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투창이었습니다
"엄청 높군요."
신태양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거대 골렘이 기대고 있는 산을 깎아 만든 계단은 거의 사다리 수준으로 가팔랐다. 그리고 그 수가 거의 2백 개가 남았다.
"들어갑시다."
계단의 끝에 도착한 강주혁은 앞장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몬스터는 없었다. 마법의 힘으로 타오르는 횃불들이 불을 밝혀주었다.
동굴은 디귿자로 꺾이면서 거대 골렘의 등 뒤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 벽이 흙에서 청동으로 바뀌었다.
"여기는?"
"골렘의 심장부인 것 같습니다. 설계도와 완전히 똑같군요."
원형의 방에는 정중앙 바닥에 쇠구슬 하나만 박혀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한번 건드려 볼까요?"
"그러시죠."
신태양은 검이 아니라 칼끝으로 구체를 툭툭 건드렸으나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신태양은 손으로 만져봤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걸로 해보죠."
파지직!
강주혁의 손에 전격이 감겼다. 그는 그 상태로 구체에 손을 얹었다.
우우웅.
구체에 노르스름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눈앞의 풍경이 달라졌다.
분지를 가득 덮은 브론즈 골렘이 내려다보였다. 키가 오거에 필적하는 브론즈 골렘이 장난감 병정처럼 보이는 걸로 봐서 아주 높은 곳인 것 같았다.
그리고 분명히 서 있는데도 등 뒤에 의자라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강주혁은 오른쪽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아니,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다.
툭! 쿠궁!
오른편에서 돌무더기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거대 골렘이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린 것이다.
‘잘 되는군.’
강주혁은 구체에서 손을 뗀다고 생각했다.
구체에서 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눈앞의 풍경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흥미롭군요."
회귀 전에 해본 거였지만 여전히 신기했다.
"뭔가요?"
"이걸로 거대 골렘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네?"
당연하게도 신태양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접 해보십시오."
강주혁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신태양은 구체에 손을 얹고 제단의 힘을 사용했다.
"여긴?"
"골렘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고개를 움직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되는군요."
"일어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쿵!
강주혁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산에 앉아 있던 거대 골렘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신기하군요. 마치 골렘에 빙의라도 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잘 됐군요. 이걸로 잔챙이들을 쓸어 버리죠."
거대 골렘의 신체 스펙이라면 다른 골렘들을 벌레 밟듯이 밟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강 이사님은 정말 소문대로 천재시군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피곤하시면 교대해드리겠습니다. 시작하시죠."
"알겠습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번갈아 가면서 거대 골렘을 조절했다. 그런 식으로 분지를 뒤덮고 있는 골렘들을 밟아 죽였다.
골렘들은 생명체가 아니었기에 달아나지도 않았다. 덕분에 거대 골렘은 쉽게 골렘들을 압살할 수 있었다.
몇 시간 동안의 파괴활동이 끝나자 분지에는 남아 있는 골렘이 없었다. 수만 마리의 골렘들이 만 하루 사이에 모두 파괴된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
마지막 골렘을 파괴했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천지를 울리는 것 같은 포효가 들려왔다.
"뭐, 뭐죠?"
신태양이 구체에서 손을 얹은 채로 말했다.
"뭔가가 깨어난 것 같군요."
울음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는 강주혁은 덤덤하게 말했다.
용의 길이란 용을 만나러 가는 길. 기나긴 여정의 끝에 마침내 최후의 용과 조우하게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만나는구나.’
회귀 전 경험했던 전투들 중에 가장 어려운 동시에 가장 영광스러웠던 전투.
지난번에는 실력이 모자라서 전투를 거드는 수준에서 그쳤다. 블랙 드래곤을 사냥하는 건 회장들을 포함한 임원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강주혁은 실력을 증명했고 드래곤 사냥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얻게 된다면 신태원을 능가하는 헌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직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만약 회중시계가 나온다면 강주혁은 미련 없이 과거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 실력과 지식으로 과거로 돌아간다면 더 빨리 원하는 곳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헌터들의 억울한 죽음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생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주변에 몬스터는 없습니까?"
"잠깐만요."
신태양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골렘을 조정해서 주변을 살피는 것 같았다.
"통로가 생겼습니다."
"통로요?"
"골렘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안 보이던 통로가 하나 생겼습니다. 산맥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통로 같군요."
분지에 있는 모든 골렘을 잡으면 비밀통로가 오픈되는 것이 이 지역의 숨겨진 트릭이다. 그 통로를 이용하면 회중시계를 가진 티아매트 급 블랙 드래곤에게 다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전에 산 아래에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마석 매장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
"왜 그러세요?"
"누가 조명탄을 쐈습니다."
"조명탄이요?"
"네. 이 지역의 진입로 쪽입니다. 가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네요."
두 사람은 골렘을 탄 채로 지역 외곽으로 이동했다. 움직임은 느렸지만 무지막지한 보폭 덕분에 금방 갈 수 있었다.
"그분들인데요?"
"누구요?"
"들어오기 전에 뵈었던 1부 3팀 분들이요."
"뛰어내릴 수 있도록 최대한 자세를 낮춰보죠."
신태양은 골렘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등에 있는 통로를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1부 3팀 사람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갑자기 거대 골렘이 접근하자 당황한 것이다.
"강 이사님!"
"……어떻게 거기서?"
사람들은 골렘에서 튀어나온 강주혁과 신태양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우리가 조정한 거예요."
"골렘을요?"
"네. 그보다 안 팀장님, 무슨 일 있어요?"
"비상 상황이에요. 회장님께서 지금 당장 강 이사님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요."
"회장님이요?"
"네. 경산 쪽 던전에 문제가 생겼대요."
뜻밖의 지명에 강주혁은 당황하고 말았다.
"무슨 문제인데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른 회사 회장님들도 전부 내려가셨대요. 헌터 관리국도 출동했고요. 이윤철 사장님께서 헬기를 준비해놓으셨어요. 복귀하는 대로 경산으로 내려오래요."
대형 공략회사의 회장들이라면 현재 한국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헌터들이다. 거기에다가 헌터 관리국까지 나섰다. 이건 공략회사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장소가 경산이다.
‘설마…….’
강주혁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경산에 있으면서 저 정도 인원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뿐이다. 하지만 강주혁은 그 존재가 눈을 감는 걸 직접 봤다.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차피 이곳의 공략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들어가서 마석 매장지를 확인하는 일은 다음으로 미뤄도 된다.
"어서 가시죠."
강주혁은 1부 3팀 멤버들과 함께 광야를 떠났다.
강주혁은 신태양과 함께 사장실로 이동했다. 이윤철은 완전 무장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사장님."
"무사해서 다행이군. 공략 잘하고 있는데 불러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이미 마무리 단계였습니다."
"벌써?"
"강주혁 이사가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덕분에 아주 쉽고 효율적으로 끝낼 수 있었습니다."
"꼼수를 썼을 뿐입니다."
강주혁의 말에 이윤철이 씩 웃었다.
"어떤 꼼수인지 들어보고 싶군. 하지만 지금은 더 바쁜 일이네."
"경산 쪽에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가면서 얘기하지. 태양 씨는 퇴근해도 좋네."
"저도 가겠습니다."
"회장님께서 강주혁 이사만 데리고 오라고 하셨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신태양은 약간 서운한 표정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혁은 이윤철을 따라 사장실을 떠났다.
"식사는 했나?"
"네. 던전에서 먹었습니다."
"밤새워서 일한 사람에게 곧바로 일을 시켜서 미안하군.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어쩔 수 없었네."
"괜찮습니다. 사장님."
이윤철은 강주혁을 옥상에 있는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은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을 떠났다.
난생처음 타보는 헬리콥터였지만 마음이 들뜨지는 않았다. 경산에서 보게 될 광경 탓에 착잡한 기분만 들었다.
"어젯밤에 경산에 있는 게이트에 문제가 생겼네."
"어떤 문제입니까?"
"그곳에 있는 헌터들이 던전에서 히든 피스 하나를 발견했네. 근데 그 친구들이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그 사실을 신대성 전 부회장에게 알렸다더군."
"신대성 전 부회장이요?"
강주혁은 인상을 굳혔다.
"그래. 부회장 재임 시절 양준기 전무를 통해서 유독 그쪽에 신경을 많이 썼네. 그곳에 있는 헌터들은 모두 양준기 전무의 줄을 타고 들어온 이들이야. 처음에는 왜 그러나 했는데 지금 보니 자네 집안의 유산을 노린 것 같더군."
표정을 보니 신대성에 대한 이윤철의 감정도 그다지 좋은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신대성이 전 부회장이라고는 해도 공략회사의 사장이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밑에 있는 헌터들을 멋대로 움직였다.
사장인 이윤철 입장에서 좋아할 수가 없었다. 지기인 신대길을 그렇게 만든 것도 있었고.
"어쨌든 연락을 받은 신대성이 그쪽 헌터들이 오밤중에 히든 피스를 찾으러 나섰다고 하더군. 자기 수행원까지 데리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급했던 모양이군요."
강주혁은 신대성이 블랙 헌터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근에 블랙 헌터들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어쩌면 그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뭔가를 찾은 것인지도 몰랐다.
"내 생각도 그러네. 어쩌면 나나 회장님께서 개입하기도 전에 선수를 치려는 것인지도 모르지."
"히든 피스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그래.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건드렸더니 자네 조부님이 나타났다고 하더군."
이윤철은 자기가 하는 말을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네? 제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10년도 더 된 일입니다."
"혹시 시신을 본 적이 있나?"
강주혁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어렸을 때였지만 처음 참석한 장례식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니요. 입관식을 안 했던 것 같군요."
유족이라면 당연히 입관식에 참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입관식 절차가 생략되었다. 당시에는 어리고 아는 것도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들은 얘기에 따르면 언데드랑 비슷한 상태라고 하더군."
"언데드요?"
"피부가 오래된 시체처럼 변했고, 이성이 없다고 하더군."
"누가 그렇게 만든 걸까요?"
시체를 조정하는 강령술은 엄격하게 금지된 기술이다. 그걸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자들은 블랙 헌터들뿐이다.
강주혁은 이번 일의 배후에 블랙 헌터가 있다고 확신했다.
"아직 모르네. 조정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고. 하지만 공격성이랑 실력은 살아생전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네. 자네 조부님이 신대성이 데려간 헌터들을 몰살시켰다고 하더군. 개인 수행원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육십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네. 신대성과 비서만 간신히 살아남았지."
강주혁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할아버지의 죄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왔는데 다시 수렁에 빠지는 것 같았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회장님들이 묶어놓고 있는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막지 못하면 한국의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다.
"음?"
그때, 이윤철과 강주혁이 거의 동시에 조정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방에서 전율이 일 정도로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회귀 전, 저 정도의 기운을 딱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그 주인은 용의 길 끝에 있는 블랙 드래곤이었다.
경산마존은 인간인 주제에 거의 티아메트 급 드래곤에 필적할 만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휘익. 파각!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뭔가가 강주혁과 이윤철의 옆을 스쳐갔다.
헬리콥터의 뒷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곳으로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닥쳤다. 기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윤철 사장과 강주혁은 서로를 마주 봤다.
"방금 봤나?"
"……투창이었습니다."
지상에서 던진 창이 헬리콥터를 관통해 버린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갑자기 헬리콥터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조심하게!"
두 사람은 다급히 벽에 달린 손잡이를 잡았다. 강주혁은 고개를 뻗어 조종석 쪽을 봤다.
조종사의 몸만 있고 머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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