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그게 마지막 말씀이었죠
"물론입니다."
자신을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김철수는 의외로 시원스럽게 말했다.
"예전에는 저를 못 미더워하셨던 것 같은데요."
"그랬죠. 하지만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경산에서 강주혁은 김철수의 생명을 구했다. 만약 강주혁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김철수는 지금 여기에 있지도 못할 것이다.
"다행이군요."
"저는 광야에서 헌터들을 공격한 게 이사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적도 없고 너무 노골적이니까요. 이사님을 음해할 목적을 가진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겠죠. 하지만 범인을 찾기 전까지는 이사님께서 계속해서 의심을 받게 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정부 고관들 사이에서 음모론이 나돌고 있습니다."
"음모론이요?"
"강 이사님이 블랙 헌터들의 진정한 실세라는 겁니다."
"어이가 없군요."
"블랙 헌터 내에 크게 두 개의 계파가 있고 그중 하나의 수장이 강 이사님이라는 겁니다. 이사님이 공략회사를 다닌 건 헌터들의 힘을 이용해서 반대파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는 식이죠."
강주혁은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경산마존 덕분에 이사님을 위협할 만한 사람들도 사라졌죠. 어쩌다 살아남은 신태원 회장님도 돌아가셨고요."
"주무관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건 회장님 저택의 집사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강주혁이 신태원이 있던 건물로 가기도 전에 폭발이 일어났다. 가는 길에 마주친 집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범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강주혁도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이사님이 <용의 길>을 완주한 결과 한국 전체를 위협할 정도로 강한 몬스터가 나타났죠."
광야에 나타난 티아메트급 블랙 드래곤의 존재는 한창 이슈가 되고 있었다.
미개척 지역에 있기는 했지만 이따금 천지를 울리는 울음을 터뜨려 존재를 과시했고 조사팀이 직접 찾아가서 사진까지 찍어왔다.
아직까지 강주혁이 추진한 <용의 길> 프로젝트 때문에 블랙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까지 알려진다면 강주혁이 한국을 정복하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의심이 더 심해질 것이다.
"회사의 매출 때문입니다."
강주혁은 이마를 짚은 채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타이밍이 공교롭기는 하죠. 그 정도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인원들이 모두 사망한 시점에 딱 맞춰서 나타났으니까요. 누군가 의도한 거라면 머리를 아주 잘 쓴 셈이죠."
블랙 드래곤을 잡기 위해서는 웨이브 데이 때처럼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회귀 전에도 회장급 헌터들까지 총출동해서 간신히 잡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죽고 없었다.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저는 전적으로 회사의 매출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 괴물이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강주혁은 경산마존의 재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회중시계를 노리고 일을 벌였는데 공교롭게도 경산마존의 재림과 겹치고 말았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강주혁이 의도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여길 것이다.
교주가 어디까지 계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악재가 겹치게 되었다.
경산마존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강주혁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강주혁을 쉽게 의심하는 것 같았다.
"저도 그렇게 믿고 싶군요. 하지만 강 이사님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뭘 말입니까?"
"제 생각에 지금 강 이사님은 뭔가를 숨기고 계십니다. 신대성 전 부회장을 범인으로 지목하기는 했지만 그 외에도 뭔가 더 있습니다. 아마 헌터 관리국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러시겠죠."
강주혁은 김철수의 예리한 감에 감탄했다.
확실히 무극검에 대해 털어놓으면 이 상황을 모면하고 함께 교주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극검의 유출이 더 큰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헌터 관리국이 믿기 어려운 집단이기는 하죠. 최근에 그런 사건도 있었고."
"의외군요. 관리국에 충성하시는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진 않습니다. 헌터 관리국을 믿지 못하시다면 저를 믿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주무관님을요?"
"네. 서로 탁 터놓고 얘기를 해 보는 겁니다."
"먼저 말씀해 보시죠."
"솔직하게 말해서 헌터 관리국 주무관이라는 건 위장신분입니다. 사실은 대통령 직속의 특무기관 소속이죠. 일종의 비공식 조직입니다."
실력에 비해서 직급이 너무 낮아서 의심스럽긴 했었다.
"제가 소속된 기관은 철저하게 이사님의 조부님을 제거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역시……그런 기관이 있었군요."
"정부입장에서는 공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니까요. 작고하신 회장님들처럼 친정부 인사들조차 잠재적인 위험 요소죠."
"그럼 주무관님은?"
"저는 그런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양성된 요원이죠."
"근데 원래 헌터 관리국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헌터 관리국도 어찌할 수 없는 거물들이 있지 않습니까? 회장님들이나 이사님의 조부님 같은. 그런 사람들만 전담하는 부서를 따로 만든 겁니다."
"그 부서가 헌터 관리국에 속해 있지 않다는 점이 이상하군요."
"실제로 잘 안되기는 했지만 헌터 관리국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입니다. 주기적인 감사대상이기도 하죠. 하지만 제가 속한 집단과 저는 아닙니다."
"살인면허라도 있는 겁니까?"
"그건 헌터 관리국의 상급 헌터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와 그들의 차이점은 제가 일종의 생체병기라는 데 있죠."
"생체병기요?"
"네. 경산마존을 제거하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결과물이 접니다."
"……인체개조라도 당하신 겁니까?"
"비슷합니다. 블랙 헌터도 쓰지 않을 지독한 영약들을 써가면서 신체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 거죠."
"……부작용도 심했겠군요."
"프로젝트의 생존자는 저를 포함해서 다섯입니다. 기대치를 충족시킨 사람은 제가 유일하죠. 나머지는 모두 죽거나 불구가 되었습니다."
강주혁은 할 말을 잃었다. 정부가 경산마존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은 몰랐다.
"모두 자원한 겁니까?"
"대개는 중범죄를 저지른 헌터들 중에서 선발했습니다. 사면을 대가로 투약을 했죠. 하지만 극소수의 자원자도 있었습니다."
"주무관님은 후자군요."
김철수는 빙그레 웃어 보이기만 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약의 부작용 때문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만 저는 사실 나이가 꽤 많습니다. 아마 이사님의 아버님 또래는 될 겁니다."
"네?"
강주혁은 김철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그의 또래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불로장생은 아닙니다. 정부에서 지급해 주는 약이 끊어지면 원래대로 돌아가겠죠."
"……끔찍하군요."
소설이나 영화에서 정부의 비밀병기 같은 걸 많이 봤지만 그게 진짜로 있을 줄은 몰랐다.
"저는 큰 불만이 없었습니다. 제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요."
"목표요?"
"네. 제 아버지는 이사님의 조부님께 죽은 사람들 중 한 명이죠. 저는 경산마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모든 걸 걸었습니다."
"……어떤 분이시죠?"
강주혁은 전국 십대 고수를 떠올렸다. 그중 다섯이 할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죽었다.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제 진짜 신분이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요."
강주혁은 김철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경산마존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제 인생을 걸었는데 결국 그를 넘지 못했죠. 강 이사님이 아니었다면 현장에서 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강주혁은 침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저 역시 경산마존과 관련된 일에 진심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강 이사님이 알고 계시는 걸 공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강 이사님이 이 난관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강주혁은 갈등했다.
김철수 역시 무극검으로 인한 희생자다. 그러니 그 역시 무극검에 대해 알권리가 있다.
하지만 김철수가 무극검에 대한 정보를 윗선에 보고해 버리면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어차피 사신무극검만 완성할 수 있다면 막을 수 있다.’
사신무극검은 무극검을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한 수단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이론상 완성된 사신무극검은 근소한 차이로 무극검을 능가할 수 있다.
그러니 새로운 무극검 사용자가 나타나도 사신무극검만 있다면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방법도 없고.’
교주의 계략과 우연들이 겹쳐서 최악의 상황에 빠져버렸다. 강주혁은 이 모든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되어버렸다.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진실을 공유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강주혁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믿고 도박을 해 보기로 했다.
* * *
한국 최고의 헌터 신태원이 의문의 괴한에게 살해당했다. 경산에서 대형공략회사의 회장들이 죽어 나간 지 한 달도 안 돼서 벌어진 일이었다. 헌터업계의 거물들이 잇따라 사망하자 한국 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신태원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드래곤을 죽이고, 블랙 헌터들의 봉기를 진압한 신태원은 전 국민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영웅이었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장례도 국장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대중은 당연하게도 신태원의 살해범을 찾아내라고 아우성쳤다. 다른 한 편으로는 한국을 대표하는 헌터들이 모두 사망한 지금, 누가 한국을 지키겠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강주혁은 김철수에게 무극검과 교주, 경산마존에 얽힌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놓은 후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김철수는 강주혁의 조언대로 신대성을 감시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교주를 끌어낼 계획까지도 세웠다. 그 계획이 실행하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사님, 여기예요."
안다정이 강주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주혁은 횡단보도를 건너 그녀에게 갔다.
"오랜만이에요. 몸은 좀 어떠세요?"
신태원이 세상을 떠난 다음 날부터 안다정은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결근하고 있었다. 신태원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지금도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집 앞이라서 그런지 옷차림이 수수했으나 늘 차고 다니는 목걸이는 그대로였다.
‘다은이…… 안다정에게…….’
강주혁은 신태원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곱씹어봤다.
자신이 직접 가르친 막내손녀에게 파천제왕검을 배우라는 얘기인데, 왜 거기서 안다정이라는 이름이 나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안다정이 신태원이 늘그막에 몰래 낳은 자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신태원의 장례식 기간 동안 안다정이 출근하지 않자 생각이 바뀌었다.
‘목걸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벗지 않은 목걸이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걸렸다. 장기공략 때문에 던전에서 잠을 잘 때도 항상 차고 있었다.
‘내 목걸이도 그랬지.’
톨게이트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모든 아티팩트를 찾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강주혁의 정신지배 목걸이나 회중시계처럼 진가가 드러나지 않는 물건들도 있었다.
"괜찮아요. 근데 어쩐 일이에요? 먼저 연락을 다 하고."
안다정이 힘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회사에는 그렇게 가깝게 지내면서도 사적인 연락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는 먼저 연락을 한데다가 안다정만 괜찮다면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안다정은 자신의 집 근처로 강주혁을 불렀다.
"걱정돼서 연락했습니다. 너무 오래 쉬시는 것 같아서."
강주혁의 말에 안다정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많이 좋아졌어요. 저녁식사 안 했죠?"
"네. 아직."
"같이 먹을까요?"
"좋죠."
"근데 어떡하죠? 이 근처에 딱히 갈 만한 곳이 없는데."
"전 어디든 괜찮습니다."
"제 집은 어때요?"
"네?"
강주혁은 당황했다. 갈 만한 곳이 없다곤 했지만 주변에 식당은 많았다.
"싫어요?"
"아, 아니요. 딱히."
"그럼 가요. 안 그래도 밥 먹으려고 준비 중이었거든요."
안다정은 앞장서서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강주혁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완전 급이 다르네.’
겉보기에도 고급스러웠는데 내부는 더 으리으리했다.
혼자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크기가 강주혁네 집과 비슷했다.
강주혁은 가족들과 지내는 집도 궁전 같다고 생각했으나 이 집은 차원이 달랐다.
방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고급스러운 동시에 세련되어 보였다.
강주혁네 집이 살짝 졸부의 느낌이라면 안다정의 집은 평생 부자로 살아온 사람의 공간이라는 인상을 줬다.
"혹시 파스타 괜찮아요? 계속 밥만 먹기 지겨워서……."
"좋죠."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해올게요."
안다정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향긋한 올리브향이 났다.
‘기분이 이상하네.’
호감을 가지고 있는 여성의 집이다. 상황이 심각하지 않았다면 설레고 흥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다정을 만나려고 한 이유를 떠올리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잠시 후, 안다정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접시를 가져왔다.
"사실 요리 잘 못 해요. 너무 기대하지 마요."
"맛있을 것 같은데요?"
비주얼만큼은 아주 훌륭했다. 안다정은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와인 한잔할래요?"
"……네.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안다정은 능숙한 솜씨로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뽑더니 강주혁의 잔을 채워주었다.
"입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알리오 올리오를 잘해야지 진짜 파스타를 잘하는 거라는 말이 있다.
다른 요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안다정이 파스타를 잘 만드는 사람이라는 건 분명했다.
"정말 맛있는데요. 면도 딱 적당하고요."
강주혁이 첫술을 뜨는 걸 지켜보던 안다정은 그제야 포크를 움직였다.
"고마워요. 사실 다른 요리 몇 개 시도해 보다가 망해서 급하게 만든 거예요."
"……컨디션도 안 좋을 텐데 그냥 밖에서 먹을 걸 그랬네요."
"거의 다 나았어요. 내일부터 출근할 거예요."
"다행이군요."
"근데 정말 제가 걱정되어서 온 거 맞아요?"
"그럼요."
"다른 용건은 없고요?"
강주혁은 안다정답지 않게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강주혁은 대답 대신에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회장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제가 곁에 있었습니다."
"알아요. 저도 그 얘긴 들었어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안 팀장님 이름을 말씀하셨어요. 그게 마지막 말씀이었죠."
안다정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 하셨는데요?"
안다정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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