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회의원 이성윤-9화 (9/300)

< 일단은 씨앗. - (3) >

***

노인은 여전히 공장 점퍼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방에선 돈 꽤나 만지던 유지였으니까.

그런데......

‘이런 곳에서 식사 할 줄은 몰랐네.’

노인과 만난 곳은 신도시에 있는 한정식 집이었다.

1인당 15만 원.

그러니까 두 사람이 식사하면 30만 원이다.

“어떻게 대접할지 몰라서요.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되요. 그리고 입맛은 걱정하지 마세요. 돌도 씹어 먹을 나이니까요.”

세진이와 김밥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배는 조금 부르지만 예의라는 게 있으니 힘차게 숟가락을 들었는데......

‘어?’

비싼 집이라 그런지 맛있다.

성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던 노인은 희미하게 미소를 그린다.

“혹시, 결혼 했어요?”

“네? 아뇨.”

결혼은 왜 물어볼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화제를 돌린다.

“제 친구 중에 덕근이라고 있어요. 보따리 장사를 하다가 은퇴한 놈인데, 정치인과 가끔 어울리는 놈이라 최근의 일을 좀 물어봤죠.”

“아, 네.”

“박대철 의원의 사무실에 갔던 것을 이야기했더니 복장부터 갖춰야 했다고 혼이 났어요.”

노인은 민망하게 웃으며 계속 말을 잇는다.

“친구가 말하더라고요. 연락해 놓을 테니 민국당의 오장현 의원을 찾아가라고요. 뭐, 비서님이 해결해줬으니 이제 만날 필요가 없어졌지만요..”

알고 있던 이야기다.

그리고 오장현 의원을 찾아갔다면 1억을 뜯겼을 거다.

이제 오지 않을 이야기지만.

“지난번에도 같은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비서님은 계속 정치를 할 생각입니까?”

“네.”

단호하게 답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국회의원의 수행 비서를 하고 있는데 뜻이 없다는 게 더 웃긴 일이니까.

그런데, 노인은 말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린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데 머뭇거리는 모습.

성윤은 술병을 들어 노인의 잔을 채운 후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성윤의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생각이 들고 있었다.

꿈속에서 봤던 노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권력과 손을 잡는다.

하지만 그것은 꿈.

현실에서 민원을 해결해 준 사람은 성윤이다.

‘권력과 손을 잡았던 사람, 이번에는?’

기나긴 침묵이 이어지는 걸 보고 있으니 어쩌면 다시 오장현 의원을 찾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예감과 함께.

‘하긴......’

오장현 의원이 하늘이면 성윤은 땅이다.

권력에 눈을 뜬 사람이라면 국회의원을 찾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성윤 비서님께 투자하고 싶습니다.”

“네?”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그 순간, 노인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잘 해줬으면 좋겠어.

성윤의 능력은 속으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는 걸 듣는 게 아니다.

심연 속에 있는 생각을 문장으로 풀어주는 거다.

그런데, 잘 해줬으면 좋겠다니.

정치인으로 잘 커달라는 의미일까?

어쨌든, 미래가 바뀐 것 같아 다행이었다.

노인이 품으로 손을 슥 집어넣는다.

돈을 꺼내려나 생각했다.

오장현 의원에게도 돈을 줬었으니까.

‘그럼, 나한테는 한 삼백?’

현직 국회의원에게 1억을 줬으니 말단 비서에게는 삼백 정도.

그 정도 예상한다.

국회의원과 비서가 같은 돈을 받으면 이상한 일이니까.

물론, 돈을 내밀면 만류할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시작부터 더러울 수는 없다.

그런데, 꺼낸 것은 휴대폰.

노인이 통화 버튼을 꾹 누르더니 휴대폰을 귀에 댄다.

“오늘부터 매 달 서안 보육원에 백만 원씩 후원하도록 해. 후원자는 밝히지 말도록.”

노인이 휴대폰을 내려두며 성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신분을 숨기고 매 달 백만 원씩 후원한 사람은 이성윤 비서님입니다. 나중에 비서님이 출마할 때 누군가가 밝힐 겁니다.”

“......”

“그리고 돈의 출처는 걱정하지 마세요. 조만간 계획을 세워 연락드리도록 하죠. 부담 갖지도 마세요. 죽기 전에 좋은 일 하고 싶었는데 이성윤 비서님의 이름을 빌릴 뿐이니까요.”

이건 예상 못한 일이다.

하지만 분명 도움 되는 일.

성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잘 해줬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

툭, 툭, 툭.

집에 들어온 성윤은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덕근이?’

노인은 덕근이란 친구를 몇 번 언급했다.

정치인과 종종 만난다는 사람.

‘누구지?’

노인이 예사 인물이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 배경까지는 모른다.

조금 알아보기 위해 노트북을 열어 인터넷에 접속했다.

보따리장사를 했다고 하니, 홈페이지는 있을 거란 생각에......

그런데, 머릿속에 뭔가 번뜩이며 지나간다.

‘설마? 이덕근 사장......’

성윤은 픽 웃었다.

‘말도 안 돼.’

이덕근 사장은 얼마 전 재계에서 은퇴한 사람으로 성종 그룹 회장의 최측근이자 성종 물산의 전 사장이다.

준재벌이라 이상하지 않을 사람.

노인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재벌과 알고 지낼 리는 없다.

그것만큼은 단호하게 정의내릴 수 있다.

그런데 손가락은 자꾸 이덕근 사장의 고향을 찾아보고 있다.

‘하하. 설마.......’

이덕근 사장과 노인의 고향이 일치한다.

‘우연이야. 우연.’

그런데 지방 신문 기사에 이덕근 사장과 노인이 함께 찍은 사진이 보인다.

그것도 어깨동무를 한 사진.

기사에는 이덕근 사장이 죽마고우와 막걸리를 한 잔 했다고 적혀 있다.

성윤은 머리를 북북 긁었다.

‘이게 왜 보따리 장사야?’

이건 겸손 정도가 아니라 기만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얼마 전 박대철 의원의 보좌관이 노인을 쫓아냈던 일이 떠올랐다.

성윤은 그 일이 작은 기회를 놓쳤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내가 박대철이라면 보좌관의 영혼을 뽑아 버렸을 거야.’

재벌과 인연을 만들고 싶어 하는 국회의원은 산처럼 쌓였다.

그런데, 박대철 의원은 굴러온 대박을 발로 걷어찬 거다.

정말 고맙게.

성윤은 자축하는 의미로 손뼉을 치며 노트북을 덮었다.

씨앗은 심어지고 있다.

추수 날이 되기를 기다리며.

‘그런데, 서안시에 보육원이 있었나?’

***

며칠 후, 성윤은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오늘은 박대철 의원과 수석 보좌관을 데리고 당사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막 집을 나서는데 앞집의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사 온 뒤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웃.

여대생이라 들었다.

인사라도 하려고 잠시 기다렸는데 나오지 않는다.

분명 문 뒤에 서 있는 것 같은데......

‘마주치고 싶지 않은가?’

여대생이라 그런지 낯선 사람을 경계하나 보다.

세상살이가 워낙 흉흉하니까.

성윤은 몸을 틀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삐걱’ 문이 열리는 소리가 계단 위에서 들려온다.

성윤과 마주치기 싫었던 게 분명하다.

잠시 후, 차량의 뒤에는 수석 보좌관과 박대철 의원이 앉았다.

굳은 표정으로 있던 박대철 의원이 입을 연다.

“어디에 붙어야 할 것 같아?”

국회의원이라면 국민 또는 지역구 사람들을 걱정해야 하는데, 박대철 의원에겐 그런 것 없다.

그는 오로지 대한당의 계파 갈등에서 어디에 붙어야 하는지가 최고의 고민이다.

그래야 다음에도 공천을 약속 받을 수 있으니까.

이딴 놈이 3선까지 했다.

물론 꿈속이었지만......

그 이유는 ‘나라가 망해도 대한당!’을 외치며 당만 보는 국민.

‘난 정치에 관심이 없어.’라며 놀러가는 국민.

‘난 정치인이 모두 싫어.’라고 말하는 쿨한척하는 국민 때문이다.

그런 국민 때문에 서울에서 실거주하는 박대철 씨가 서안시 동구의 국회의원으로 12년을 해 먹는다.

그 12년 동안 서안시는 쭉쭉 기울어졌고 박대철 의원의 허리 싸이즈는 늘어만 갔고.

그렇게 대한당 당사 지하주차장에 도착했다.

성윤은 박대철 의원에게 허리를 굽혔다 폈다.

그러자 수석 보좌관이 카드를 건네며 입을 연다.

“적어도 6시간은 걸릴 거야. 그동안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시간 때우고 있어.”

계파 싸움의 갈등을 풀어보고자 하루가 멀다 하고 몇 시간씩 이어지는 마라톤 회의.

하지만 성윤에겐 관심 없는 일이다.

누가 이길지 알고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들의 싸움은 그저 개인들의 권력을 위한 개싸움이기 때문이다.

이 계파 갈등을 시작으로 실망한 국민은 대한당에 등을 돌리고 지지율은 서서히 빠지기 시작한다.

냄비 속의 개구리가 죽어가는 것처럼 누구도 인식 못할 정도로 천천히.

성윤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 성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6시간?’

아마 더 걸릴 것이다.

회의가 끝난 후 같은 패거리끼리 모여 식사도 할 테니까.

어쨌든 최소 6시간, 서울에서 서안시를 왕복하기에는 충분하다.

다른 수행비서들이 주차장에서 모여 노닥거리고 있을 때 성윤은 엑셀을 꾹 밟았다.

잠시 시간이 있을 때, 노인이 말한 서안 보육원을 보고 올 생각이다.

‘이상해......’

서안 보육원,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땐 60년이나 된 곳이었다.

6.25 때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만들어진 보육원으로 이후 약 2천여 명을 양육해 온 곳.

그런데, 성윤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거나 크리스마스를 기억해도 마찬가지, 박대철 의원은 다른 지역에 있는 보육원을 찾았다.

서안시에 보육원이 있었다면 다른 곳에 갔을 리가 없는데.....

‘뭐지?’

다행히 도로가 막히지 않아 한 시간 만에 서안 보육원에 도착했다.

시골길이라 보육원 담장에 차를 바짝 붙여 주차한 후 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낡은 축구 골대와 작은 텃밭이 곳곳에 보였다.

“어, 어떻게 오셨어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에 성윤이 고개를 돌렸다.

‘응?’

빗자루를 들고 있는 이십대 초반의 여성, 많이 본 얼굴.

연예인이다.

그런데, 이런 연예인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나?

가만히 생각해 봤지만....없다.

봤던 것은 꿈속.

‘그럼, 나중에 연예인이 되는 거야? 가수였나, 배우였나?’

거기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바쁜 일정 탓에 텔레비전은 잘 보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오셨어요?”

“아, 봉사를 하고 싶어서요. 오늘은 말고 앞으로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요.”

분명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입에 걸고 말했는데 성윤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좋지 않다.

묘하게 경계하며 위아래를 훑어보는 듯한.......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몸을 돌려 원장실로 향했다.

건물로 들어가 복도를 걷는데, 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말똥말똥한 눈으로 성윤을 바라본다.

그렇게 도착한 원장실.

예순이 조금 넘은 단발머리 여자 원장님이 성윤을 반겼다.

“어쩐 일로......?”

봉사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앞으로 국회의원이 되려면 봉사활동은 필수.

게다가 노인이 성윤의 이름으로 후원을 하는데 미리 얼굴 도장을 찍어두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원장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이 보육원은 철거될 거예요.”

“철거요?”

순간 한정식 집에서 들었던 노인의 속마음이 떠올랐다.

-잘 해줬으면 좋겠어.

< 일단은 씨앗. -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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