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은 씨앗. - (2) >
성윤은 박강중의 반응을 살피며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들은 게 있어서요.”
“무, 무슨 이야기를?”
“아시잖아요. 그거.”
뭔지 모르니까 ‘그거’라고 모호하게 지칭했다.
그런데. 상대의 마음이 들려온다.
많이 찔렸는지 적나라하게......
-씨발, 씨발, 씨발!
픽 웃음이 흘렀다.
그렇게까지 당황할 필요는 없는데.
청년 실업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고생해서 들어온 말단 공무원의 옷을 벗길 생각은 없다.
윗물이 탁하니 아래가 더러워진 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용서해 줄 생각도 없다.
잘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은 져야지.
‘나한테.’
이왕 이렇게 된 것 박강중의 버릇도 고쳐주고 목줄을 걸 계획도 가졌다.
공무원 한 명을 옆에 끼고 있으면 정보도 듣고 여러모로 쓰임세가 많기 때문에.
제대로 요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박강중의 목울대가 움직인다.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외로 꼬았던 다리는 어느새 얌전히 모아져 있다.
양손은 무릎 위에 공손히 놓여 있고.
그래서 한 마디 더 찔렀다.
“이렇게 겁먹을 깜냥이면 애초에 그러지 말았어야 하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고민했어요. 이걸 기자들에게 넘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기자요?”
박강중의 눈동자엔 눈물까지 그렁그렁하다.
그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피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성윤에게 다가와 양 손을 덥석 쥐어 잡는다.
“살려 주십시오! 잘 못했습니다.”
“손은 좀 놓아 주시고.”
“네?”
“내가 남자 손잡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해서.”
“아, 네! 죄송합니다.”
손을 놓고 엉거주춤 선 박강중을 보며 성윤이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또박또박 말해 보세요. 박강중 씨가 무엇을 잘 못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네?”
“기자에게 넘길까요? 박강중 씨 뿐만이 아니라 구청에 있는 공무원들 다 병신되라고? 구청장님 나와서 대국민 사과하고?”
박강중은 성윤의 이름도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조차 모른다.
하지만 지금 칼자루를 쥔 사람은 성윤이다.
시키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바, 바일애드라는 회사에서 시계를 받았어요......”
***
구청 건물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던 성윤은 노인에게 전화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어 귀에 댄다.
민원이 해결된 걸 알면 얼마나 기뻐할까?
그런데, 신호음이 이어졌지만 ‘전화를 받지 않아.’ 라는 소리만 들려온다.
이왕 휴대폰을 꺼낸 것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밥은 먹었어?
“먹었어요. 아버지는요?”
-주무시지. 어제 야간 근무했거든.
부모님은 언제나 옆에 계실 것으로 생각했고 효도는 성공한 후에 물질적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부모님이 계속 곁에 있을 거란 착각이지.
-일하는 건 어때?
“다들 잘 해주세요. 어려운 것도 없고요.”
-어제 동네 아줌마들 모였는데, 우리 아들이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하니까 취업자리 알아봐 줄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엄마가 단번에 거절했어. 우리 아들 나중에 국회의원 되려면 그런 거 하면 안 되잖아.
“하하, 제가 청탁 받을 급은 아니에요. 받을 생각도 없지만요.”
차에 오르며 전화를 끊었다.
시동을 거는데 곧바로 벨이 울린다.
“네, 이성윤입니다.”
-나야.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다.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인데, 벌써부터 취한 목소리로.
-세진이 픽업해야 하는데, 일하는 아줌마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유치원으로 가.
세진이를 처음 만나던 게 오늘이었나 보다.
부모와도 담을 쌓고 살던 질풍노도의 시기에도 유일하게 성윤에게는 마음을 열었던 아이.
박대철 의원과 그 마누라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였지만 세진이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세진이를 보며 금송아지 타고 태어났다고 말했지만 불쌍한 점이 더 많았다.
사건이 터지면 학교까지 찾아오는 기자님들 덕에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고 친구들이 수군댄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척 참아야만 했으니까.
부모의 잘 못을 대신 받는 아이, 그게 세진이었다.
‘네 인생도 힘들었겠구나.’
성윤은 핸들을 틀며 유치원으로 향했다.
휴대폰으로 유치원의 주소가 보내졌지만 확인하지는 않는다.
알고 있으니까.
***
“어머님께 연락 받았어요. 이성윤 비서님이라고요?”
“네.”
낯선 아저씨, 그러니까 성윤을 본 세진이는 유치원 선생님의 다리 뒤에 숨어 있었다.
말똥말똥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성윤을 보면서도 뭔가 겁이 나는 모양이다.
성윤의 얼굴이 사납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어린 아이들은 덩치 좋은 남자를 무서워한다.
성윤의 키가 184cm, 운동을 하며 체형이 탄탄하게 변하고 있으니 세진이의 행동은 이해할만 하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세진이의 눈과 눈높이를 맞췄다.
“안녕? 아저씨는 성윤이라고 해. 엄마 연락 받고 왔어.”
말을 하면서도 절로 웃음이 났다.
이때의 세진이는 참 귀여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정말 반가워서.
이게 참, 웃긴 일이기도 하다.
행복하게 살아줬으면 하는 세진이의 아버지가 쓰레기 박대철 의원이라니.
“엄마 금방 온다니까 그때까지 아저씨랑 놀이터에서 놀래?”
세진이는 조금씩 다가와 내민 손을 잡았다.
순간, 성윤은 세진이를 번쩍 안아 든다.
깜짝 놀랐지만 재밌었나 보다.
까르르 웃는 세진이.
유치원 선생님이 놀란 얼굴로 본다.
“아이를 잘 보시네요? 젊으신 분들은 아이 대하는 걸 어려워하잖아요?”
“그런가요? 원래 아이들을 좋아해서요.”
성윤의 시선은 세진이에게 향했다.
“놀이터 갈까?”
아직 부끄러운지 대답은 안 하고 고개만 끄덕끄덕.
그래, 가자.
오랜만에 놀이터에서 놀아보자.
그네도 밀어주고 미끄럼틀 타는 것도 보고 모래를 퍼서 산도 만들었다.
한 창 재밌게 놀아주다보니 시간은 여섯시 삼십 분.
어둑해졌지만 아직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가 돌아올 기미는 없다.
어디선가 친구들과 떠들어 대고 있을 거다.
제 딸내미가 뭘 하는지 관심도 없겠지.
원래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모든 걸 맡겨두는 사람이니까.
“아저씨, 나 배고파요.”
“밥 먹을래?”
세진이와 김밥 가게로 향했다.
김밥 몇 줄을 시켜주자 배고팠는지 허겁지겁 먹는다.
그렇게 배고팠으면 말을 하지.
성윤은 비빔밥.
고추장만 맛있으면 비빔밥은 어딜 가도 맛있다.
식사를 마치고 숟가락을 놓자 세진이는 테이블 위에 핸드폰만 물끄러미 보고 있다.
제 엄마의 연락을 기다리는 거다.
기억을 더듬어 봤다.
‘이 아줌마가 몇 시에 왔더라?’
그때도 이 가게에 와서 식사를 했는데 이 시간 쯤 택시를 타고 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만취해서.
기억이 정확했는지 핸드폰이 부르르 울렸다.
***
“밥은?”
“먹었어.”
아파트 현관.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는 혀 꼬인 목소리로 물었고 세진이는 간단히 대답한다.
딱 봐도 이 시기부터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다.
일곱 살 아이에겐 쉽지 않은 일인데.
세진이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찬바람을 쌩쌩 날리며 자기 엄마의 옆을 스쳐 들어간다.
그러자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가 성윤을 향했다.
“고생했어.”
“세진이가 잘 따라줘서 재밌었습니다.”
등을 돌리고 들어가던 세진이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성윤을 본다.
그리고 자기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오늘 감사합니다.”
“어?”
“정말 재밌었어요. 놀이터에서 놀아 본 거 진짜 오랜만이에요.”
세진이는 꾸벅 배꼽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는 피곤한 얼굴로 성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문을 닫는다.
복도의 불이 꺼질 때까지 성윤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방금 그게 일곱 살짜리의 표정이야?’
성윤을 보고 희미하게 웃던 얼굴은 정말 외로워 보였다.
그 말투 역시 마찬가지.
다른 사람이 세진이를 봤다면 앞으로 박대철 의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빨리 몰락시켜야겠어.’
성윤의 생각은 단호했다.
그래야 저 빌어먹을 부부를 세진이의 옆으로 돌려보낼 수 있으니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노인이다.
-전화하셨어요? 나이가 드니까 벨 소리가 잘 안 들려서요.
“아, 네. 기쁜 소식 알려드리려고요.”
-기쁜 소식이요?
“민원 해결됐습니다. 내일 구청에 가시면 바로 진행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요?
많이 기뻤는지 노인의 목소리가 커진다.
자연스레 성윤의 목소리 역시 마찬 가지다.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괜찮아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기억을 더듬어 보면 노인은 다른 당의 국회의원 오장현에게 보답으로 돈을 찔러줬다.
노인의 돈이 좋지 않게 사용된 것은 뭐.......
현실에선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해서 민원을 받은 것인데.
노인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온다.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네?”
-사무실에 계신 거죠?
< 일단은 씨앗. -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