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의원 이성윤-21화 (21/300)

< 예상과 다른. - (4) >

‘내 캠프에서 일한다고?’

그러고 보니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정계에 나가길 바라고 있었다.

판사 출신인 그는 국회의원의 힘이 얼마나 괴물 같은지 지켜봐왔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릴 때부터 당원 활동을 했었다.

물론 그녀는 정계에 관심이 없었고 아버지의 기분만 맞춰줬다.

그런데, 하필이면 성윤의 선거 캠프에 들어온다니......

당연하지만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녀와 함께 살면서 느꼈던 감정은 연민이었고 정이었지 사랑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꿈속의 그녀는 살해당했다.

누가 칼로 찌르고 죽인 직접적인 공격은 아니지만 윤채아의 정치적인 공격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 때문에 가뜩이나 병약했던 그녀의 몸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물론 꿈과 현실은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성윤의 꿈은 쓸데없이 정확했다.

게다가 예상하기로 현실은 꿈보다 더 할 것이다.

꿈보다 더 날 뛸 생각이니까.

그래서 어떤 여자든 뻔히 보이는 가시밭길을 함께 걷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성윤이 고개를 들어 당직자를 향했다.

“선거 캠프 운용을 이대로 따라야 하는 건가요?”

“아뇨, 후보님과 조율할 겁니다. 그런데,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나요? 말씀하시면 전해두겠습니다.”

“한국 대학교는 제가 졸업한 대학이라 뺐으면 좋겠는데요. 유학파가 수두룩한 세상에서 대학교 간판 흔드는 것은 좀 우습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후배들 이용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고요.”

“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얘기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한국 대학교는 배제했다.

그럼, 그녀가 나올 확률은 사라지는 거다.

‘좋아.’

성윤은 당직자에게 인사한 후 복도로 나섰다.

그런데, 화장실에 간다던 정우가 복도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뭐야, 왜 안 들어왔어.”

“아, 생각할 게 있어서요. 일은 다 보셨어요?”

성윤과 정우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정우가 조용히 입을 연다.

“여 기자 뒤를 쫓아봤거든요?”

“화장실 간 거 아니었어?”

“밖에 나가려는 핑계였죠.”

정우도 여 기자의 행동이 미심쩍었는지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녀의 뒤를 쫓은 거다.

“그래서 결과는?”

“주차장으로 안 가고 저쪽 휴게실에서 전화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숨어서 지켜봤는데......”

“지켜봤는데?”

“형님 이름이 몇 번 거론됐어요. 그런데, 인터뷰 문제 때문은 아닌 것 같았고요. 목소리가 상당히 기분 나쁘게 들렸는데, 거짓말 했냐, 어쨌냐 하면서......”

‘거짓말?’

성윤의 눈에 힘이 콱 들어갔다.

인터뷰를 하며 여 기자의 마음을 들었을 때, 그녀는 성윤이 금수저네 어쩌네 하며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이어가며 성윤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짐작했을 거다.

그 오해가 누군가의 뒷말 때문인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 예상이 확답으로 돌아오고 있다.

“누구랑 통화했는지 들었어?”

“거리가 멀어서요. 제가 아는 것은 딱 여기까지.”

성윤의 미간이 좁혀진다.

누가 자신을 공격하려 하는지 생각해 보는 거다.

그래서 이 놈 저 놈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렸다가 지워보는데, 너무 많다.

방금 화장실에서 김희상 의원 같은 놈을 만나기도 했으니까.

박대철 의원이 사라지며 빈집 털이를 하는 운전수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성윤은 머리를 북북 긁었다.

“에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중국집 어때?”

“자장면 드시게요? 어제도 중국집 갔었잖아요.”

“아니, 볶음밥. 복잡할 땐 볶음밥 먹는 거야.”

정우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성윤을 바라본다.

“왜? 중국집 싫어?”

“아뇨, 짜증날 땐 자장면이죠. 흐흐.”

복잡하고 짜증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시답잖은 농담을 한다.

물론 이런 농담은 둘만 있을 때 한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는데 타고 있던 사람이 꽤 많다.

그 중 가장 앞서 있던 사람이 성큼 걸어 나온다.

아주 잘 아는 백발의 남자, 그는 텔레비전만 틀었다 하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백형욱 의원.

대법관 출신인 그는 철인이라 불리며 대한당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명이다.

성윤과 정우가 허리를 굽혔다.

관심 없던 백형욱 의원의 시선이 그제야 두 사람에게 향한다.

“누구?”

“서안시 재보궐 선거에 나가게 된 이성윤이라고 합니다.”

“아.......”

느긋하게 답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흔한 인사치례로 덕담을 던진다.

“열심히 해요. 나중에 국회에서 봤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그는 성윤과 정우를 스쳐갔고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이 모두 내려 그 뒤를 쫓는다.

성윤과 정우의 시선도 백형욱 의원의 뒤를 쫓았다.

‘백형욱......’

지금은 승승장구해서 차기 대권주자, 준비된 대통령 등등의 말을 듣고 있지만 곧 엄청난 스캔들을 몰고 올 거다.

판사 출신이며 청렴함의 대명사라 불리는 그가 충격적이게도 사채업자와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게 세상에 드러나니까.

물론 나중에 ‘모든 게 오해였다.’ 라고 밝혀졌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이미지에 쫙쫙 금이 가 버렸고 진실 따위를 믿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 대한 불신이 커진 사회라는 게 한 몫을 톡톡히 한 거다.

그 덕에 경쟁력이 없어진 백형욱 의원은 당내 경선에서도 밀려 버리며 선거에 나가지도 못하고 정치 생명이 끝났다.

그 옆에 서서 손을 비비던 간신배들도 백형욱 의원의 권력이 사라지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전리품이나 챙기고 사라졌다.

꿈속의 일을 기억하며 성윤이 주목하는 단어는 단 하나였다.

‘오해......’

어떤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태풍이 휘몰아쳤다면 성윤은 집에 틀어 앉아 비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렸을 거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날아다니는 나뭇가지에 맞아 다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은 그 태풍의 시작이 만들어진 각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시나리오를 만든 감독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마 지금도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과정일 거다.

‘내가 이 판을 뒤집을 수 있을까?’

가능하다.

뒤집는 것은 물론 성윤에게 유리한 쪽으로 물고를 틀수도 있다.

성윤은 이 사건을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하며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검은 물속에 숨은 음모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도 하고 지금은 선거에 집중해야 할 때다.

“사람들의 가장 앞에 서서 걷는 게 꼭 피라미드의 정점 같네요.”

정우의 목소리, 생각을 끝낸 성윤이 고개를 틀어 그를 향했다.

“피라미드?”

“네, 제가 형님도 저렇게 만들어 줄게요.”

성윤이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됐어.”

“왜요? 못 믿으세요?”

“아니, 난 저 정도로 만족하고 싶지 않아. 더 대단했으면 좋겠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비웃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국회의원이 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대권주자라는 말을 듣는 것은 더더더더 어렵다.

그러니 아직 뱃지도 달지 못한 놈이 대권주자를 보며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정우는 웃지 않는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

성윤과 정우는 중국집으로 향해 볶음밥과 자장면을 각각 시켜 먹은 후 다시 정신없이 일을 이어갔다.

공식 선거 운동은 아니지만 사전에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저 새끼는 선거 때만 얼굴 비춰.’라는 말보다 ‘선거 전에도 계속 이래왔잖아?’라는 인식이 더 좋은 점수를 받기 때문이다.

물론 ‘제가 이번에 출마하니까요. 꼭 저를 뽑아주세요.’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선거법에 걸려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이번에 선거 나간다며?”

“하하하.”

멋쩍은 웃음으로 때울 뿐이다.

그렇게 일을 끝내도 집으로 올라가는 시간이 밤 10시.

오늘은 이른 퇴근이다.

허벅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보니 메시지가 들어와 있다.

어머니 : 요새 많이 바쁘지, 밥은 꼭 챙겨 먹어.

‘아......’

박대철 의원의 사건부터 지금까지 정신없이 일을 하는 바람에 전화를 드린 적이 없다.

물론 핑계다.

단 1분만 투자해도 잘 있다는 말을 전할 수 있고 10초만 투자해도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성윤은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북북 긁었다.

분명 꿈속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어느새 똑같은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

서둘러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네, 어머니.”

-괜찮아?

부모님도 텔레비전을 보신다.

박대철 의원이 룸살롱 중독자이며 사임했고 구속됐다는 소식은 잘 알고 계실 거다.

문제는 성윤이 취직한 곳이 박대철의 사무실이었다는 거다.

보좌진이란 국회의원이 나가리 되면 같은 운명을 타야 하는 지랄 맞은 직업.

어머니는 아들은 괜찮을지 차마 먼저 연락은 못하고 걱정만 하시다가 이제야 겨우겨우 전화를 하신 것 같다.

성윤은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괜찮아요.”

-그래? 밥은 먹었고?

항상 걱정하시는 그놈의 밥.

오늘도 몇 끼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정치인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게 밥 먹는 거니까.

“저기, 어머니?”

-말 해.

“저 선거 나가요. 그동안 일이 바쁘기도 하고 많기도 해서 전화를 못 드렸어요. 죄송해요.”

-이번엔 어떤 의원이야?

어머니는 아들이 다른 의원의 아래로 들어가 선거를 준비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게 수행비서 한다고 집을 나선지 고작 몇 달, 게다가 성윤의 나이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졸업 후 취업 준비로 골머리를 썩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니까 뭐......

“제가 나가요.”

-응?

“제가 서안시 동구 선거에 나가게 됐어요.”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조금 더 설명을 드렸더니 그제야 이해한 어머니는 오히려 걱정을 하신다.

아직 당선된 것은 아니지만 선거에 나간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줄 알았는데 부모 생각은 다른가 보다.

“자세한 것은 집에 들러서 말씀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성윤은 통화를 끊고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로 들어와 와이셔츠를 벗으며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에서 민국당의 서안시 후보가 발표되는 중이었다.

성윤은 단추를 풀며 화면에 집중한다.

-민국당은 재보궐 선거 서안시 동구의 후보로......

화면에 민국당 후보의 사진이 나온다.

동시에 성윤의 입가에 어이없다는 미소가 걸렸다.

‘미치겠네.’

서안시 동구는 전통적으로 대한당의 텃밭이다.

그래서 민국당은 박대철의 룸살롱 매니아 사건으로 민심이 등을 돌려 버린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어떻게든 서안시 동구에 민국당의 깃발을 꽂기 위해 이를 악 물고 달려 들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후보를 보니 이를 악무는 차원을 넘어섰다.

-5선을 했던 박광택 의원을 전략 공천했습니다.

총선이 1년 후다.

그래서 이번 재보궐 선거는 임기 1년.

‘이런 선거에 5선 의원이 나온다고? 미친 거 아냐?’

< 예상과 다른. -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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