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반드시 막아야 한다
"음?"
무극검 구결이 새겨진 동굴을 봉인한 후 게이트 밖으로 나온 교주와 신대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이 일대를 아우르고 있던 거대한 기운이 사라졌다.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경산마존이…… 죽었군요."
항상 자신만만하고 여유가 넘치던 교주가 처음으로 당혹스러워했다.
"불가능한 일이다."
신대성도 경산마존과 직접 마주했다.
신대성은 그와 싸운다면 일합도 못 버티고 찢겨 죽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만큼 경산마존은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한국최강으로 알려진 아버지가 온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아버지 역시 한 번도 경산마존을 능가한 적이 없었으니까.
"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경산마존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강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다.
"설마…… 아버지인가?"
신대성은 복잡한 마음으로 근처에 있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한계를 뛰어넘어 경산마존을 베었을 수도 있다. 신대성은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껴야할지 절망감을 느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를 뛰어넘고 인정을 받기 위해 아버지도 어찌하지 못했던 존재의 힘을 빌렸다.
만약 아버지가 그 존재를 넘어서 버렸다면 지금까지 저지른 일들은 헛짓거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가봐야겠다."
"가봤자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겁니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한다."
"그럼 저는 빠지겠습니다."
"뭐라고?"
"만에 하나 제가 의심을 사게 된다면 당신도 곤란해질 겁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비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비서에게 관심을 가지는 상황 자체를 피해야 한다.
"알겠다."
"그럼 서울에서 뵙도록 하죠."
교주는 그 말만 남기고 훌쩍 떠나버렸다. 신대성은 초조한 마음으로 언덕을 올랐다.
한 편으로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아버지가 살기를 바랐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맙소사.’
신대성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전율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수십 명의 시체였다.
신대성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백여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별다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놈은 또 언제 온 거지?’
한쪽 팔을 잃은 신태원이 강주혁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생존자들 중에는 권대호와 이윤철도 보였다. 팔을 잃은 하진호 회장이 누워 있는 박종근 회장을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복판에 두 동강이 난 경산마존이 보였다. 경산마존의 몸을 가른 검은색의 대검이 바닥에 꽂혀 있었다.
신대성은 부하들의 보고를 통해 저 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강주혁.’
신대성이 경멸하던 벌레가 경산마존을 쓰러뜨린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강해진 거냐?’
강주혁이 불세출의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건 신대성도 안다.
회사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무극검에게 다가가려던 자신의 계획을 모두 망가뜨린 것도 강주혁이었다.
강주혁은 경산마존의 손자이기도 하다. 사신무극검을 계승하는 자이기도 하고. 그의 강함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설익은 열매다. 나이를 감안한다면 경산마존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결과는 달랐다.
‘빌어먹을.’
자신은 나이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강주혁은 나이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강주혁을 보면서 신대성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시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철저하게 감춰야할 때다.
"아버지!"
신대성은 막 아버지를 발견한 사람처럼 달려갔다.
"네 놈이……."
신태원은 눈을 부라리면서 살기를 피어 올렸다. 팔을 한쪽 잃었지만 특유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다른 생존자들도 못마땅한 눈으로 신대성을 쏘아보았다.
신태원은 곁에 있던 강주혁을 천천히 밀어낸 후 자신의 힘으로 섰다. 강주혁은 신태원이 옆에 있는데도 살기를 드러냈다.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것이냐?"
신태원이 노기를 띤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께서 피해 있으라고 해서 마을에 있었습니다. 팔은 어쩌다……."
"몰라서 묻는 것이냐?"
"치료부터 하시죠."
신대성은 가지고 있던 치유 물약을 꺼냈다. 물약을 꺼내는 손이 덜덜 떨렸다.
탁!
신태원은 아들이 내민 물약을 손으로 쳐서 날려 버렸다.
"아버…… 컥!"
신태원이 신대성의 목을 틀어쥐었다. 신대성은 아버지의 손목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아등바등 거렸다.
"이번 일에 대해서 모든 걸 밝혀야 할 것이다. 한 줌의 거짓도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으, 읍……."
신대성은 발버둥만 칠 뿐, 대답하지 못했다.
휙!
신태원이 신대성을 집어던졌다. 그는 시신들 사이에서 나뒹굴었다.
"저들은 네가 죽인 것이다. 이 놈아."
신대성을 바라보는 신태원의 눈에는 회한과 울분이 가득했다.
* * *
경산마존이 완전히 소멸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무척 비쌌다. 대형 공략회사의 회장들과 헌터 관리국 소속 헌터를 포함해서 32명이 죽었고 5명의 중상자가 나왔다.
대현그룹의 박종근 회장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경산마존에게 입은 상처는 어째서인지 치유 물약과 영력을 이용한 치료가 통하지 않았다. 그걸 낫게 하는 건 전적으로 피해자 자신의 재생력뿐이었다.
자상과 신체 절단을 겪은 사람들은 응급처치로 출혈을 막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를 크게 다친 박종근 회장은 결국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대형 공략회사 회장들이 단체로 사망하는 일이 생기자 세상이 또 한 번 발칵 뒤집어졌다.
하지만 경산마존의 추종자가 생기는 것을 우려한 정부는 진실을 덮기로 했다. 헌터들은 경산마존이라는 한 인간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신종 몬스터에게 당한 것으로 공표되었다. 경산마존도 언데드 상태였기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대피했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기에 진실을 은폐하는 건 쉬었다.
생존한 헌터들도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는 데 동의했다. 간신히 뿌리를 뽑은 블랙 헌터들이 다시 나타나는 건 그들도 원하지 않았으니까.
강주혁도 할아버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정부와 다른 헌터들의 결정에 동의했다.
그렇게 진실을 덮기는 했지만 여론은 쉽게 잠잠해지지 않았다. 신대성이 게이트 안으로 데리고 간 사람들까지 합치면 하룻밤 사이에 백여 명의 헌터가 사망했다.
게다가 그중에는 한국의 헌터들 중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들이 죽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가 다음에 또 나타난다면 한국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
대중이 몬스터의 정체를 몹시 궁금해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정부는 더 큰 혼란을 야기하지 않기 위해서 끝까지 비밀을 엄수했다.
태원공략은 신태원의 지시에 따라 다른 대형 공략회사들에게 막대한 피해보상을 해줬다. 구체적인 보상의 내용과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태원공략이 큰 손해를 감수한 것만은 분명했다.
회장들이 태원공략이 관리하던 게이트에서 발생한 일을 수습하다가 변을 당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더라도 도의적으로 그렇게 하는 게 옳았다.
갑작스러운 회장의 부재는 각 공략회사와 그룹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회장이 미리 준비를 해놔서 착실하게 승계가 이루어진 곳이 있는가 하면 공석이 된 회장 자리를 놓고 내홍을 겪는 곳도 있었다.
신대성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공식적인 직함이 없는 상태에서 헌터들을 움직였고 그로 인해 비극이 생겼다.
신대성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태원공략의 주가도 떨어졌다. 같은 이유로 인해 사장인 이윤철의 입지도 좁아졌다.
신태원 회장은 신대성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을 것이며 부자의 연도 끊겠다고 공표했다. 태원그룹 내에서도 헌터업계 내에서도 신대성이 설 자리는 없었다.
몇 주 후, 일이 일단락되자 강주혁은 신태원 회장에게 요청해 경산의 게이트를 다시 찾았다.
이미 헌터관리국의 주관하에 진행된 공식적인 조사가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강주혁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신대성은 히든 피스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경산마존이 나타나 교전을 벌였고 자신과 비서를 제외한 전원이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그 히든 피스가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히든 피스를 발견한 헌터들이 모두 죽어 버렸으니까.
신대성도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저 자기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한 헌터들이 아주 중요한 발견이 있다면서 자신을 데리고 가던 중에 변을 당했다고만 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도 신대성의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뭐였을까?’
강주혁은 할아버지가 나타난 최초의 장소를 둘러보았다.
당연히 시신은 모두 정리되었다. 공략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주혁은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음?’
그렇게 한참을 뒤지던 중, 발아래에서 미약하지만 낯익은 느낌이 전해졌다.
몬스터가 뿜어내는 살기나 마력은 아니었다.
오히려 용의 길에 속한 제단의 힘과 사신무극검이 공명하는 것과 비슷했다.
‘지하에 공간이 있다.’
강주혁은 바닥에 손을 짚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지하에 있는 무언가가 강주혁을 부르고 있었다.
강주혁은 주변을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살펴봤다. 지하에 공간이 있다면 그리로 들어가는 통로도 있을 것이다.
‘이쯤인가?’
강주혁은 느낌이 오는 곳을 조금씩 파보기 시작했다. 만약을 위해서 챙겨온 야전용 삽이 도움이 되었다.
캉! 캉!
‘바위?’
흙을 좀 파내려가니 제법 단단한 바위가 보였다. 강주혁은 내공을 써서 바위를 부순 후 조각들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밑에서 또 다른 바위가 나타났다.
‘산 넘어 산이군.’
만약 지하에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냥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위 하나만큼 내려가니 미약했던 기운이 조금이나마 강해진 게 느껴졌다.
‘계속해 보자.’
강주혁은 반나절 동안 바위를 부수고 끄집어내면서 지하로 내려갔다.
걔 중에는 사람만한 바위도 있었다. 그런 바위를 부수고 끄집어내는 작업은 S급 헌터에게도 상당히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강주혁은 특유의 끈기를 발휘해서 작업을 계속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강해지는 기운이 용기를 북돋아 줬다.
‘찾았다.’
마침내 바위를 드러낸 자리에서 빈공간이 나타났다.
강주혁은 야광석을 든 채로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 공간은 강주혁의 예상보다 넓었다.
강주혁을 이곳으로 인도했던 기운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느껴졌다.
‘저건?’
강주혁은 석벽 위에 새겨져 있는 룬 문자들을 보았다. 그는 홀린 듯 그것들을 읽어 내려갔다.
글귀 자체에 음험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내용을 음미하는 게 아니라 그저 따라 읽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군데군데 낯익은 문장들이 보였다.
‘이건…… 무극검이다.’
사신무극검이 있기 전에 무극검이 있었다. 사신검은 무극검의 힘을 다스리기 위해 추후에 고안된 것이다.
그럼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무극검을 익혔을까? 예전보다 품어왔던 질문이었다. 당연하게도 강주혁은 이 던전을 의심해왔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이 던전을 끼고 살아왔으니까.
그래서 예전부터 이 던전을 샅샅이 뒤져보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도 명분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던전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이사가 되었다. 때마침 신대성이 초대형 사고를 쳐서 조사의 명분까지 생겼다.
‘그놈이 이걸 찾았었구나.’
강주혁은 신대성이 그동안 이 던전에서 무엇을 찾아왔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이게 세상에 드러나는 걸 두려워해서 지키고 있었고.’
그리고 이 동굴이 할아버지의 진짜 무덤이라는 걸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과오를 책임지기 위해서 죽어서도 파수병으로 남은 것이다. 신대성은 그런 할아버지를 자극해서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고.
‘우리가 싸우는 동안 이걸 베꼈을 테지.’
전투가 끝나자 슬그머니 나타난 신대성이 떠올랐다. 애초에 신태원 회장에게 연락해 업계의 원로들을 불러 모은 것도 그였다.
헌터들이 사투를 벌이는 동안, 자신은 무극검의 구결을 옮겨 적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신태원과 원로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신대성은 경산마존에게 죽었을 것이다.
‘쓰레기 같은 새끼.’
강주혁은 욕망을 위해서 자기 아버지까지 사지로 몰아넣은 신대성을 저주했다.
‘그 놈이 이걸 익히면 곤란한데.’
무극검은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힘을 주는 대신에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검술이다.
신대성이 이걸 완전히 익히게 된다면 제 2의 경산마존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미 사회적으로 몰락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컸다.
‘반드시 막아야한다.’
강주혁은 결의를 다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업보와 염원이 그의 영혼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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