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그 사람은 제 할아버지였습니다
교주는 몬스터를 조정할 수 있다. 그리고 도플갱어는 몬스터다.
한준공략이 담당하고 있던 공략 불가 지역에서 강주혁을 닮은 도플갱어가 출몰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은 조직이 와해되기 전이었다.
교주는 헌터들이 발이 닿지 않는 지역에 수시로 정찰병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거점을 만들거나 필요한 몬스터들을 모으기도 했다.
강주혁의 도플갱어 역시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다. 부하들을 시켜 면밀히 조사를 해본 결과, 문제의 지역에 도플갱어를 생성시키는 늪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주혁은 한준공략과의 합동 공략 과정에서 그 늪에 들어갔다가 나온 적이 있다고 했다.
교주는 도플갱어를 지배할 수 있었지만 곧바로 그 카드를 써먹지는 않았다. 강주혁이 임원이 되어서 혼자 던전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될 때 써먹어야지 강주혁이 의심받을 테니까.
강주혁은 블랙 헌터를 무너뜨린 공로로 예상보다 일찍 이사가 되었다. 그 후로는 순시를 목적으로 광야를 혼자 돌아다니는 경우가 잦았다. 강주혁이 광야의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회사 사람들도 모르게 된 것이다.
교주는 경산에서 돌아오자마자 공략회사에 심어둔 숙주로 옮겨가 광야로 잠입했다. 그리고 강주혁의 도플갱어를 찾아다녔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몬스터와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교주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주혁의 도플갱어답게 저항이 심했으나 교주는 끈질기게 정신지배를 시도했고 결국엔 자신의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헌터들을 사냥하는 거다. 증인이 필요하니까 가끔 한 명쯤은 도망치게 놔두고."
도플갱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걸로 네놈도 곤란해지겠지.’
경산마존이 강주혁에 의해 제압당했다는 소식을 신대성에게 접한 후 교주는 강주혁이 자신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는 걸 깨달았다.
블랙 헌터의 근거지를 급습한 작전도 강주혁이 주도했다고 들었다. 애초에 윤정석을 조직에 침투시킨 것도 강주혁이었고.
교주 역시 윤정석을 처음부터 의심했으나 자신의 세뇌능력을 굳게 믿었다. 하지만 강주혁은 윤정석의 세뇌도 풀어 버렸다.
강주혁이 세뇌를 풀었다는 보장은 없지만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윤정석에게만 일어난 것으로 봐서 강주혁이 손을 쓴 게 분명했다.
‘나락으로 떨어지게 해주마.’
교주는 이를 갈았다. 그동안 맺힌 게 많아서 어떤 식으로든 손을 봐주려고 했다.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고 언제든 상황을 만회할 수 있는 카드가 있었기에 차일피일 미뤄왔을 뿐.
하지만 자신도 어찌하지 못한 경산마존을 격퇴한 강주혁을 살려두는 건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그를 없애는 걸 최우선시하기로 했다.
우선, 강주혁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경산마존에게 당해본 사람이라면 그에 필적할 만한 힘을 가진 손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교주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포심을 이용해 강주혁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도플갱어를 이용한 것도 그 공포심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였다. 이런 식으로 헌터들을 죽이다보면 강주혁이 살인범으로 몰려서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겠군.’
* * *
며칠 후, 강주혁이 경산에 내려간 날.
교주는 몇 주 만에 신대성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초대받지는 않았지만 들어갈 방법은 많았다.
신대성이 비서를 쫓아내버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집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의 몸을 빌렸다. 신대성은 모르겠지만 그의 저택에 상주하는 사용인 전원이 교주와 계약을 맺었거나 교주가 심어놓은 사람이었다.
집요한 회유와 협박, 세뇌를 통해서 10년에 걸쳐서 주도면밀하게 진행해 온 일이었다. 계약사실에 대해 발설하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되기에 신대성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신대성은 개인훈련장에 있었다.
경산에서 돌아온 후 몇 주 동안 신대성은 이곳에 틀어박혀서 나올 줄 몰랐다.
사용인들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부터는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고 한다.
좋은 징조였다.
"네놈인가?"
신대성은 사용인의 달라진 태도에 대번에 교주가 빙의를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 사람들을 얼마나 건드린 거냐?"
신대성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광기와 살기로 물든 두 눈이 교주를 노려보였다.
확실히 기세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신태원의 아들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살이 떨릴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몇 주간 사람의 격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교주는 탐스러운 과일을 보는 심정으로 흡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몇 주 만에 전부 마스터하신 모양이군요. 축하드립니다."
"말 돌리지 마라. 내 사람을 얼마나 건드린 거지?"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교주는 신대성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서 천천히 걸었다.
신대성이 대꾸하지 않고 인상만 썼다. 아마 지금쯤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벌레들이 뇌를 파먹는 것 같은 느낌이겠지.’
교주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신대성을 보며 조소를 흘렸다.
"오랫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네놈이 기어오르는 걸 참아왔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아랫사람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동료였던 적도 없었지."
신대성이 검을 움켜잡았다.
"서로의 유용함을 인정하는 관계였죠."
"크크크. 그랬지."
신대성이 광기 어린 웃음을 토해냈다. 서서히 이성이 망가지고 있는 게 보였다.
"네놈도 알고 있겠지? 내가 네놈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걸?"
"그것참 유감이군요."
"무극검을 익히니까 알겠더군. 네놈이 경산마존을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저는 한 번도 경산마존을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귀찮아했을 뿐이죠."
교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라고는 해도 그는 내심 경산마존을 두려워했다. 경산마존이 가졌던 강대한 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건 언제든 교주가 취할 수 있었으니까.
교주가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경산마존의 강철 같은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은 그의 자식이었다.
교주가 김동훈의 모습으로 다가가 수년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주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집념과 의지는 사신무극검으로 이어졌다.
무극검의 힘을 사용하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검술. 비록 미완성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게 완성되었다면 교주는 자신을 완전히 끝장낼 수 있는 강적과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허세 부리기는. 네놈은 느껴지지 않나? 이 무한한 힘을. 아무리 네놈이라도 이 정도 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순 없을 텐데."
확실히 신대성의 존재감은 무시무시했다.
"사신무극검 같은 쓰레기 대신 이런 게 필요했었다."
"저는 처음부터 무극검을 제안했습니다. 대체재를 찾은 사람은 당신이었죠."
만약 사신무극검이 미완이라는 걸 몰랐다면 신대성에게 사신무극검을 배우라고 권유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주는 신대성의 하찮은 재능과 사신무극검의 불완전한 체계가 만나면 충분히 무극검의 대체재로 써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신대성은 사신무극검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육체를 빼앗기에 좋은 상태까지 가지는 했지만 힘도 미비해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강주혁은 사신무극검을 무난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교주는 언젠가 강주혁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일을 완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언젠가 네놈이 내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신대성은 괴로워하는 동시에 기뻐했다.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니 이미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그릇이 작은 게 아니라 그릇에 금이 갔을 뿐이라고 했지. 그래서 안에 있는 것들이 새어나가고 있다고."
신대성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흘러넘칠 정도로 큰 힘을 얻게 된다면 몇 방울쯤 흘러나가는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했었지."
신대성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웃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네놈 말이 옳았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군. 그 점에서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한다. 크흐흐흐."
신대성은 광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네놈은 너무 건방지게 굴었지."
갑자기 신대성의 신형이 사라졌다. 교주가 손짓하자 전바에 검은 장막이 솟구쳤다.
촤아악!
하지만 다시 나타난 신대성은 너무나도 가볍게 장막을 찢어 버렸다.
‘귀찮게 되었군.’
교주는 곧장 정신침투를 시도했다.
"으윽!"
신대성이 공격을 멈추고 머리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수작 부리지 마라!"
신대성은 격노를 터뜨리면서 교주에게 덤벼들었다.
촤아악!
교주는 어둠의 장막을 소환해 신대성을 막았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그걸 베어나갔다.
수세에 몰린 교주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무극검의 힘이 완전히 무르익기 직전이었다.
아직 미약하게나마 이성이 남아서 교주의 정신침투에 저항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지배당하게 될 것이다.
"죽어라!"
신대성은 미친 사람처럼 검을 휘둘렀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검격 하나하나가 섬뜩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서걱!
"큭!"
신대성의 검이 교주의 팔을 날려 버렸다. 교주는 격통을 느끼면서 무릎을 꿇었다.
"크하하하, 네놈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신대성이 자지러질 듯 웃어댔다.
교주는 신대성이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저런 식으로 웃는다는 건 이미 신대성의 인격이 남아 있지 않다는 얘기였다.
"끝을 보자."
신대성이 교주를 향해 돌진했다. 교주는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내어 장막을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신대성의 검이 장막을 뚫고 들어왔다.
푹!
"키하하하하!"
교주의 몸에 검을 꽂아 넣은 신대성이 기괴하게 웃어댔다.
교주는 눈앞이 검게 변하는 걸 느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교주는 신대성이 되어 자신이 좀 전까지 차지하고 있던 몸을 꿰뚫고 있었다.
‘뭐, 뭐야? 으아아아아아!’
머릿속에서 신대성의 비명이 들려왔다.
신대성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바람에 끔찍한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후우."
두통이 가시자 교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무극검의 힘이 만개하면 자신의 영혼도 무사하지 못한다. 하지만 만개해야지만 신대성의 영혼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교주는 최후의 순간에 정신지배를 시도했고 때맞춰 무극검의 힘이 완전히 개화하면서 그게 먹혔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영혼이 옮겨가기 전에 찢겨져 나갔을 것이다.
"부, 부회장님?"
그때, 또 다른 사용인이 신대성 아니, 교주를 찾아왔다. 그는 놀란 눈으로 교주의 손에 죽은 또 다른 사용인을 보았다.
"무슨 일인가?"
"회, 회장님께서 호출하셨습니다."
* * *
두 시간 전.
서울로 돌아온 강주혁은 곧장 신태원 회장의 저택을 찾아갔다. 전화를 해서 경산에 있는 던전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고 하니 흔쾌히 방문을 허락해줬다.
오는 길에 비급과 일기를 꼼꼼하게 다 읽었다. 일기에는 강주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들도 적혀있었다.
"이쪽입니다."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강주혁을 본채가 아니라 옆에 있는 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한복판에 커다란 한옥이 보였다. 신태원이 수련할 때 사용하는 개인 훈련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어서 오게."
신태원이 강주혁을 맞이했다. 집사는 신태원에게 인사를 한 후 물러갔다.
"앉게나."
"감사합니다."
강주혁은 신태원의 맞은편에 마주 앉았다. 강주혁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의 왼팔로 향했다. 입고 있는 도복이 그 부분만 푹 꺼져 있었다.
"걱정 말게. 아직 검은 휘두를 수 있으니까."
검을 휘두르는 오른팔은 아니지만, 왼팔이 없는 것도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다시는 예전처럼 검을 휘두르지 못할 것이다.
"이제 죽을 일만 남은 노인네인데 팔 한 짝이 없으면 좀 어떤가?"
신태원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평생을 의식하고 지내던 경산마존이 사라져서 그런지 오히려 홀가분하게 보였다.
듣기로는 회사 일도 신대길 부회장에게 거의 다 넘겨준 후 집에만 있다고 들었다.
"안 그래도 자네를 한번 부르려고 했네."
강주혁이 묻은 얼굴로 쳐다봤다. 신태원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은 후 대성이가 받아야 할 몫을 전부 자네에게 물려주기로 했네."
"네?"
강주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감사의 의미로 생각하면 좋겠군. 자네가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었을 거야. 이윤철 사장에다가 자네까지 죽었으면 태원공략이 무너져 내렸겠지."
권대호가 물려주기로 한 주식에다가 신태원이 줄 주식까지 합치면 태원그룹 전체를 손에 넣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마 신태원도 그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제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죽거나 다친 사람들에 대해서 강주혁은 언제나 죄인의 심정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를 끝장냈다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큰 보상을 받게 되었다.
성공에 대한 열망, 신 씨 집안의 모든 걸 빼앗겠다는 복수심으로 여기까지 온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이루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치면 나 역시 죄인이네. 따지고 보면 내 아들이 저지른 일 아닌가."
강주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졌다.
신태원은 그런 강주혁을 묵묵히 기다려 줬다.
"회장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말하게."
"신대성 전 부회장이 저희 집안을 망하게 했을 때 왜 처벌하지 않았습니까?"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