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기 잡는 아저씨. - (2) >
때론 무섭게 때론 어이없다는 듯 몇 번씩 표정이 바뀌던 이덕근 사장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그가 뚝 웃음을 멈추며 외친다.
“야이 미친놈아!”
이덕근 사장은 쉴 새 없이 폭언을 내뱉었다.
세상이 우스워 보이냐, 작아 보이냐, 손만 대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냐......
그렇게 시작해서 운전이나 하는 놈이 민국당의 최고봉을 왜 만나려 하냐, 네놈에겐 당대표나 원내 대표도 하늘같은 존재니까 분수를 알아라. 등등등.
한참을 무시하더니.
“쓸데없이 야망만 커.”
이 말로 끝을 냈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입에 댄다.
그 표정이 나쁘지 않았는지 박 노인이 웃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자네는 이놈이 세상을 움켜 쥘 수도 있다는 건가?”
“멍청한 놈이니까 도전은 하겠지. 도전을 하면 확률이 1%라도 생기는 거고.”
성윤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덕근 사장이 술잔을 내려두며 말을 잇는다.
“야망만 큰 놈아, 내가 전 대통령을 오라 가라 할 급이 아니야. 그러니 노력은 해보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
성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에이, 죽기 전까지 등산이나 다니려고 했는데, 귀찮은 일이 생겼네.”
박 노인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난 정치는 잘 모르니까 술값을 내지.”
“술값은 야망만 큰놈이 내기로 했어.”
“그랬나?”
성윤이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안 나는데요.”
“미친놈, 국회의원 따라다니면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일단 한잔 따르겠습니다.”
술자리는 즐겁게 이어졌다.
그리고 이덕근 사장이 먼저 기사 딸린 차를 타고 돌아갔다.
이번엔 차에 오르던 박 노인이 성윤을 보며 묻는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있나?”
“네? 아뇨, 아직.”
“그래?”
그 말이 끝이었다.
박 노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성윤은 멀어져 가는 박 노인의 차를 물끄러미 본다.
‘지난번에는 결혼을 물어보더니 이번엔 여자 친구? 왜 물어보지? 생각 없는데......’
꿈속의 50여년, 결혼도 했었다.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만났던 여자.
그녀의 아버지는 대법관 출신의 법무부 장관이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현성 백화점 사장이었다.
뭐, 예상하듯 불같은 사랑 때문에 결혼 한 것은 아니고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얀 얼굴에 연한 가디건이 잘 어울리던 사람, 청순가련형 미인.
원해서 청순가련이 된 것은 아니고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병약했다.
그래서 항상 달고 사는 말이 있었다.
“미안해요.”
국회의원의 아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몸이 좋지 않아 내조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성윤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프다는 것도 계산에 넣었었고 사랑으로 이뤄진 결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녀가 건강하게 살아줬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아파서가 아니라 정치적 음모에 의해서.
아직도 신문에 그녀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던 게 생생히 기억난다.
꿈속의 기억을 떠올리던 성윤은 고개를 저었다.
‘내 인생에 여자는 없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아내, 비록 꿈이었지만 그 충격이 컸나보다.
이제 그런 삶은 싫었다.
***
며칠 후.
박대철 의원이 당사 건물로 들어가며 성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며칠 간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기에 뒷목을 주무르며 주차된 차로 향한다.
잠시 쉴 생각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계속해서 생각에 빠지고 있다.
‘안재열 대통령에게 뭘 가지고 가야 하지?’
정치계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기브 앤 테이크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하는 법.
이덕근 사장의 노력으로 안재열 전 대통령을 만난다고 해도 주고받는 게 없다면 단순 팬 미팅으로 끝날 뿐이다.
‘뭐가 있을까......’
꿈에서 봤던 미래를 기억하며 걷고 있는데 누군가 ‘툭’ 어깨를 친쳤다.
지하 주차장으로 나가는 복도는 좁다.
그래서 조심해야 하는데 생각에 빠진 탓에 앞을 신경 쓰지 못했다.
“아, 죄송합니다.”
보통 사과하면 끝난다.
그런데......
“똑바로 안 보고 다녀!”
협박 성 목소리가 들린다.
고작 어깨 한 번 부딪쳤다고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상당히 생소한 경험이었다.
성윤은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으니까.
그래서 고개를 틀어 누군가 얼굴을 봤다.
잘 빠진 정장과 거만한 표정.
기세만 보면 3선 의원의 보좌관이다.
그래서 의아했다.
‘이런 사람이 있었나?’
보좌관은 모시는 의원에 따라 힘이 다르다.
3선의 보좌관이면 웬만한 초선보다 강한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은 알고 있는데, 아무리 기억해도 이 남자는 처음 본다.
게다가 앳된 얼굴.
저 나이에 3선 의원을 보좌할 리 없다.
“누구?”
“하, 이 미친 새끼, 됐으니까 빨리 꺼져. 여기 중요한 분 지나갈 거니까.”
되게 세게 나온다.
그러니까 보좌관은 확실히 아니다.
보좌관이라면 자기가 모시는 의원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이렇게 깡패, 양아치처럼 나올 리는 없으니까.
그럼, 이 천둥벌거숭이는 낙하산, 그것도 권력자가 아니라 핫바지의 아래에 있다는 것.
계산은 끝났다.
“중요한 분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새끼, 새끼하면서 욕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뭐? 이 새끼야?”
“새끼, 새끼...... 내가 네 자식도 아닌데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턱 돌아가요. 이 양반아.”
이 바닥에서는 한 번 밀리면 계속 찌그러져 있어야 한다.
성윤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자 남자는 움찔했다.
그때......
“뭐하는 거죠?”
낮지만 느릿한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비례대표 윤채아다.
그녀는 여의도의 얼굴 마담, 국가대표 미녀 등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스텐포드를 졸업한 인재로 2년 전 스물일곱 어린 나이에 번호를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다.
차세대 정치인으로 많은 관심을 받지만 일각에서는 대한당을 홍보하기 위한 선전나팔수에 불과하다고 찍어 내린다.
정치적 성과 역시 아직 없다.
그게 지금까지의 결과.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꿈을 통해 미래를 아는 성윤은 윤채아의 벗겨진 가면을 알고 있다.
그녀는 예쁜 웃음 속에 독을 품고서 박쥐처럼 라인을 오가며 성공을 이어간다.
윤채아 때문에 여의도에서 새로운 어록이 탄생했는데 그게 바로 “웃는 새끼 조심해라.”였다.
아, 그 말은 성윤이 만들었다.
윤채아를 믿었다가 등을 찔렸고 그 때문에 아내도 사망했으니까.
물론 감옥까지 가는 레드카펫을 곧바로 깔아주며 바로 복수했다.
죄수복을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법정에 서던 그녀가 기억난다.
어쨌든 그녀는 친절한 사이코 패스이며 약자를 돕는 소시오 패스다.
그게 저 예쁜 얼굴 속에 숨은 본심이다.
조심해야 한다.
성윤은 다가오는 윤채아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무슨 일이죠?”
성윤과 시비가 붙은 남자가 절절맨다.
“그, 그러니까요. 지나가다가 이놈이 의원님이 가실 길을 막고 있어서요. 그래서........”
“박대철 의원님의 수행비서입니다. 이 분하고 실수로 어깨를 부딪쳤는데 시비를 거네요.”
횡설수설 말하기에 성윤은 박대철 의원의 이름을 강조하며 가볍게 정리해줬다.
지역구를 가진 박대철 의원과 비례 대표의 레벨은 차이가 있으니까.
윤채아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성윤이 듣기엔 거지같지만 다른 사람이 듣기엔 사근한 목소리로.
“죄송해요. 제 비서인데 아직 이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성윤의 옆을 스쳐갔다.
상큼한 향기가 맡아졌다.
그 냄새가 남자를 죽이는 메두사처럼 느껴진다.
‘조만간 또 보자. 다시 감옥에 보내 줄 게.’
그건 그렇고.
성윤은 자신의 옆에서 시비를 걸었던 남자를 슬쩍 봤다.
윤채아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갔는데 그게 상처였는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다.
“너도 운전 하냐?”
대답이 없다.
얼굴만 붉게 달아올라 있다.
성윤이 그의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며 입을 열었다.
“운전 하냐고.”
“수행비서세요?”
박대철 의원의 수행비서라는 말에 아차 싶었나 보다.
방금과 달리 상당히 저자세로 나오고 있다.
“응, 넌?”
“전 9급......”
국회의원은 자신의 보좌진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다.
보통 수행 비서는 7급을 주지만 단순 운전만 시킬 경우에는 9급이나 인턴을 주기도 한다.
성윤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이 바닥을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은데, 조심해라. 상대가 나였으니까 봐주는 거지 만약에 네가 보좌관들한테 시비 걸었어봐. 그럼, 네가 모시는 윤 의원님도 탈탈탈 털리는 거야. 이런 거 교육 못 받았어?”
“오늘 처음이라, 의원님 가시는 길에 젊은 남자들 치우라는 말만 들어서.......”
“왜? 젊은 남자들이 윤 의원님한테 달려 들까봐?”
“...네.”
“그래, 얼굴은 예쁘지.”
“그런데 몇 살이세요?”
“넌?”
“전 서른......”
남자는 성윤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얼버무리기로 했다.
“난 먹을 만큼 먹었어.”
“네?”
그때, 남자의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그가 주머니를 뒤지며 다급히 전화를 받는다.
“네, 의원님, 네, 알겠습니다. 바로 수보에게 가져가겠습니다.”
수보는 수석 보좌관을 말하는 거다.
지시를 받은 남자는 황급히 차로 달려갔고 성윤도 이제는 진짜 쉴 생각으로 자신의 차로 향했다.
그런데, 또 만났다.
윤채아의 차가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었다.
난처한 얼굴로 트렁크를 보며 머리를 북북 긁는 남자가 보인다.
“왜? 도와줘?”
“아, 아뇨.”
성윤이 그의 옆으로 섰다.
트렁크에는 갖가지 서류가 가득 정리되어 있다.
남자는 그 중에 어떤 서류를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어떤 거 찾아오래?”
“최근 5년간 교권 침해 현황을 찾아오라는데......”
성윤은 트렁크에 놓인 서류를 슥슥 훑기 시작했다.
‘이쪽은 정책, 이쪽은 상임위.......’
그리고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거.”
“아, 감사합니다.”
“항상 겸손하게 살아.”
“네.”
남자는 많이 급했나 보다.
성윤에게 트렁크 좀 닫아 달라는 말을 남기고 달려갔다.
성윤은 픽 웃으며 트렁크를 닫기 위해 손을 댔는데 외국에서 온 우편물이 보인다.
잘 정리된 서류를 보고 있으면 윤채아는 쓸데없는 서류를 가지고 다닐 성격이 아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온 우편이라니......
성윤은 손을 뻗어 우편물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서늘한 비수를 쥐는 느낌이다.
심상치 않다.
‘뭐지?’
성윤은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봉투를 열었다.
두툼한 서류 뭉치.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성윤의 눈빛이 빛난다.
이건 폭탄.
원내 대표를 날려 버릴 서류로 그의 딸 김보라의 의혹이 적혀 있다.
불법적으로 유학을 가서 돈을 펑펑 썼고 문란하게 지냈다는 내용.
‘윤채아가 저격수였나? 아니면 운반책?’
꿈을 통해 미래를 알고 있다.
하지만 50여년의 방대한 량.
원내 대표가 저격을 당한 후 몰락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방아쇠를 윤채아가 당겼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당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이 자료가 성윤의 손에 들어왔으니까.
안재열 전 대통령에게 어떤 선물을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좋은 게 들어왔다.
이제 현실은 다르게 흘러갈 거다.
예순아홉 장의 서류.
성윤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시각, 휴게실.
그곳엔 윤채아와 그녀의 수석 보좌관 그리고 성윤에게 시비를 걸었던 남자만 있었다.
윤채아는 휴게실 의자에 다리를 외로 꼰 채 남자를 노려본다.
남자는 손을 공손히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옆에 서 있던 그녀의 수석 보좌관이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똑바로 교육 시키겠습니다.”
하지만 윤채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는다.
싸늘한 눈으로 남자를 위아래 훑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앞으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가 섰다.
그리고 ‘쿡’ 하얀 손가락으로 남자의 배를 찌른다.
“또라이니? 내 이미지 망치려고 작정했어?”
“아, 아닙니다.”
“인상 써? 기분 나빠?”
“아닙니다.”
“미친 새끼, 대한민국 살기 싫지?”
“아, 아닙니다.”
윤채아의 시선이 수석 보좌관에게 향했다.
“야.”
분명 수석 보좌관의 나이가 몇 살은 더 많다.
하지만 그녀는 거침없이 하대한다.
“말씀하십시오.”
“얘, 잘라.”
“네?”
“자르라고. 이 새끼가 내 앞길에 침 뱉잖아!”
2년 동안 교체된 운전수가 아홉이다.
이제 더 구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보좌관은 히스테리를 부리는 윤채아에게 허리를 숙였다.
“제가 잘 교육 하겠습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
윤채아의 붉은 입술에 비웃음이 가득 차오른다.
그녀가 손에 낀 반지를 빼낸다.
뺨을 때리려는 거다.
“나한테 말대꾸 한 거니?”
살기가 휴게실을 채울 때, 휴게실로 한 국회의원이 쑥 고개를 내밀었다.
“윤 의원, 뭐해? 회의 시작하니까 들어가자고.”
“네, 의원님.”
윤채아는 언제 인상을 쓰고 있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휴게실을 벗어났다.
남자와 보좌관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보좌관이 한숨을 내쉬며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참아.”
***
성윤은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그때......
“하, 씨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왔나 보다.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데 계속해서 욕을 내뱉고 있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아직 열 장이 더 남았는데!
성윤의 손이 빨라졌다.
‘젠장!’
남자는 전화를 이어가며 걷고 있었다.
이제 코너를 돌면 차가 보인다.
그리고 저벅, 저벅.
코너를 돌았다.
남자의 눈에 트렁크가 열린 차가 보인다.
그가 인상을 구긴다.
“하, 좀 닫아 달라니까.”
남자는 트렁크를 닫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지하주차장의 기둥.
성윤은 그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간 떨어질 뻔 했네.”
작게 한숨을 내뱉은 후 휴대폰에 찍힌 사진을 확인했다.
잘 찍혔다.
폭탄이 손에 들어왔다.
< 고기 잡는 아저씨. -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