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있습니다
강주혁이 이윤철과 헬기를 타고 경산으로 향하기 두 시간 전.
"이 개자식이!"
게이트에서 나온 신대성은 곧바로 비서, 아니, 교주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여기까지 나올 수 있었던 건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언데드가 되어서인지 경산마존은 생각만큼 빨리 반응하지 않았다.
신대성이 줄행랑을 치는 데도 느긋한 걸음으로 따라왔다. 그렇게 느긋하게 걷는데도 어떻게 된 건지 보법까지 써가면서 달아나는 신대성의 시야에서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만약 경산마존이 조금만 더 공격적으로 나왔다면 신대성은 분명 던전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신대성은 악다구니를 썼지만 교주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원하는 것은 얻지 않았습니까?"
신대성은 교주의 턱을 갈기기 위해서 손을 들었으나 뭔가에 걸린 듯이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교주가 염동력을 이용해 신대성의 팔을 옭아맨 것이다.
"이 새끼가……."
신대성은 결코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무극검의 구결만 확인하기를 바랐다.
봉인이라는 것도 경산마존이 걸어놓은 마법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 안에 언데드가 된 경산마존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혀 의도하지 않게 세상에 거대한 재앙을 풀어놓은 것이다.
"모친을 죽인 자이지 않습니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교주가 히죽거렸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마각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경산마존을 저렇게 만든 건 네놈인가?"
"그럴 리가요. 경산마존도 한 때 블랙 헌터였습니다. 한창 때는 저보다 더 지독한 인간이었죠. 강령술 정도는 우습게 다루던 인간입니다. 아마 무극검이 유출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스스로 파수병이 된 모양입니다."
"그놈이 나오면 끝장이다."
"제 냄새를 맡았으니 분명 밖으로 나올 겁니다. 우리 둘의 악연이 아주 질기니까요."
교주는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어쩔 셈이냐?"
"회장님을 부르십시오. 회장님과 동급의 강자들은 있어야지 시간을 끌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을 끌어?"
"다른 사람들이 경산마존의 시선을 끄는 동안, 몰래 게이트로 들어가서 무극검의 구결을 옮겨 적는 겁니다."
"허……."
황당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신대성은 교주를 때리려고 들었던 팔을 내렸다.
"나더러 아버지를 사지로 몰아넣으라는 말이냐?"
"어머님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신대성은 아버지와 경산마존 사이에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동급으로 분류되던 아홉 명이 함께 했는데도 겨우 한 방을 먹인 게 전부였다. 그 한 방을 위해 다섯이 죽었다.
살아남은 다섯 중 한국에 있는 사람은 셋뿐이다. 그 외에도 대형 공략회사의 회장들이 있기는 하다. 그들 역시 뛰어난 실력자이긴 하지만 과거의 전설들만큼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이제 좀 솔직해지시죠. 회장님이 사라지기를 바라셨던 것 아닙니까?"
"……!"
신대성은 어금니를 부서질 정도로 꽉 물었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그는 교주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기 성에 안 찬다고 아들에게 모멸감만 주던 잔인한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겠다고 발버둥 쳤던 세월들. 결국은 아버지가 저주해 마지않던 미친놈들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인생이 엉망으로 꼬여버렸다. 어쩌면 처음부터 엉망으로 태어난 것인지도 몰랐다.
"잘 생각하십시오. 회장님이 여기서 돌아가시면 그룹이 누구 손에 들어가는지."
"대길이 손에 들어가겠지. 아버지는 이미 나를 포기했다."
"신대길 부회장은 헌터가 아닙니다. 회장님이 헌터도 아닌 사람이 그룹을 이끌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랬다가는 알짜배기인 태원공략이 이탈해버릴 텐데요? 한동안은 이윤철 사장이 이끌고 있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다은이가 이끌겠지."
"회사를 다니지도 않던 아가씨가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나 당신 동생들이나 회장님 성에 안차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건 없습니다. 결정된 게 없는 상황에서는 장자에게 가장 큰 권리가 주어지겠죠."
교주의 입에서 마치 뱀처럼 쉭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잔인하지만 달콤한 말들이었다.
"게다가 이제 당신에게는 무극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만 있다면 헌터 업계를 쥐락펴락하는 건 간단한 일이 될 겁니다. 지금 강주혁을 보십시오. 반쪽짜리 무극검으로 얼마나 많은 걸 이뤄냈는지."
신대성이 이게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원그룹은 마땅히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네놈이 원하는 건 뭐지?"
"여러 차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태원그룹의 회장이 되면 덕 좀 보려는 거죠. 블랙 헌터에게도 돈이 많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마약을 팔아서 돈을 버는 데에는 한계가 있죠. 회장이 되면 당신의 더러운 손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용돈만 두둑하게 챙겨주시면 뭐든지 해드리죠. 당신은 양지에서, 저는 음지에서 상부상조하면서 이 세상을 주무르는 겁니다. 지금까지 그랬듯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될 겁니다."
신대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면 당신 동생들에게 모든 걸 내어주고 평생 죄인으로 사시지요. 어쩌면 강주혁 그놈에게 빼앗길 수도 있겠군요. 정당한 당신의 몫을."
신대성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강주혁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찮은 벌레라고 생각해서 내버려 뒀는데 어느 틈엔가 두각을 드러내더니 모든 일을 망쳐 버렸다.
자신이 이 나락으로 떨어진 데에는 강주혁의 역할이 컸다. 만약 자신이 물려받아야 할 유산들 중 일부라도 강주혁에게 넘어간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좋다."
결국, 신대성은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포기했다.
"현명한 결정입니다. 어서 회장님께 연락을 드리시죠. 그리고 게이트 근처에 숨어 계시다가 경산마존이 게이트에서 멀어지면 들어가서 구결을 적어 오십시오. 그동안 제가 경산마존을 유인해 보겠습니다."
"네놈이?"
"파트너인데 도움을 드려야죠. 저도 그 미친 노인네를 상대로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신대성은 교주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에게 사실을 알렸다.
교주에 대한 이야기는 뺐다. 이곳에 있는 헌터들이 히든 피스의 발견을 알렸고 들어가서 확인하다가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헌터들을 죽인 것도 경산마존이라고 했다.
신태원은 전화기를 박살낼 것처럼 노발대발하더니 자리를 피하라는 얘기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신대성은 이미지를 회복할 심산으로 인근 마을의 사람들을 깨워서 대피시켰다. 그리고 게이트가 보이는 산에 몸을 숨겼다.
‘……왔다.’
헌터들이 도착하기 전에 경산마존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 기운을 풍기면서.
경산마존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건 그가 무극검의 구결이 세상에 퍼지는 걸 막기 위해서 스스로를 언데드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언데드는 주인이 내린 명령을 따른다. 아마 경산마존은 죽기 전에 자신의 육신에게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니 경산마존이 자신이 지키던 동굴을 벗어나 게이트 바깥까지 나온 건 이례적인 일이다. 아무래도 교주의 존재가 큰 영향을 준 것 같았다.
파지직!
교주는 곧바로 경산마존에게 마법을 날렸다. 그리고는 교전을 피하면서 계속 달아났다. 경산마존은 그를 쫓다가 게이트로부터 멀어졌다.
신대성은 서둘러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 * *
콰쾅!
지면과 충돌한 헬기가 폭음을 내면서 화염에 휩싸였다.
간발의 차이로 헬기에서 뛰어내린 강주혁과 이윤철은 숲의 나무들을 부수면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쿵!
"으으."
"괜찮나?"
이윤철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강주혁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 사장님은 괜찮으신가요?"
"나도 괜찮네."
호신강기로 낙하충격을 상쇄하기 위해서 내공을 많이 소모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만약 S급 헌터가 아니었다면 추락한 헬기와 함께 산화했을 것이다.
"조종사 가족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윤철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종사는 추락하기 전에 사망했다. 지상에서 던진 투창에 머리가 꿰뚫린 것이다.
그냥 투창이 아니라 내공이 실린 내공이었다. 그래서 그냥 박히는 게 아니라 헬기에 커다란 구멍을 내 버렸다.
"희생자가 더 나오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동감이네. 서두르지."
길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경산마존과 그를 저지하기 위해서 모인 헌터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두 사람은 산길을 따라서 부지런히 달렸다.
챙! 캉!
전투의 소음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강주혁의 불안감과 절망감도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
"저깁니다!"
이윤철과 강주혁은 이내 싸움터에 도착했다.
위치상으로는 산 중턱인데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모두 타버리거나 날아가 버린 것이다. 곳곳에 땅이 파헤쳐진 자국이 있었다. 불이 붙어 있는 곳도 있고, 꽝꽝 얼어 있는 곳도 있었다.
다섯 명이 한 사람을 포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핏 봐도 다섯 사람은 그 한 사람에게 완전히 압도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곳곳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린 수십 명의 사람이 보였다. 헌터 관리국 관계자들과 공략회사의 회장들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
주변보다 높은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자신을 둘러싼 헌터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할아버지가 맞았다.
피부도 잿빛이고 눈도 흰자만 남아있어서 산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으나 얼굴도 옷도 전부 강주혁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할아버지는 강주혁 앞에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진면모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강주혁은 지금껏 할아버지가 그저 평범한 헌터인줄 알고 살았다.
하지만 죽음에서 돌아온 할아버지는 강주혁이 지금까지 만난 어떤 존재보다 강렬한 기운을 풍겼다. 마주 서는 것만으로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그런 기운이었다.
"회장님!"
이윤철은 생존자들 중에서 신태원을 찾아냈다.
"이 사장? 무사해서 다행이네."
신태원이 고개를 반만 돌린 채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아직 견딜 만하네."
신태원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른 사람들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홀로 무기도 없이 대치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스승님?"
"빨리도 왔구나. 이 썩을 놈아."
권대호가 슬쩍 뒤로 돌아보면서 웃었다.
신태원의 연락을 받고 온 것 같았다. 완전히 연을 끊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이런 중대사를 외면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네 눈엔 괜찮아 보이느냐? 이놈아. 아주 죽을 맛이다."
권대호의 새하얀 수염은 입에서 흘린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저벅. 저벅.
권대호 옆에 있던 두 사람이 경산마존의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한 사람은 대현그룹의 박종근 회장이었고 그를 부축하고 있는 건 헌터 관리국의 김철수 주무관이었다.
박종근은 배를 움켜잡은 채 숨을 급하게 몰아쉬고 있었다.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았다.
마지막 한 사람은 블랙 헌터들과 결전을 벌일 때 화염 마법으로 입구를 뚫어준 영광그룹 하진호 회장이었다.
그 역시 한쪽 팔이 없었다.
"회장님 팔이……."
"이미 늦었네. 신경 쓰지 말게."
하진호 회장은 덤덤하게 말했다.
"박 회장이랑 하 회장은 뒤로 빠져야겠군."
신태원이 말했다.
"지금부턴 저희가 나서겠습니다."
이윤철이 검을 뽑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그가 뿜어내는 기세도 만만치 않았으나 경산마존의 그것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혼자서는 안 되네. 저 자에게는 나나 자네나 똑같이 한 합이면 충분하니까. 협공을 해야 하네."
"협공을 펼칠 때마다 한 명씩 죽어 나갔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안 맞으면 모두 죽게 될 거다."
권대호가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강주혁도 검을 고쳐 잡았다.
"강주혁 이사."
"네. 회장님."
"비장의 수가 있기를 바라네."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는 게 아니라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만약 강주혁에게 그런 게 없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을 것이다.
"있습니다."
"좋아. 기회를 만들어 주지."
"네. 회장님."
"가세."
아직까지 싸울 수 있는 다섯 사람이 동시에 경산마존을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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