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제가 꼭 끝낼게요
‘잠깐.’
동굴을 벗어나려고 하던 강주혁은 발걸음을 멈췄다.
‘이게 다가 아닐 수도 있지.’
이 동굴은 무극검의 구결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할아버지가 임종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뭔가 남겨놓지 않았을까?’
할아버지가 언데드가 된 상태로 이곳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가짜로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몰래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안에서 언데드가 되었을 것이다.
‘강령술을 사용하기는 했구나.’
마(魔)를 강박적으로 두려워했던 할아버지가 더 큰 마를 막기 위해서 마를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하자 쓴웃음이 나왔다.
강주혁은 야광석을 들고 다니면서 동굴 안을 샅샅이 뒤졌다.
이미 신대성이 다녀갔으니 남아 있는 게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대성은 제한된 시간 동안 구결을 베껴야했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동굴은 무척 넓기도 했다.
‘있다!’
강주혁의 예상대로 동굴 한구석에 비닐로 된 보자기가 하나 있었다. 안에는 두꺼운 노트가 두 개 있었다.
‘비급?’
첫 번째는 룬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노트였다. 룬 문자 사이의 여백에 한글로 주석을 달아놓은 게 보였다.
‘무극검을 옮겨 적은 건가?’
강주혁은 야광석의 빛에 의지해서 한참을 읽어나갔다.
동굴 벽에 있는 룬 문자하고는 많이 달랐다.
‘이건?’
노트를 쥔 강주혁의 손에서 자꾸 땀이 났다.
노트의 정체는 사신무극검의 마지막 줄기이자 완성인 현무검의 비급이었다.
‘여기에 있었구나.’
아버지가 할아버지 몰래 만들었다던 비급이 할아버지의 유품 중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김동훈은 비급을 만들려고 했던 아버지와 그걸 막으려던 할아버지 사이에 신경전이 상당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걸 빼앗은 건가?’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무극검에 대한 할아버지의 생각과 고집을 감안한다면 이걸 태우지 않고 남겨두었다는 게 상당히 이상해 보였다.
‘흠…….’
강주혁은 비급의 마지막에 가서야 할아버지가 이걸 남겨놓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꼼꼼히 읽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끝에 가서 생각이 꼬여버린 것인지 완전한 매듭을 짓지 못한 것이다.
‘애초에 현무검을 완성하지 못하셨구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무검은 완성되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완성해 놓고 옮겨 적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미완성 판본을 없애지 않고 가지고 있는 걸로 봐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론상 현무검까지 있어야지만 무극검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할아버지가 비급을 만드는 일에 반대하신 것도 어쩌면 사신무극검 자체가 미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청룡검과 현무검도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권대호의 세심한 지도가 없었다면 강주혁도 위험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복수를 단념한 것도 사신무극검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상태로 계속해서 싸워나가다가 할아버지처럼 될 수도 있으니까.
‘제가 꼭 완성하겠습니다.’
강주혁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걸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는 다음 노트를 펼쳤다. 여기에는 룬 문자 대신 한글이 적혀 있었다.
‘일기?’
할아버지가 남긴 글들이었다.
일기라고는 하나 대충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쯤부터 적은 것들이었다. 삶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쓴 글 같았다.
분량이 제법 많았기에 꼼꼼하게 보는 건 나중에 하기로 했다. 빠르게 훑다가 흥미로운 내용이 나올 때만 멈췄다.
『장담컨대, 마석훈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나는 그가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는 걸 여러 번 봤다. 하지만 그는 매번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부활했다.』
마석훈. 블랙 헌터의 교주. 토벌 작전에서 강주혁과 싸울 때 강주혁을 자극하기 위해서 김동훈의 얼굴을 하기도 했었다.
‘살아 있을 것 같군.’
그때도 그전까지 보여주던 강함에 비해서 너무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정말로 죽은 건지 의심스러웠다.
할아버지가 남긴 말들을 보니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갔을 것 같았다. 아마 김동훈 역시 마석훈의 숙주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마석훈에게 지배를 당하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인 것 같다. 첫째는 그와 모종의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다. 마석훈에게 특별한 힘을 부여받는 대신에 그가 필요로 할 때 그릇이 되어주는 것이다. 블랙 헌터 내에도 그런 자들이 여럿 있었고 마석훈은 매번 그들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해왔다.』
두 번째 부류에 대한 이야기는 한 달 후에야 이어졌다.
게다가 글씨 모양도 좀 달라져 있었다. 같은 사람이 쓴 것이지만 감정이 실려서인지 필체가 비뚤비뚤했다.
『둘째는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자다. 나 또한 젊은 시절, 무극검의 부작용으로 이성을 잃었다가 마석훈의 노예가 되었다. 끔찍한 점은 이지를 상실했다가도 그의 노예가 되는 순간, 오히려 의식을 되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내 몸을 이용해 저지른 짓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가 내 손으로 사람들을 죽일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저 강해지는 것만을 원했을 뿐이었는데 마석훈으로 인해 꼭두각시 살인마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할아버지가 느꼈을 분노와 무력감이 글에서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았다.
『마석훈은 죽었지만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의 몸에 기생한 채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극검을 완전히 익힌 자가 나타나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리라. 무극검을 익힌 사람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효과적인 무기니까.』
할아버지의 예측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안타깝게도 마석훈이 김동훈이라는 탈을 쓰고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는 건 알지 못했지만.
『무극검은 절대 배워서는 안 된다. 다른 방식으로 이성을 잃는 건 괜찮다. 그런 사람을 지배해 봤자 큰 힘을 못 쓸 테니까. 하지만 무극검은 다르다. 무극검만 익히면 F급 헌터도 S급 헌터를 능가할 수 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성을 잃게 된다. 마석훈은 그걸 노리고 있다.』
할아버지는 무극검 탓에 이성을 잃고 살육을 벌였던 걸 한스러워했다. 그런 할아버지가 스스로 이성을 포기하고 언데드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극검이 유출을 막고 싶으셨던 것이다.
‘머저리 같은 놈.’
지금 신대성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신대성은 그저 마석훈의 장기 말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무극검을 익히게 되었다면서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에게 닥칠 운명도 모른 채.
『무극검이 새겨진 바위를 없애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 바위에 걸려 있는 주문은 인간에게 알려진 방법으로는 깰 수 없는 것 같다.』
강주혁은 룬 문자가 새겨진 바위를 봤다.
무극검이 세상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했다면 저 바위를 부숴 버리면 된다. 할아버지의 능력이라면 어려운 일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건 저 바위가 애초에 파괴불능이란 얘기다.
『마석훈의 진정한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그는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힘이나 실체를 본다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일례로 마석훈은 던전의 몬스터들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 약한 몬스터들은 그를 보자마자 복종한다. 강한 몬스터들조차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굴복시킬 수 있다.』
강주혁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마석훈이 가진 능력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이레귤러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레귤러라고 할지라도 공허진처럼 다른 헌터들과 공유하는 부분들이 있어야 한다. 공허진은 영력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힐러들과 같지만 성장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른 케이스다.
하지만 마석훈이 가진 능력은 유사한 것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특이했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마석훈의 진정한 목적도 모른다. 블랙 헌터도 그에겐 그저 수단에 불과했다. 그간의 행보로 보건대, 결코 이 세상에 이롭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마석훈을 완전히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역설적이게도 그 희망을 찾은 곳은 무극검에서였다.』
강주혁은 사신무극검을 떠올렸다.
무극검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쩌면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극검은 죽음마저 초월해버린 마석훈이 두려워하는 유일한 검술이다. 그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극검을 배우기를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무극검의 힘을 필요로 했다. 무극검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의 영혼까지 벨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극검으로 인해 생긴 상처는 영력으로도 회복이 안 된다. 영력을 이용한 부활도 불가능하다.』
강주혁은 할아버지와 싸우다가 죽어간 수많은 사람을 떠올렸다. 강주혁 역시 상처를 회복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영혼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는 무극검이라면 분명 영체상태인 마석훈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무극검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경지에 이르면 마석훈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극검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다음 일기는 또 한참 후에서 적혀졌다.
『민혁이의 도움까지 받았지만 사신무극검을 완성할 수 없었다. 민혁이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민혁이가 이 동굴을 계속 지켜주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다. 무극검의 유혹에 빠져서 나 같은 괴물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아버지가 느꼈을 절망감과 답답함을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죽음이 임박해왔다. 무극검은 나와 함께 영원히 봉인될 것이다. 무극검을 얻지 못하면 마석훈이 돌아온다 할지라도 이전처럼 활개를 칠 수 없을 것이다. 동굴을 지키고 사신무극검을 완성하는 일은 민혁이에게 남겨놓았다. 만약 사신무극검을 완성할 수 없다면 전부 폐기하라고 일러두었다. 미완의 사신무극검은 무극검만큼이나 위험하니까. 하나뿐인 아들에게 이렇게 가혹한 운명을 물려준 것이 미안했다. 귀여운 손자들 역시 그 운명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내 죄를 짊어지고 살아야 할 아이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다.』
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강주혁도 울컥하는 심정이 되었다.
이 일기 덕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 것 같았다. 할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도 가신 것 같았다.
‘제가 꼭 끝낼게요.’
강주혁은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무검 비급과 일기장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 * *
일주일 전. 광야.
"팀장님, 저기 좀 보세요."
영광공략 소속의 헌터들이 공략을 진행하던 중 한 남자를 발견했다.
"헌터?"
복장을 보아하니 평범한 헌터인 것 같았다.
"저 사람 그 사람 아니에요?"
"누구?"
"강주혁이잖아요. 태원공략 슈퍼스타."
요즘 헌터 업계 사람치고 강주혁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강주혁은 유명해진 상태였다.
"어? 진짜네?"
"태원공략 사람이 여기에 왜 있지?"
"길을 잃었나?"
"에이, 설마? 저 나이에 이사까지 올라간 사람이 길을 잃는다고?"
"일단 한 번 가보자."
헌터들은 강주혁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강주혁이 일행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눈동자가 피처럼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피부가 시체처럼 창백했다.
"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서걱!
선두에 있던 헌터의 목이 날아갔다.
"으아아악!"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다른 헌터들이 비명을 질었다.
"죽어라."
강주혁으로는 보이는 존재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공격해!"
헌터들도 곧장 반격에 나섰다.
캉! 서걱!
"으아악!"
하지만 평범한 공략팀이 강주혁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푹!
"팀장님!"
강주혁의 검이 팀장의 배를 꿰뚫었다.
"도, 도망쳐……."
팀장은 그 말만을 남긴 채 고꾸라졌다.
"이 살인마 새끼!"
살아남은 둘 중 하나는 팀장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강주혁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인 신입사원은 팀장의 말대로 줄행랑을 쳤다.
서걱!
"컥!"
강주혁에게 덤볐던 헌터가 쓰러졌다. 두 개로 나눠진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강주혁은 곧장 신입사원을 쫓아가려고 했다.
"그만."
그때, 숲에서 교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신대성의 비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만하면 됐다."
강주혁의 탈을 쓴 도플갱어가 교주에게 머리를 숙였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