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파천제왕검을 가르쳐 주세요
"미, 미안해요. 갑자기 왜 이렇지, 하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자 안다정은 당혹스러워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강주혁은 휴지를 뽑아서 안다정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걸로 눈물을 닦았다. 강주혁은 안다정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동안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신태원이 유언을 말하기 전까지만 해도 강주혁은 안다정과 신태원 사이에 어떤 접점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태원의 장례식에 참석한 신다은과 때맞춰 결근을 한 안다정을 보고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신태원 얘기를 꺼내자마자 눈물을 보이는 걸 보니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이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안다정이 퉁퉁 부운 눈으로 말했다.
"그 목걸이 정말 좋아하시나 봅니다."
안다정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이젠 이럴 필요도 없는데. 전부 부질없는 짓이죠."
안다정은 손을 뒤로 해서 목걸이를 풀었다. 강주혁은 눈이 커졌다.
짧았던 머리가 길어지고 얼굴의 윤곽이 조금 달라졌다. 키와 체형도 변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낯익은 사람이었다.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있던 강주혁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감쪽같군요."
"그동안 속여서 미안해요."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예전에 안 팀장님 아니, 다은 씨를 만났던 게 떠오르는군요."
안다정 아니 신다은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그 얘기는 좀……."
신다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송년회에서 한 번, 청계산에서 한 번. 만날 때마다 신다은은 안다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면서 노골적인 질문을 던져댔다.
그 때를 떠올리면서 강주혁은 좋아해야할지 화를 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할아버지 회사인데 왜 굳이 신분을 속였습니까?"
"그, 그게 이야기하자면…… 좀 길어요."
모든 일은 신대성과 신대길의 대결에서 시작되었다. 그 때의 패배로 신대길은 헌터 일을 그만두었다.
신태원은 후계자에게 필요한 자질들 중 헌터로서의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휠체어신세를 지게 된 신대길은 사실상 후계경쟁에서 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다은은 그 전까지 그룹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신대성에 대한 복수심으로 후계경쟁에 뛰어들었다.
자식들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옥석이 가려지기를 바랐던 신태원은 신다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미 신대길이 한 번 패배했으니 핸디캡을 줬다.
그게 바로 변신목걸이였다. 신다은은 안다정의 모습으로 집안의 후광 없이 자신을 증명해야만했다.
"결국엔 실패했죠."
신다은은 씁쓸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요. 실패는 아니죠."
"성패를 결정하는 사람은 할아버지에요. 하지만 할아버지 눈에는 강 이사님밖에 없었죠. 자식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에 안 차셨어요."
"그런가요?"
"저도 그렇고 유정 언니도 그렇고 나름대로 잘 해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강 이사님이랑 같은 시기에 회사를 다니는 바람에 빛이 바랬죠."
강주혁은 어색하게 웃었다.
"게다가 할아버지가 이렇게 갑자기 떠나셔서…… 다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렸죠."
신다은은 허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회장님께서 떠나지 않으셨다면 평가가 달라지셨을 겁니다.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마세요."
강주혁에게 가려져있기는 했지만 안다정 역시 뛰어난 헌터였다. 계속해서 불협화음을 일으켰던 회귀 전과는 다르게 인망도 얻고 있었다.
강주혁 만큼은 아니더라도 초고속 진급을 하고 있는 인재들 중 한 명이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신다은이 강주혁을 바라봤다.
"네?"
"신대성 전 부회장에게 복수하는 게 목표라고 하셨잖아요."
"네. 그랬죠.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제가 잘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반쯤 성공하긴 했죠."
신대길은 부회장으로 착실하게 경력을 쌓고 있지만 신대성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애초에 신다은이 그룹에 욕심을 낸 것도 신대성이 그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태원이 유언장의 내용을 바꾸는 바람에 신대성은 아버지로부터 땡전 한 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 전에 받은 것들이 있어서 굶어죽지는 않겠지만 지금 같은 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은 씨는 그걸로 만족하나요?"
신다은은 강주혁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몰라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제 얘기를 할 차례군요."
강주혁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신다은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몰랐기에 경산마존의 존재부터 이야기했다.
무극검을 익혀서 경산마존이 된 할아버지, 경산마존을 뒤에서 조정했던 마석훈, 할아버지의 이성을 되찾게 해준 신태원.
무극검을 탐해서 강 씨 집안을 몰락하게 만든 신대성과 무극검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스스로 언데드가 된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복수를 포기하고 사그라진 아버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신다은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극검 구결은 경산 던전의 히든 피스에 새겨져 있습니다. 신대성은 그걸 위해서 할아버지를 깨워서 밖으로 유인했죠. 경산에서 출몰한 신종 몬스터의 정체는 언데드가 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랬군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저와 회장님이 할아버지와 싸우는 동안 신대성은 무극검 구결을 베꼈습니다. 그리고 그걸 익혔죠."
"……설마?"
"맞아요. 회장님을 죽인 건 신대성입니다."
신다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노 때문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말 안 했어요?"
"헌터 관리국과 경찰에게 보고했죠. 하지만 범죄를 입증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했어요."
아직 대중은 신태원을 죽인 괴한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 신대성이 했다는 걸 증명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했다.
강주혁은 그 당시의 상황을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어쩐지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았어요."
사람들은 현장에 있던 유일한 사람인 강주혁을 의심하고 있었다. 신태원을 상대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만약 집사가 사건이 발생한 후에 강주혁이 도착했다는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범인으로 몰렸을 것이다.
"무극검을 익히면 이성을 잃습니다. 이성을 잃으면 교주에게 지배당하게 되죠. 회장님께서 신대성이 이미 교주에게 잠식당했다고 하셨어요. 교주는 인간이 할 수 없는 많은 걸 할 수 있죠."
"헌터 관리국도 알고 있나요?"
"김철수 주무관만 알고 있습니다."
"잡을 방법이 없을까요?"
대중은 신태원을 죽인 범인을 찾아낼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신태원에 대한 애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태원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사회를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존재의 정체도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게 국민들에게는 큰 불안일 것이다. 헌터 관리국은 어떤 식으로든 범인을 찾아야 했다.
"광야에 티아메트급 블랙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건 들어보셨죠?"
"네. <용의 길> 때문에 나온 거 아닌가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놈을 감시하고 있는 헌터 관리국에 따르면 최근에 이상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상행동이요?"
"주기적으로 자기 지역을 이탈한대요."
"……확실히 자주 있는 일은 아니네요."
"교주가 그놈을 자극하고 있을 겁니다."
"교주가요? 티아메트급 블랙 드래곤을요?"
"열 명이 넘는 거인과 수만이 넘는 오크들도 움직였는데요.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겠지만 자극을 해서 유인할 수는 있을 겁니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게이트 밖으로 끄집어내려는 거겠죠?"
블랙 드래곤이 광야의 게이트 밖으로 나오면 서울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블랙 드래곤이 출몰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강주혁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겁니다. 우리는 교주의 계획을 역으로 이용할 거예요."
"어떻게요?"
"헌터 관리국이 블랙 드래곤 사냥을 위해 상급 헌터들에 대한 동원령을 내릴 겁니다. 나라 전체를 위협할 만큼 강한 몬스터니까 예비전력까지 동원될 겁니다. 다은 씨는 식구들을 모두 참석할 수 있게 해주세요. 신유정 팀장님 위로도 한 분 더 계시죠?"
"네. 수정 언니가 있어요."
신대승의 첫째 딸인 신수정은 해외에서 활동하다가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문에 잠시 귀국한 상태다.
"그분도 함께 참석할 수 있도록 설득해주세요."
"할아버지의 상속자들을 모두 모으는 건가요?"
"맞아요. 교주가 신대성을 타깃으로 삼은 이유 중 하나는 태원그룹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신대성은 빈털터리가 되었죠."
"맞아요. 하지만 회장님의 상속자들이 모두 사망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죠."
"미끼가 되어달라는 거네요."
"대놓고 신대성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요. 저 역시 미끼가 될 겁니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으니 교주도 분명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티아메트급 드래곤 레이드인 만큼 사람이 죽어도 의심을 사지 않는다.
신대성이 상속자들을 모두 죽인 후 드래곤까지 잡을 수 있다면 유산을 얻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 쌓아온 나쁜 평판도 모두 털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부회장님을 지킬 사람이 필요합니다. 믿을 만하면서도 강한 사람으로요."
장애가 있는 신대길은 공략에 참여할 수 없다. 다른 상속자들이 모두 죽어도 신대길이 살아있으면 태원그룹을 차지할 수 없다.
교주는 반드시 신대길을 제거하려고 들 것이다.
"알겠어요. 제가 한번 구해볼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게 해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개인적으로요? 뭔데요?"
"파천제왕검을 가르쳐 주세요."
* * *
한 달이 흘렀다.
처음에는 첫 발견지점에만 머물던 블랙 드래곤이 조금씩 활동반경을 넓히더니 정규공략을 진행하는 지역에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블랙 드래곤의 준동으로 미개척지역의 몬스터들이 개척지역으로 피난을 내려오면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기도 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헌터 관리국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동원령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헌터 관리국의 평판이 바닥에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큰 반발은 없었다.
상대가 나라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만큼 강한 몬스터인 데다가 그걸 막을 만한 사람들이 대부분 사망한 탓이 컸다. 어떻게 해서든 저 괴물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동원령에 따라 대형공략회사의 부장급 이상이 모두 차출되었다. 부장급은 아니지만 공허진처럼 그에 준하는 능력을 갖춘 팀장들도 차출되었다. 안다정은 차출되고도 남을 실력자였지만 컨디션 난조를 핑계로 빠졌다.
그리고 권대호, 신대승, 신대성처럼 일선에서 물러난 헌터들도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신태훈처럼 헌터업계에서 축출된 이들도 함께했다. 신다은처럼 활동을 하지 않는 헌터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형도 온 거야?"
신대승은 신대성을 보자 시비를 걸었다.
"나도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신대성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참 나, 어이가 없어서. 형은 상급헌터도 아니잖아."
"너보단 나을 거다."
"다른 사람 방해나 되지나 마. 나까지 쪽팔리니까."
"내가 할 소리다."
신대성과 신대승이 서로를 향해서 살기를 끌어 올렸다.
"둘 다 그만해라. 사람들 앞에서 무슨 추태냐?"
권대호가 쓴소리를 하자 두 사람은 살기를 거두고 물러났다.
"한심한 놈들."
권대호은 혀끝을 차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백여 명의 헌터들이 암석지대에 모여 있었다.
헌터 관리국은 업계의 원로인 권대호에게 총지휘관 역할을 맡겼다. 원래 이런 일이 있을 때는 헌터 관리국이 지휘관 역할을 했지만 비리 사건으로 좁아진 입지 때문에 양보했다. 경산사태로 사망자가 너무 많아서 김철수와 소수의 인원만 참석한 탓도 컸다.
하지만 권대호는 실질적인 작전계획과 현장 지휘를 강주혁에게 맡겼다. 최근에 광야에서 있었던 살인사건과 신태원 사건으로 인해 강주혁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커졌다. 그를 못 미더워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권대호가 자신의 권위로 뒤를 받쳐주자 아무도 강주혁에게 토를 달지 못했다.
강주혁은 이 암석지대를 블랙 드래곤과의 전장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드래곤을 잡을 때 사용하는 초대형 발리스타를 외곽에 설치했다.
드래곤을 상대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숨결이다. 이곳에는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았을 때 몸을 피할 만한 바위들이 많았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막을 수 없기에 일시적으로 저항력을 극대화시켜 주는 물약까지 준비했다.
"옵니다!"
전방에 있던 헌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블랙 드래곤을 유인하러 갔던 강주혁이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그 뒤로 엄청난 크기의 흑룡이 따라 들어왔다. 날개를 펼치자 밤처럼 사위가 어두워졌다.
"……맙소사."
겁에 질린 헌터들은 냉기마법을 맞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이곳에 있는 베테랑 헌터들조차 한 번도 저 정도 괴물을 만나지 못했다.
딱 한 사람을 빼고.
"정신 차려라! 여기가 뚫리면 서울이 위험해진다!"
권대호가 호통을 치자 헌터들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정신을 차렸다.
‘고약한 팔자군.’
젊은 시절, 신태원과 함께 티아메트급 드래곤을 상대해본 권대호는 인상을 굳혔다. 그때만 해도 죽기 전까지 그런 괴물을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얄궂은 운명은 늘그막에 그보다 더한 괴물과 맞서게 만들었다.
"공격해!"
헌터들이 원거리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살도 마법도 블랙 드래곤의 오러 스킨과 비늘을 뚫지 못했다.
공격을 날린 헌터들이 모두 자기 분야에서 한가락씩 하는 사람들인데도 그랬다.
쿵! 쿵!
모기가 사람을 물어도 움찔거리기 마련인데 블랙 드래곤은 맹공에도 아무런 반응도 없이 느긋하게 헌터들에게 다가왔다.
"가자!"
"와아아아!"
권대호가 헌터들을 이끌고 블랙 드래곤에게 돌진했다.
붕!
드래곤의 앞발이 휘둘렀다. 잔상만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퍼걱!
"으아아악!"
권대호는 도약으로 앞발을 피했으나 다른 헌터들은 그렇지 못했다.
손바닥에 부딪힌 이들은 멀찌감치 날아가 바위산에 처박혔고 손톱에 긁힌 자들은 온몸이 찢겨져 나갔다.
저들 중 절반이 부장이고 나머지 절반은 임원이다.
‘맙소사.’
권대호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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