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주무관님은 저를 믿으십니까?
시간이 흐르자 격해졌던 감정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신태원은 평생 경산마존을 원수로 여기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그의 일기를 읽고 나니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평생지기처럼 여겨졌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잘 됐다.’
신태원은 장남이 받아야 할 몫을 강주혁에게 넘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평생 일구어 온 것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경산의 사건으로 태원그룹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못난 아들 때문에 신태원이 평생 쌓아온 업적들도 빛이 바라고 말았다. 회사의 주가도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반면에 이번 사건을 수습한 강주혁의 평판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져 있었다. 회사를 최고의 전성기로 이끈 사람도 강주혁이었다. 태원은 강주혁을 필요로 하지만 강주혁은 그렇지 않다. 회사가 을이고 강주혁이 갑인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막내손녀가 힌트를 줬다.
집에 오면 강주혁 얘기만 쉴 새 없이 해대면서 막상 물어보면 그런 거 아니라고 잡아떼는 신다은을 보면서 신태원은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회사의 위기와 강 씨 집안과의 은원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수임을 깨달았다.그래서 내키지 않았음에도 강주혁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것이다.
하지만 경산마존의 일기를 읽고 나니 그런 마음이 씻은 듯이 가셨다. 강주혁이 자신의 손자처럼 여겨지는 것 같았고 금지옥엽 같은 막내손녀의 짝으로도 안성맞춤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녀석에게 파천제왕검을 가르쳐야겠군.’
조부의 일기를 읽어보라고 한 것을 보아 강주혁 역시 파천제왕검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르쳐주겠다고 하면 기꺼이 응할 것이다.
강주혁이 파천제왕검까지 배운다면 그 빛나는 재능으로 금방 현무검을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신무극검이 완성된다면, 무극검을 악용하는 자들이 나타나더라도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맥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어진다면 한국은 틀림없이 헌터 최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
신태원은 강주혁을 다시 부르려다가 지금 신대성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경산마존의 진심을 알고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신대성의 목을 벤다면 자신도 법적인 처벌을 피할 수 없다. 사정을 알리면 도덕적인 비난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들 살해라는 범죄행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지위를 이용한다면 감옥에 안 들어가고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사를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놈아, 어쩌자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아들이 저렇게 된 데에는 자신의 탓이 가장 컸다. 아들의 죄는 곧 자신의 죄이기도 했다.
신태원은 아들의 생명을 거두고 처벌을 받음으로써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자 했다.
‘음?’
그때,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신태원은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대성이냐?"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신대성이 도착했다면 집사가 알리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알아차렸을 것이다.
파지직!
그때, 자신의 정면에서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특이하게도 빛이 검은색이었다.
* * *
신태원의 저택에서 나온 강주혁은 집으로 가지 않고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신태원은 신대성의 목을 베겠다고 했지만 말처럼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신대성이 무극검 구결을 손에 넣은 건 대충 4주 전쯤. 하나의 검술을 마스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게다가 조사를 받느라 1주 정도의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대성은 이미 사신무극검을 익히기 위해서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기는 했지만 거기에 들인 노력이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수련에만 힘을 썼으니 실전은 몰라도 이론만큼은 아주 깊게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사신무극검은 무극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검술. 사신무극검에 대한 이해가 깊다면 무극검을 단기간에 익히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신대성이 갑자기 경손마존처럼 강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평소의 신태원이라면 신대성이 반항을 하더라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쪽 팔을 잃은 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왜 이렇게 안 오지?’
저택에서 나온 지 한 시간이나 지났다. 하지만 신대성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신태원은 호출을 미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사안이 중대하고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교주가 신대성을 잠식하기 전에 그를 끝내야 했다.
‘음?’
그때, 저택 안쪽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강주혁은 기운이 느껴지는 쪽을 향해 벽을 따라 달려갔다.
‘이건?’
갑자기 오싹하면서도 강렬한 기운가 느껴졌다. 단순히 강하기만 해서는 이런 느낌을 줄 수 없다. 최근에 싸운 할아버지처럼 사이한 무언가를 가진 존재만이 이런 기운을 풍길 수 있다.
‘내가 가야 한다.’
신태원은 자신의 잘못으로 시작된 일이니 자신이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강주혁은 그 의지를 의심하지 않았으나 그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능력이 의심스러웠다.
탁!
강주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담벼락을 향해 달려갔다. 입구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았다.
5미터에 달하는 담벼락은 마치 요새의 성벽처럼 보였다.
콰르르!
강주혁은 주작비상보를 사용해 담벼락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담에 설치된 센서가 강주혁의 움직임을 포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게 나았다.
척!
강주혁은 담 너머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이렇게 하는 게 대단한 무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신태원이 언짢아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장담했는데도 믿지 못했으니까. 자부심이 강한 사람인만큼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신태원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저긴가?’
좀 전에 들렸던 한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렬한 두 기운이 충돌하고 있었다.
강주혁은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한옥의 절반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제기랄!’
강주혁은 더욱 속도를 냈다. 가는 길에 소란을 듣고 달려가는 집사와 마주쳤다.
"강 이사님?"
"헌터 관리국이랑 경찰에 신고해요! 경호원들 다 저기로 모이라고 하고요!"
"알겠습니다!"
집사는 저택 밖으로 나간 강주혁이 다시 나타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곧바로 그의 말에 따랐다.
강주혁은 집사를 뒤로한 채 한옥 안으로 들어갔다.
"회장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았다. 신태원이 한구석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다.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파지직!
신태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검은색의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촤아아악!
강주혁은 망설임 없이 스파크를 검으로 찔렀다. 검 끝에 뭔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으나 금방 사라졌다.
파직. 파지직.
스파크도 완전히 흩어져 버렸다.
"회장님!"
강주혁은 단념하고 곧장 신태원에게 달려갔다.
"쿨럭!"
신태원이 검은 피를 토해냈다. 움푹 들어간 복부에서도 검은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강 이사?"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근처에 있었습니다."
신태원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 말을 들을 걸 그랬네. 괜한 객기를 부리다가 추한 꼴을 보였군."
"치료부터 해야겠습니다. 여기 치유 물약은 없습니까?"
"소용없다는 걸 알지 않나."
신태원은 고개를 저었다. 상처는 무극검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힐러도 치유 물약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일단, 지혈부터 하십시오."
강주혁은 자신의 옷을 찢어서 상처에 대려고 했으나 신태원이 만류했다.
강주혁이 신태원을 보자 그는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상처라면 병원에 가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강주혁도 그걸 알고 있었다.
"마석훈이 대성이를 집어삼켰네."
"……무극검을 완전히 익혔군요."
무극검을 마스터한 순간,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때 그랬던 것처럼 교주는 그때를 기다렸다가 신대성에 빙의를 했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신태원에게 호출이 오자 순간이동으로 들이닥쳤다.
어떻게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태원이 신대성을 베려고 한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어쩌면 신대성의 몸을 빼앗는 순간, 신태원부터 죽일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건지…… 한심한 놈."
신태원이 인상을 썼다.
"아마 무극검의 위험성을 몰랐을 겁니다."
"대성이는 완전히 끝났어. 주혁이 네가 그놈을 멈춰야 해."
강주혁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신태원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파천제왕검을 배워서 현무검을 완성해. 무슨 뜻인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쿨럭! 크윽!"
신태원은 피를 왈칵 쏟아냈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눈빛이 서서히 꺼져갔다.
"회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다은이…… 안다정에게……."
신태원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 * *
신태원이 사망했다.
뒤늦게 도착한 경찰과 헌터 관리국 헌터들이 현장을 수습했다.
강주혁은 현장에서 자신이 보고 들은 걸 증언했으나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헌터 관리국까지 따라가야 했다.
관리국 담당자는 강주혁을 취조실로 데리고 갔다.
"주무관님?"
"오랜만입니다. 이사님."
취조실에 있던 김철수가 강주혁을 맞이했다.
얼굴의 흉터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경산마존과 검을 맞댔을 때 검이 파괴되면서 그 조각들이 얼굴에 박혔었다.
하지만 경산마존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을 받은 상처가 아니어서 치유 물약이 정상적으로 작용했다.
"경산 사건 이후로 처음이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강주혁과 김철수는 악수를 나눴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앉으시죠."
강주혁은 김철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사님께서 증언해 주신 내용들을 확인해 봤습니다."
강주혁은 이미 현장에서 보고 들은 걸 얘기했다. 하지만 헌터관리국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기에 무극검에 대한 내용은 뺐다.
그리고 현장에서 신대성을 목격했다는 식으로 진술했다.
"신대성 전 부회장이 아버지로부터 호출을 받은 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뭐라고요?"
"몸이 불편해서 뭉그적거리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집에 있던 사용인들을 모두 조사했으나 다들 신대성 전 부회장이 외출을 안 했다고 하더군요."
"아마 매수당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인근 CCTV를 확인해 봐도 누가 밖으로 나간 흔적이 없습니다."
"투명화 마법이나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도로에 설치된 CCTV에는 마력을 탐지할 수 있는 기능도 탑재되어 있습니다. 어떤 마법을 쓰든 미약하게나마 증거가 남아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습니다."
강주혁은 딜레마에 빠졌다. 교주에게는 인간을 초월하는 수단들이 있다. 그는 분명 그걸 이용해서 신태원에게 습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주의 존재를 알릴 경우, 무극검에 대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만약 정부 관계자가 무극검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분명 그것을 무기화할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헌터 관리국처럼 부패한 정부기관이 그것을 손에 넣게 되면 끔찍한 재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극검을 탐하다가 교주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거나.
"강 이사님."
강주혁이 고민을 하고 있으니 김철수가 말을 걸었다.
"사실, 이번 일 하고는 별개로 이사님을 체포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를요?"
"최근 광야에서 이사님에게 공격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럿 나왔습니다."
"저한테요?"
"네. 공략팀이 인간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생존자가 많지는 않지만 그들은 입을 모아 공격자가 태원공략의 강 이사님이라고 하더군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제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저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사님께서 던전에서 순시할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났죠."
최근에 블랙 드래곤과의 싸움을 앞두고 적절한 싸움터를 찾기 위해서 던전을 자주 드나들기는 했다.
‘교주가 덫을 놨군.’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교주밖에 없었다. 어떻게 강주혁과 똑같은 모습을 한 것인지는 몰랐지만.
"다른 회사에서 신고가 들어온 이상, 저희도 이사님을 조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이사님인지라 시간이 걸렸죠."
강주혁은 재앙과도 같은 경산마존을 침묵시킨 장본인이다. 만약 그가 체포를 거부하기라도 한다면 헌터 관리국 전체가 출동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신고를 받고도 조사를 하지 않고 늦장을 부린 것 같았다.
만약 강주혁이 평범한 실력의 헌터였다면 지금쯤 쇠고랑 신세일지도 몰랐다.
강주혁은 한숨을 쉬고는 김철수에게 물었다.
"주무관님은 저를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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