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의 목소리가 들려. - (1) >
***
따르르릉.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탁상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자 새벽 4시 50분.
성윤은 곧장 일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몸이 풀리자 문에 단 철봉에 손을 대고 턱걸이를 한다.
한 개, 두 개......
어느새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잠시 후,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며 차가운 물이 몸을 적셨지만 오히려 정신은 또렷해지고 있다.
주방으로 나온 성윤은 사다 놓은 빵을 입에 물고 현관문을 열었다.
겹겹이 쌓인 일곱 부의 신문이 보인다.
좌와 우를 대변하는 일간지가 다섯, 경제지가 하나, 영자신문이 한 부다.
미래를 알고 있다 해도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신문은 숨겨진 기억 세포를 끄집어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성윤은 글자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미래에 영향을 줄 사건은 밑줄을 긋고 오려두기까지 하면서.
박대철 의원의 사무실에 들어간 지 한 달.
성윤은 위로 올라가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하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손에 든 신문을 내려놓은 것은 7시 30분.
커피 잔을 들고 창가에 몸을 기댄 후 멍하니 창밖을 본다.
빽빽이 둘러 싼 건물 때문에 조망이 좋지는 않지만 지금은 유일하게 뇌를 쉬는 시간이다.
그렇게 30분.
핸드폰 알람이 8시를 알린다.
옷을 갈아입고 건물에서 나와 공용 주차장으로 향했다.
기다리는 고급 세단, 박대철 의원의 자동차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가 이용한다.
오늘도 마찬가지.
성윤은 박대철 의원 마누라의 운전사가 되어야 했다.
이러라고 나라에서 월급을 주는 게 아닌데.....
박대철 의원.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는 부동산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부동산 급등으로 돈 꽤나 만진 그는 다음 욕망으로 권력을 바라봤다.
그리고 권력을 손에 잡기 위한 첫 걸음으로 자율방범대를 비롯한 각 향우회, 각종 동호회에 참석하는 한 편 대한당에 가입했다.
이후 막대한 돈을 뿌려대더니 당원협의회 운영 위원장을 맡고 10년 만에 배지까지 달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다음 선거를 확신할 수 없는 초선이며 돈으로 배지를 샀다고 뒷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여기저기 인맥 넓히기에 혈안이었다.
성윤은 그의 등에 붙어 와신상담 칼을 가는 중이다.
언젠가 믿는 도끼에 뒤통수를 후려 맞은 박대철 의원의 표정을 정말 보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 칼을 빼드는 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며 실패는 없을 것이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성윤이 차를 세운 곳은 백화점 지하 주차장이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가 묻는다.
“어때?”
성윤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대답했다.
“고상해 보이십니다.”
“이 비서가 뭘 좀 아는 구나? 오늘 화장이 잘 먹었거든.”
늘어진 볼 살과 짙은 화장.
되도 않는 거짓말이지만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는 진심으로 믿는 듯 했다.
손거울을 향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던 그녀는 모자를 푹 눌러 쓰더니 곧 도도하게 내렸다.
“두 시간 있다가 와.”
그녀가 향하는 곳은 반대편에 있는 승용차다.
차량 앞에서 기다리던 젊은 남자가 팔을 활짝 벌리자 착 달라붙어 안긴다.
누가 본다면 이산가족 상봉이다.
그리고 재잘재잘 인사를 나누더니 그 남자의 차에 올라탄다.
지금부터 두 사람이 갈 곳은 뻔하다.
개도 아니고 아침부터 그 짓을 할 생각인 거지.
남편이 국회의원인데 제 멋대로 몸을 굴리는 여자.
밤에 태울 땐 담배 쩐 냄새가 역하게 올라온다.
그래도 얼굴 팔릴 것을 대비해 모자를 쓰고 다닌다.
같이 노는 남자 역시 뒷말 없는 호스트바 애들이고.
나름 조심은 하는 거지.
아, 당연하지만 수행비서가 지켜보는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수행비서의 목숨은 저 여자가 꽉 잡고 있으니까.
십만 원도 줬고.
그런데, 어쩌나?
성윤은 핸드폰으로 그녀의 행동을 촬영하고 있었다.
남자에게 안기는 장면부터 두 사람이 탄 차가 지하주차장을 벗어나는 것 까지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촬영된 동영상을 확인한 성윤은 쭉 기지개를 켰다.
‘해야 할 일이 있지?’
평소라면 세차를 하고 왁스를 바를 시간이다.
하지만 그동안 미뤄뒀던 일을 해야 한다.
이 꿈이 확실히 미래를 예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남겨두면 찝찝한 일.
그 일은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
주택 단지.
머리에 뽀글파마를 한 남자가 하품을 하며 나타났다.
“오, 차 좋네? 운전수 되더니 신수가 훤해졌다?”
남자의 이름은 이진세, 별명은 이개새.
꿈속에서 이놈은 정말 개새였다.
취업을 못하고 빌빌대던 놈이어서 성윤이 다른 의원의 사무실에 꽂아줬었는데, 성윤을 배신하고 다른 쪽에 붙었다.
비록 꿈속이었고 성윤이 몰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몇 대는 쥐어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대학 동기들 사이에서 성윤이 운전이나 한다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의 원흉은 이놈이 분명하고.
그런데, 이놈은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
“운전수, 세차 안 해? 여기 먼지 있잖아. 잘 좀 닦아야지. 그런데, 국회의원 똥 닦아 주면 얼마나 받아? 백만 원? 좋은 대학 나와서 그게 뭐냐? 얘기 했더니 다른 친구들도 비웃더라.”
깐족깐족 되고 있다.
그것도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실실 웃는 이개새를 보며 성윤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래도 꿈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
“꿈? 왜? 국회의원이라도 되려고? 꿈 깨 새끼야. 다른 애들도 다 비웃더라. 운전기사가 국회의원이 된다고? 크크크.”
“역시 넌 내 배신할 놈이야. 지금도 뒤에서 지껄이고 다니는 걸 보면.”
“응? 무슨 소리야?”
성윤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주변을 살폈다.
“CCTV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고 주차된 차량도 없네. 그러니까 좀 맞자.”
성윤의 주먹이 이개새의 복부에 꽂혔다.
바닥에 나뒹구는 상대의 머리를 콱 쥔다.
“따라 와.”
성윤은 그의 머리채를 쥐고 주택가 골목의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갔다.
초등학교 때를 제외하고 지금껏 사람을 때린 적도 싸운 적도 없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용서해줘야 하나?
하지만 이용가치가 없으면서 눈엣 가시 같고 또 그 인간이 배신까지 했다면?
여기서 닳고 닳은 정치인이라면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이용가치가 없으면 이용가치를 만들어야지. 세상에 필요없는 것은 없어.”
이개새의 이용가치는 성윤 자신의 성격 개조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았던 사람 좋은 성윤은 안녕.
이제는 적과 아군을 확실히 해야 한다.
뭐, 꿈속과 뒷말하고 다닌 앙갚음은 덤이다.
“신고하고 싶으면 해. 그런데, 증거가 없을 거야. 그리고 고마워 해. 더 때리고 싶지만 참은 거야.”
이렇게 말했지만 신고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신고할 만큼 때린 것도 없고 그동안 깐족거려 맞았다고 생각할 거니까.
성윤은 골목을 벗어났다.
‘너무했나?’
생각했지만 그래도 속은 시원하다.
***
다시 백화점으로 돌아온 성윤은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를 만났다.
그녀는 남자와 헤어진 후 쇼핑을 했는지 손에 든 쇼핑백을 건넨다.
슬쩍 확인해 보니 4백 만 원짜리 가방.
그녀는 한 달에 한 두 번 고가의 명품 가방을 지르는 걸 취미로 삼는다.
그런데, 아무리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다고 해도 마누라의 과소비는 이해하기 어렵다.
‘초선 의원이 뒷돈을 받고 있나?’ 의심될 정도로.
성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꿈속을 기억해도 지금은 단순히 운전만 하던 때다.
그래서 박대철 의원이 뒷돈을 받는지 뭘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박대철 의원은 정말 더러운 놈이다.
받고 있을 게 분명하다.
‘확인해 봐야겠네.’
상대의 약점은 다다익선.
박대철 의원은 성윤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십년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박대철 의원의 비리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누라를 집으로 돌려보낸 후 사무실로 들어온 것은 오후 5시.
예전의 성윤이었다면 아직 사무실의 분위기가 어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커피 한잔을 두고 신문을 펼 정도로 느긋하다.
소파에 앉아 비서와 비서관 그리고 보좌관의 얼굴을 살폈다.
그 중 한 보좌관의 얼굴에서 시선이 멎는다.
‘어?’
현실에선 처음 본 보좌관.
보좌관은 총 두 명이 있는데 한 명은 사무실에 상주하며 지역민의 민원을 듣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저 사람은 수석 보좌관으로 상임위 활동을 총괄하고 박대철 의원의 보도 자료를 전담한다.
사실 수행 비서인 성윤과는 잘 알고 지내야 하는데, 성윤이 하는 일의 주가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를 태우고 다니는 것이니.....
어쨌든.
‘현실에서 보니까 반갑네.’
저 보좌관은 개처럼 일하지만 1년 후에 쫓겨난다.
아니 저 보좌관뿐만이 아니다.
이 사무실에 성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3년을 버티는 사람이 없다.
박대철 의원의 개 같은 성격 때문에.
어쨌든 지금 수석 보좌관은 열심히 전화를 하며 뭔가를 말하고 있는데......
‘아직 머리카락이 남아 있네. 1년 후엔 반이 없어지는데. 탈모 샴푸라도 사줘야 하나?’
머리가 있어서 그런지 상당히 젊어 보인다.
그런데.....
“이성윤 씨 맞죠? 수행비서.”
“아, 네.”
성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석 보좌관이 다가와 메모지를 건넨다.
“내일은 사모님 전화와도 내 쪽에서 처리할 테니까 의원님 모시고 돌아.”
과연 수석 보좌관이라 박대철 의원의 마누라를 간단히 무시하며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오후 2시에 당사에 가야 하거든? 여기는 나도 같이 가니까 12시에 의원님 식사하실 때, 서울 사무실로 와서 나를 픽업 해. 그리고.......”
보좌관의 헝클어진 머리와 다크서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피곤이 눈에 보일 정도다.
그를 보던 성윤의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나도 저랬을까?’
성윤 역시 박대철 의원의 아래에서 악착같이 일했었다.
1년 365일 쉬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 주말은 물론 명절도 없다.
수행비서는 명절에도 일을 해야 한다.
시장에 가서 어묵과 핫도그를 처 드시는 국회의원의 옆에 있어야 하니까.
크리스마스도 없다.
그 날은 보육원에 선물 들고 가서 빨래를 해야 한다.
그렇게 옛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보좌관을 하고 있는지.
공천을 바라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순간.
-잠이나 좀 푹 잤으면 좋겠네.
수석 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입으로는 박대철 의원의 스케줄을 말하고 있는데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은 생생한 목소리.
‘이건 뭐야?’
< 너의 목소리가 들려. -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