 사장이 웃는다.
“난 달달한 것을 좋아해.”
“옙!”
정우가 사무실을 벗어나자 박 노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한다.
“이 의원, 우리는 자네가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길을 걷다 보면 오물도 묻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정신은 지금과 같았으면 좋겠어.”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이덕근 사장이 입을 열었다.
“안 대통령님은 뵙고 왔나?”
“아뇨, 전화만 드렸습니다. 지금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곳이 많아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으니까 조만간 찾아 뵐 수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정치인이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됐을 경우 가장 힘든 점 중 하나가 빚이다.
빚이 단지 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자리에 앉기까지 도와준 사람과 고생한 사람을 챙겨야 한다.
그래서 많은 정치인들은 인사 청탁 및 여러 방면을 통해 도와준 사람들을 각 요직에 꽂는다.
나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르게 보면 도와준 사람을 팽개치는 순간 토사구팽이 되는 것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성윤은 다행이었다.
가장 크게 도와준 두 노인은 성윤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으니까.
아니, 잘 못 생각했다.
박 노인은 있는 것 같았다.
“이 의원, 여자 친구를 만들어 볼 생각은 있는 가?”
분명 박 노인은 딸이 있다고 들었다.
그는 자기 딸과 성윤을 어떻게 해 볼 생각인가 보다.
여자를 만날 생각도 없지만 박 노인과 연관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럽다.
딱 이 정도 사이가 좋다고 생각했다.
“아뇨, 없습니다.”
“참한 사람이 있는데 한 번 만나볼 생각 없어?”
“네!”
“에잉......”
이덕근 사장이 장난 가득한 표정으로 박 노인을 향한다.
“자네 딸은 결혼할 사람 있다고 했잖아?”
“우리 딸은 이미 식장 잡았고. 괜찮은 애가 있는데, 참......”
다행이 딸은 아니었나 보다.
그럼, 조금의 여지를 남겨둘 수는 있다.
“나중에 제가 자리 잡으면 좋은 사람으로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노인은 성윤과 몇 마디 더 나누다가 바쁜 사람 잡고 뭐하는 짓이냐며 엉덩이를 땠다.
정우가 막 커피를 들고 들어왔을 때다.
이덕근 사장이 정우의 손에 들린 커피를 빼앗아 들며 슬쩍 웃는다.
“나중에 또 봐.”
“들어가십시오.”
두 노인이 떠났다.
정우는 소파에 앉아 돈 봉투를 손에 든다.
“의원님, 천만 원이에요.”
“응.”
“첫 후원금으로 천만 원이 들어오다니, 이거 꽤 괜찮은데요?”
성윤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빠졌다.
‘천만 원, 내가 받은 세비, 모아둔 돈, 이것저것 최대한 긁어모으면.......’
사천만 원이 조금 넘는다.
성윤이 팔짱을 풀며 정우에게 말했다.
“가자.”
“어딜 가요?”
“청년 창업에 투자하러.”
“네?”
정치는 사람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모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다 함께 모여 먹는 밥값만 해도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밥값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속해서 돈, 돈, 돈!
그래서 어떤 정치인들은 정치자금을 손에 얻기 위해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성윤은 적어도 불법은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험난한 길을 걸으려 한다.
***
아파트형 공장의 지하 층.
이곳은 각 회사의 창고로 이용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중 한 문에 ‘아이가드 워치’라는 종이가 붙어 있다.
그 안에 한 남녀가 앉아 있었다.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 그런데 남자는 고개를 처박고 머리를 쥐어뜯는다.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어제 만나러 간다며?”
“씨발, 비서한테 까였어.”
남자는 어제 한 기업의 사장에게 투자 받으러 갔었다.
하지만 사장은커녕 비서의 앞에서 모욕만 잔뜩 받고 쫓겨났다.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투자를 받고 싶어 이곳저곳을 다녔지만 그 어떤 곳도 그들에게 돈을 내주는 곳은 없었다.
남자가 고개를 흔든다.
“씨발, 그만 둘까?”
안쓰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보던 여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라에서 벤처에 투자한다는데, 마지막으로 여기만 지원해 보자.”
“짜고 치는 고스톱인 거 몰라? 이미 선정은 됐어. 우리 같은 놈들은 경쟁률만 높여줄 뿐이야.”
“그래도......”
그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일어나 문을 연다.
“어?”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많이 보던 사람이 서 있다.
5선 의원 박광택을 잡고 국회의원이 된 사람.
이성윤이었다.
남자가 눈을 깜빡 거리며 이리저리 성윤의 얼굴을 살핀다.
그러다가 멍한 눈으로 물었다.
“맞아요?”
“네, 맞아요.”
“진짜요?”
“네.”
남자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자의 시선이 남자에게 향했다.
그가 문을 가리고 있어 성윤은 보이지 않는다.
“왜? 뭔데?”
남자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여자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관리소에서 관리비 독촉을 하러 왔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남자의 앞에 서서 성윤의 얼굴을 본 그녀는 똑같이 얼어붙었다.
“이, 이성윤?”
“반가워요.”
성윤은 빙긋이 웃으며 들고 온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식전이죠? 햄버거 사왔는데, 같이 드실래요?”
< 흔했던 거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