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은 씨앗. - (1) >
낯익은 얼굴, 분명 꿈속에서 마주했던 사람이다.
‘누구지?’
성윤이 기억을 살피고 있을 때 ‘딸칵’ 방문이 열리고 수석 보좌관이 걸어 나왔다.
회의가 복잡하게 이어지는지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상태로.
“성윤 씨, 커피 좀 부탁해.”
말을 하던 수석 보좌관의 시선이 성윤의 앞에 선 노인에게로 향했다.
“누구?”
공장 점퍼에 낡은 구두를 신은 초라한 행색.
딱 봐도 도움 안 되는 사람이다.
수석 보좌관과 눈을 마주친 노인이 한 발 나서며 간절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말씀하세요.”
수석 보좌관은 냉랭한 눈빛과 목소리를 유지했다.
노인 역시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눈치 챘겠지만 굴하지 않고 입을 연다.
“제 딸이 작은 사업을 하는데......”
“사업이요?”
“네.”
“그래서요?”
“광고판 설치를 하는데 구청에서 계속 허가를......”
수석 보좌관은 민망할 정도로 한숨을 푹 내쉰다.
그리고 조금은 고압적인 태도로 고개를 빳빳이 하고 입을 연다.
“선생님, 그런 것은 구청에 가서 따지셔야 해요. 저희는 그런 민원을 듣는 곳이 아니에요. 그리고 따님 문제라면서요? 따님이 직접 와야지 선생님이 왜.......”
수석 보좌관은 잠시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다가 성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성윤 씨, 할아버지 말씀 들어주고 보고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커피 잊지 말고.”
“아, 네.”
들어주고 보고하기는 개뿔.
귀찮으니까 알아서 돌려보내란 뜻이다.
수석 보좌관의 속마음이 들려온다.
국민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이 아니다.
-바빠 죽겠는데 개나 소나 드나들고 있어.
수석 보좌관은 쾅! 거칠게 문을 닫고 들어간다.
노인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성윤은 수석 보좌관과 달리 친절한 목소리로 노인에게 향했다.
“아닙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노인은 이곳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몸을 돌려 사무실을 떠난다.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기억났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됐다.
박대철 의원의 사무실에서 쫓겨난 노인은 며칠 후 다른 당의 국회의원 오장현을 찾아간다.
지금과 달리 그럴싸한 복장을 갖추고서.
‘오장현이 저 할아버지의 민원을 해결해 주고 1억을 받았다고 들었어.’
권력자들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
특히 자기 지역구에선 개 코다.
하지만 이 노인은 막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보가 전혀 없었다.
정보가 있었다면 박대철 의원은 버선발로 뛰쳐나왔을 거다.
어쨌든, 이 노인의 정체는 ‘조물주 아래 건물주’ 일명 갓물주다.
강남과 각 지방에 빌딩은 물론 고향에 수백만 평의 땅을 가진 부자!
하지만 부자라고 해서 모두 권력과 손을 잡고 살아 온 것은 아니다.
이 노인은 지금껏 권력과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 일 이후로 변한다.
뻗대던 공무원이 한 큐에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국회의원과 끈끈하게 지내기 시작한 거다.
문제는 그 사람이 민국당 오장현이라는 거지.
박대철 의원이 그냥 쓰레기라면 오장현은 T.O.P.
오장현은 시민 단체를 운영하다 국회의원 배지를 단 인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부자들의 머리에 빨대 꼽는 걸 인생의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얻은 돈은 흥청망청 술과 여자에게 쓴다.
이 노인이 후원할 돈도 마찬가지.
여기까지 생각한 성윤은 한창 일하는 9급 비서를 바라봤다.
타이핑을 하며 바빠 보이는 그녀.
“한 비서님, 죄송한데 의원님 방에 커피 좀 부탁해요.”
“네? 저도 할 일이......”
“정말 죄송해요. 제가 화장실이 급해서. 좀 부탁할 게요.”
성윤은 노인을 뒤쫓아 뛰었다.
한 평생 모은 돈을 오장현 같은 놈에게 쪽쪽 빨리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노인은 성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거다.
다행히 노인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앞으로 다가가던 성윤은 잠시 멈칫 거린다.
7급이라고 하지만 수행비서.
운전하는 것 외에 주어진 권한이 없는데 노인의 민원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바보같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해야지! 무조건 해야지.’
한계를 생각하며 망설이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돈을 받아 펑펑 쓰는 오장현을 보며 뒤에서 병신처럼 욕이나 할 거다.
그럼 꿈속과 똑같은 미래가 펼쳐질 거고......
그건 사양이다.
그러니까 일단 손을 뻗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할아버지!”
“아, 네.”
“박대철 국회의원의 수행비서 이성윤입니다.”
“그런데, 왜.......”
“민원이 있으시잖아요. 듣고 싶어서 따라 나왔어요.”
명함을 받아 든 노인의 표정은 점차 누그러진다.
수행비서라는 게 별 것 없는 직책이지만 듣기에 따라 멋있어 보이기도 하니까.
성윤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1층에 커피숍 있는데 잠깐 가시겠어요?”
***
“딸이 다리를 좀 다쳐서 병원에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나서게 됐어요. 애미 없이 혼자 키운 딸인데, 속상해 하는 모습이 가슴 아파서요. 구청에 가봤지만 안 된다고만 말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작은 광고 업체를 운영하는 노인의 딸은 광고판 설치를 위해 도로점용 허가를 받으려 했다.
하지만 구청의 9급 공무원은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다.
법적으로 어떤 문제도 없는데 ‘미관상 좋지 않아 민원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니 검토해야 한다.’ 라는 게 이유였다.
발생할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업을 할 때 가장 무서운 사람은 대통령도 아니고 9급 공무원이란 말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뭐, 공무원들도 할 말은 많을 거다.
사소한 문제라도 발생하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이상 새로운 일에 신중할 수밖에 없으니까.
성윤은 수첩을 꺼내들고 노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최대한 믿음 가는 눈빛을 보이면서.
그리고 노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성윤도 수첩을 덮었다.
“사무실과는 별개로 힘 써보겠습니다. 사실 국회의원이 개개인의 민원까지 해결 할 시간은 없거든요.”
재주는 곰이 부렸는데 돈은 왕 서방이 챙기는 꼴을 볼 수는 없다.
그건 사양이거든.
“감사합니다.”
“아뇨, 해야 할 일인데요.”
“그런데, 국회의원 비서라면 나중에 그쪽으로 뜻이 있으신 분인가요?”
“노력하는 중이에요.”
성윤은 슬며시 웃었고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노인을 보내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회의를 마치고 나온 보좌관이 손가락으로 까딱까딱한다.
“담배 한 대 피울까?”
“아, 네.”
두 사람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보좌관이 성윤의 입에 담배를 물리며 입을 연다.
“화장실 갔다 오는 게 한 시간이나 걸리나? 혹시 그 할아버지 따라갔어?”
앞으로의 일은 숨기겠지만 노인을 따라갔다는 것까지 속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니.
“하, 미친놈아, 큰 그림을 그려야지. 이 바닥에서 민원인 불쌍하다고 마음 약해지면 빌빌 거리게 되는 거 몰라?”
응, 몰라.
***
며칠 후,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를 백화점에 집어넣어 놓고 구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민원 해결을 위해 공무원의 얼굴은 한 번 봐야 하니까.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힘으로 눌러?’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는 ‘호가호위’ 스킬.
국회의원의 아래서 일하며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만 지금처럼 권한 없는 수행 비서일 때는 낭패를 볼 경우가 종종 있다.
해당 공무원이 시의원과 친분이 있는데 또 그 시의원이 박대철 의원과 친해서 미주알고주알 일러버린다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더 큰 스킬이 있으니까.
바로 상대의 마음을 읽는 능력.
그리고 꿈속에서 수십 년간 비서와 보좌관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박박 기었던 경험.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구청의 3층.
해당 공무원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뭔가에 집중해서 일하는 공무원들이 보인다.
문 바로 앞에 보이는 칸막이에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박강중 씨가 누구.......”
공무원은 성윤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도 묻지 않고 구석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다시 자기 일에 열중한다.
성윤은 가볍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 삼십 대 초반의 청년이 보인다.
“안녕하세요?”
말을 걸자 박강중은 고개를 틀어 성윤을 향한다.
눈을 깜빡 깜박거리며.
“무슨 일이시죠?”
“듀오 미디어에 관한 일로 찾아왔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듀오 미디어는 노인의 딸이 운영하는 회사.
미간이 찌푸린 박강중이 조금은 짜증섞인 목소리로.
“휴게실로 가시죠.”
자리에서 일어난 박강중은 성큼성큼 걸었다.
그 뒤를 쫓던 성윤은 상대의 마음을 읽기 시작한다.
-씨발, 귀찮게.
탁.
휴게실의 테이블에 사이다와 콜라가 놓였다.
성윤의 맞은편에 앉은 박강중이 캔 사이다의 뚜껑을 뜯으며 입을 열기 시작한다.
“거기는 안 돼요. 유동 인구가 많고 미관상 민원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거든요. 아니 반드시 들어올 거예요.”
여기까지는 인정.
그럴 수도 있다.
공무원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민원이니까.
하지만 성윤이 알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다.
정말 그 이유야?
박강중의 마음이 들려온다.
-아, 질기네. 빨리 포기해야 바일애드에서 그 자리를 차지할 텐데.
‘바일애드?’
오늘은 얼굴이나 보고 동향만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속전속결로 해결할 수 있다는 예감이 든다.
퍼즐을 맞춰보면, 박강중은 바일애드라는 업체와 모종의 커미션이 존재한다.
바일애드 대표와 지인이거나 아니면 돈을 받고 좋은 길목을 차지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거다.
성윤은 슬쩍 박강중의 모습을 스캔했다.
셔츠에 가려진 벨트는 누구나 잘 아는 명품 브랜드로 약 60만 원.
시계는 200만 원대로 관심이 없으면 잘 모르는 브랜드.
녀석은 티가 나지 않는 곳에 돈을 발랐다.
원래 부자이거나 아니면 뒷돈을 받았거나.
후자 쪽이라고 생각한다.
구두는 싼 거니까.
자, 알았으면 직구다.
“박강중 씨, 혹시 바일애드라고 아세요?”
피곤에 쩔은 얼굴로 사이다를 홀짝이던 박강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은 순간이었다.
이제 쇼 타임.
< 일단은 씨앗. -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