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 (3) >
***
밤 11시.
성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스 신전이 생각나는 인테리어가 보인다.
룸살롱이었다.
웨이터를 따라 간 곳에 당대표의 보좌관이 서 있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인다.
반면에 성윤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성윤이 국회의원이 되면 보좌관보다 윗 급에 서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직급일 뿐이다.
갓 임관한 소위가 주임 원사를 대하듯 경력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
성윤의 인사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당대표의 보좌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당대표가 앉아 있었다.
성윤이 자리에 앉자 그가 입을 연다.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당대표가 술병을 들어 성윤의 잔을 채웠다.
“먼저 자네에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말씀하십시오.”
“안재열 전 대통령과 무슨 관계지?”
“박대철 의원의 수행 비서를 할 때 우연히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쁘게 봐주신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질문이라 준비했던 애매한 답을 내뱉었다.
다행히 당대표는 더 묻지 않았다.
안재열 전 대통령과 시시콜콜한 인연을 묻고 있을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선거.
성윤이 당선되지 않으면 당대표의 자리도 위태위태하다.
그래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필요한 게 있나? 당 차원에서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돕도록 하지.”
성윤의 눈빛이 반짝였다.
‘뭐든지?’
당대표의 속마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이에나 같은 새끼들! 어떻게든 이 자리를 지켜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음은 없어!
간부들의 공격이 거칠었는지 당대표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똥줄이 타는 것 같았다.
‘뭐든지......’
성윤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사실 당대표의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이런 말이 나올 것은 예상했다.
이유 없이 만날 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도 높은 국회의원의 길거리 유세를 요청할까 생각했다.
선거가 시작됐지만 성윤의 캠프에 와서 길거리 유세를 돕는 것은 단 한 명, 화장실에서 욕설 동영상을 찍은 김희상 의원뿐이었다.
뭐, 김희상 의원도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고 정우의 손에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이지만.
어쨌든, 거물급 의원이 ‘이성윤 후보는 제가 보증합니다!’라고 한 마디 해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성윤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당대표의 생각을 들어보니까 더 큰 것을 요구해도 가능할 것 같아.’
그만큼 당대표는 초조하다.
눈에 힘을 주고 있지만 스치는 불안감을 숨기지는 못한다.
성윤은 그 모습을 보며 테이블 아래의 주먹을 꽉 쥐었다.
더 큰 요구를 했다가 괜히 국회의원 길거리 유세도 놓쳐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마음이 갈팡질팡한다.
당대표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더 이상의 마음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이 능력의 한계, 지금 생각하는 것만 알 수 있다는 것.
잠시 고민하던 성윤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선거란 스포츠가 아니다.
스포츠는 졌어도 잘 싸웠다며 박수를 받을 수 있지만 선거에서 2등한 후보는 박수 받지 못한다.
이곳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다.
그럼,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 한다.
“대표님.”
“말해.”
“동구 공단 지역 외곽에 놀고 있는 6500평의 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성종 쇼핑 본사가 들어왔으면 합니다.”
할 말은 했다.
이제 당대표의 반응을 기다리면 된다.
“성종 쇼핑?”
“네.”
성윤을 노려보는 당대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가 성윤을 짓누른다.
당대표가 재떨이를 집어 던져도 이상하지 않을 험악한 분위기.
당대표의 입에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당황한 목소리가 흘렀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기는, 꿈에서 봤지.
당대표는 성종 그룹과 상당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주고받는 관계.
꿈속의 당대표는 계파 싸움이 끝난 후 곧바로 안재열 전 대통령을 공격하며 당권을 공고히 다졌다.
현실은 많이 어그러졌지만......
어쨌든 꿈속의 당대표는 다음 대선에 어깨 펴고 출마한다.
그때 서안시에 내세운 공약이 성종 쇼핑 본사 이전이었다.
땅값만 약 천 억, 사업비만 1조에 가까운 대규모 투자.
당연하지만 그런 공약이 갑자기 짠하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당대표는 지금보다도 몇 년 전부터 성종 그룹과 조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1조짜리 공약을 핏덩이 같은 놈이 나타나 낼름 먹으려 한다.
당대표는 황당하기도 하지만 어디서 흘러 나갔는지가 더 궁금했다.
“어디서 들었냐니까!”
“오다가다 들었습니다. 전 수행 비서였으니까요.”
국회의원을 잡으려면 운전사부터 잡으라는 말이 있다.
그림자처럼 따르며 사소한 전화통화까지 듣는 존재니까.
그들이 담배를 피우며 하는 헛소리만 모아도 대한민국은 뒤집어질 거다.
수행 비서였기에 어디에선가 들었을 수도 있다는 말에 당대표는 납득했나 보다.
고개를 끄덕, 끄덕.
문제는 지금부터다.
성종 쇼핑 본사 이전을 확답 받아야 한다.
당대표는 심각한 표정으로 손에 쥔 술잔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성윤은 그의 얼굴을 보며 속마음을 읽기 시작했다.
-젠장...... 내가 구석에 몰리다니.......
당대표는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을 이어가는 중이다.
성윤이 낙선했을 때 돌아올 비난과 책임부터 성윤이 당선 됐을 때 얻어질 당내 입지 그리고 다음에 있을 대선까지.
이럴 땐 결정에 도움을 줘야 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원수가 될 수도 있으니까.
성윤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낮에 당사에 갔을 때, 대표님과 저는 지금 한 배를 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배?”
“서안시를 잘 가꾸겠습니다. 나중에 큰 뜻을 펼치실 때 모두 대표님의 덕으로 넘기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당대표가 빙글빙글 돌리던 술잔을 ‘콱!’ 쥔다.
“큰 뜻을 펼칠 때 넘기겠다고? 내가 뭘 노리는지 알고 있다는 건가?”
대통령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안 다고 떠드는 것은 멍청이지.
대한민국은 나이에 엄격하다.
어린놈이 다 아는 것처럼 나대면 건방진 놈이 될 뿐이다.
그래서 최대한 예의 있게 입을 열었다.
“아뇨, 대표님의 목표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단지 높은 곳을 바라보실 분이라는 것만 예상할 뿐입니다.”
당대표는 입에 담배를 문다.
잿빛 연기가 룸을 채울 때 그가 연기와 함께 목소리를 내뱉는다.
“이게 얼마짜리 공약인지 알고 있나?”
“네.”
“성종 그룹을 등에 업고도 낙선한다면 모가지를 잘라야 할 거야.”
당대표는 술을 채운 술잔을 성윤의 앞에 놓았다.
성윤은 술을 마신 후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이기기나 해.”
잠시 후, 성윤이 룸을 벗어났다.
밖에서 대기하던 당대표의 보좌관이 복도로 나온 성윤을 물끄러미 본다.
“이야기는 잘되셨습니까?”
“아, 네.”
“다행입니다. 꼭 당선되셨으면 합니다.”
당대표의 보좌관과 가벼운 인사를 마친 후 성윤은 자리를 떠났다.
성윤이 멀어지는 것을 기다리던 보좌관이 손뼉을 짝 친다.
그러자 쫙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 세 명이 당대표가 있는 룸으로 줄줄이 들어간다.
그런데, 룸으로 들어갔던 여자들이 다시 줄줄이 나온다.
그러면서 보좌관을 보며......
“들어오라는데요?”
보좌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룸으로 들어갔다.
당대표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이성윤 저놈 어떻게 생각해?”
“예의바른 청년이었습니다.”
“모두 저놈이 박광택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난 아니야. 내 선물이 아니었다 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보좌관은 당대표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꾹 입을 닫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당대표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문다.
무척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연기를 뱉어내던 그가 다시 보좌관을 본다.
“이성윤 저놈 옆으로 사람 하나 붙여둬.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보고 할 수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보좌관은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당대표의 서늘한 눈빛이 성윤이 나간 문을 향한다.
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흐른다.
“일단 살아야지. 사는 게 우선이지.”
***
다음 날.
시간이 됐는데도 정우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는데 일곱 번이 되어서야 잠에서 갓 깬 목소리가 들린다.
-아, 형님.... 아니, 의원님.......
“어디야?”
-...저 조금 늦게 출근할 게요. 어제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술을 마신 것 같아요. 아니, 이건 마신 게 아니라 술독에 빠졌다가 헤엄쳐 나온 거네요. 지금 제 몸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알콜일 거예요.
어젯밤 정우는 박광택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만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술에 취했다는 놈이 말은 길게 한다.
“알았어. 천천히 나와.”
-죄송합니다.
성윤은 바로 캠프 봉사자들과 현장으로 떠났다.
민심에 가장 예민하다는 택시 기사들을 만났다.
그런데 이들은 성윤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역시 운전 밥 먹은 사람은 다르다며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도 찍는다.
그들의 고충을 듣고 민원을 확인하다보니 오후가 되었다.
캠프 봉사자들과 국밥집에 앉아 식사를 하려고 할 때, 그제야 정우가 나타났다.
한참이나 지각한 놈이 당당하게 맞은편에 앉더니 성윤의 앞에 놓인 해장국을 물끄러미 본다.
손도 대지 않은 새 해장국인데......
“먹어.”
성윤이 해장국을 들어 정우의 앞에 놓았다.
“감사합니다. 흐흐.”
정우는 곧장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마셨고 성윤은 국밥을 한 그릇 추가로 시켰다.
정우가 해장국을 먹으며 입을 연다.
“국물 진짜, 와.......”
“그냥 입 닥치고 먹어.”
“안 돼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식사 전에 들으시겠어요? 아니면 식후에 들으시겠어요?”
“한 시에 출근한 놈이 간 보냐?”
“출근은 열시에 했어요. 외근 중이라 후보님이 저를 못 봐서 그런 거고요.”
“외근?”
“네.”
“어디 다녀왔는데?”
정우의 숟가락질이 잠시 멎는다.
그가 성윤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광택의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우가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그 눈빛엔 살기마저 등등했다.
“야, 너 그런 말 할 때, 그렇게 웃지 마. 진짜 살인날까 무서워.”
정우가 숟가락을 놓고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성윤의 앞에 놓았다.
영상이 보인다.
박광택 후보가 백화점에서 갑질하는 모습.
백화점 점원이 무릎 꿇고 손 든 채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다.
성윤의 눈빛이 찌푸려진다.
‘이, 이게 왜 지금?’
꿈속을 기억하면 내년에나 터질 일이다.
지금 나올 일이 아니다.
성윤이 놀란 눈동자로 고개를 들어 정우를 보자 그가 살벌하게 씩 웃는다.
말 그대로 살인 미소.
“박광택, 언제 죽일까요?”
현재 성윤의 지지율은 처음 21,7%에서 약 5% 상승한 26.2%.
박광택의 지지율은 61.6%에서 7% 하락해서 54.5%.
그간 네거티브에 대한 대응을 전혀 하지 않았다.
기존 정치에 피로를 느낀 젊은 세대가 성윤을 지지하기 시작한 거다.
하지만 여전히 28.3%의 차이가 존재한다.
어마한 차이.
아마 이정도의 지지율을 뒤집은 역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윤과 정우의 눈빛은 달랐다.
5선 거물 박광택을 사냥감으로만 보고 있다.
성윤이 입을 연다.
“공개처형 가자.”
<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