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신 씨라고 다 똑같진 않구나
"아,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신태양은 강주혁이 알려준 방법대로 골렘을 잡지 않은 것에 대해서 사과했다.
"잡기만 하면 되죠.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검술이군요. 회장님께 배우신 겁니까?"
바위보다 단단한 브론즈 골렘을 한 방에 날려 버렸다. 약점을 공격한 게 아니라 다른 부위에 비해서 튼튼한 전면을 공격한 것이다.
"아니요. 회장님의 손자손녀들 중에 직접 검술을 사사받은 사람은 막내인 다은이뿐입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배운 걸 제멋대로 뜯어고친 겁니다."
신대성이 열등생이라고는 하나 장남인 만큼 큰 기대를 받았다. 당연히 검술교육도 철저하게 받았을 것이다. 본인이 그걸로 성공하지는 못해도 자식에게 물려줄 정도는 되었던 모양이다.
"훌륭한 검술입니다."
"과찬이십니다."
"계속 잡아볼까요?"
두 사람은 사냥을 계속했다. 숫자가 수만에 달해서 잡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수만 마리가 동시에 덤벼드는 게 아니라 근처에 있는 일부만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워낙 강해서 그것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갔다.
강주혁은 이걸 빨리 해결할 수 있는 꼼수를 알고 있었으나 신태양의 실력을 보고 싶어서 기다렸다.
"이러다가 1년은 걸리겠는데요."
반나절 정도 싸운 끝에 두 사람은 거의 백여 마리의 브론즈 골렘을 박살냈다. 하지만 수십 배가 넘는 골렘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신태양은 난감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딱히 지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더 이상 브론즈 골렘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잠깐 쉴까요?"
"네. 이사님."
두 사람은 골렘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지역외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거기에서 간단한 식사를 했다.
"태양 씨."
신태양은 강주혁에게 용건이 있는 것처럼 말했으나 아직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강주혁은 신태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네. 이사님."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지금 하시는 일을 회장님이나 아버님이 좋아하시나요?"
NGO에서 일해도 월급은 나온다. 하지만 액수가 크지는 않을 것이다.
평판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잠깐 다니는 것은 몰라도 그 이상은 손해다. 정말로 뜻이 있지 않은 이상 오래 하기 힘든 일이다.
신태양 정도의 실력이면 번듯한 공략회사를 다녀도 잘 될 것이다. 그 점이 커리어 관리에도 좋을 것이다.
"당연히 반대하셨죠. 지금도 반대하시고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가족들이 바라는 길로만 걸어가도 편하게 지내실 수 있었을 텐데요. 장손이시잖아요."
다른 재벌가의 장손이라면 그룹을 물려받는 게 확정이다. 신 씨 집안의 자제들 중에서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신태양은 엉뚱한 길을 걷고 있었다.
경쟁자인 신태훈은 몰락했고, 신유정은 분발하고 있으나 여전히 2퍼센트 부족하다. 검술에 있어서는 으뜸이라는 신다은은 회사 일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실력도 모자라지 않으니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황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태원그룹을 노리는 강주혁에게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싫었습니다."
"그렇군요."
신태양의 진솔한 답변에 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신태양은 씁쓸한 얼굴로 동상처럼 늘어서 있는 골렘들을 바라보았다.
삭풍을 맞으면서 서 있는 골렘들은 함께 모여 있는데도 무척 쓸쓸해 보였다.
"사실은 말입니다."
신태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골렘들을 바라보는 눈이 한없이 깊어 보였다.
"제가 가족이랑 회사를 멀리하게 된 건 이사님 때문이었습니다."
"저 때문이요?"
"네. 우연히 아버지가 이사님 가족분들께 저지른 일들을 알게 되었거든요."
"아……."
뜻밖의 답변에 강주혁은 충격을 받았다.
"말을 해준 사람은 아버지의 측근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갈수록 포악해져 가는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를 등진 사람이었죠. 아버지에게 헌신한 세월이 아까웠나 봅니다. 그래서 저에게 아버지의 비밀을 털어놓았죠. 부자 사이를 이간질해서 복수를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꽤나 성공적이었죠."
골렘들을 스쳐 간 바람이 신태양의 덥수룩한 머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노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저 나름대로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선뜻 믿기 어려운 말이었으니까요. 제 부탁이라면 아버지의 부하들도 뿌리치기 어렵죠. 계속 추궁하니까 사실이라고 실토하더군요."
"아버지에게 따졌습니까?"
"……아니요. 그냥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얼굴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거든요. 아버지도 짐작은 하고 있을 거예요. 제가 왜 갑자기 이런 삶을 택한 건지. 아버지가 알고 있다면 할아버지도 알고 있겠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실, 그전에도 아버지하고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도 저에게 많은 기대를 했고 저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죠. 그런데……."
신태양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이어지는 말을 하기가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강주혁은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줬다.
"제가 할아버지에게 아버지 어렸을 때보다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은 후로는 저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견제를 하더군요."
권대호로부터 신태원은 한심한 자식 교육에 대해서 많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강주혁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했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인지도 몰랐다.
"답답했습니다. 저는 그저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뿐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너무 열심히 해서 잘하게 되면 아버지가 싫어하고, 그렇다고 일부러 못 하는 척을 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그런 길을 택하신 거군요."
"네.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버지의 일그러지고 추악한 면들이 하나씩 보이더군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태양 씨가 어렸을 때부터 그랬을 겁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제가 어렸기 때문에 못 봤을 뿐이죠. 그런 아버지 모습을 보기 싫어서 해외로 떠났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정해준 길에서 크게 벗어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저희 집안에 저지른 일 때문에 결심을 굳히셨군요."
"……네. 공허했습니다.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잘못을 알면서도 돈과 권력으로 덮어버렸던 할아버지가 싫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끔찍하더군요."
신태양은 이런 얘기를 하는 게 고통스러운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시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제게 주어진 일들을 해보려고 했죠. 의심하지 않고요.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잡히질 않더군요."
"그래서 다른 일을 하려고 하셨군요."
강주혁은 신태양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거지처럼 하고 다니는 이유도.
"네. 제가 배운 것들을 의미 있는 쪽으로 써보고 싶었습니다."
죄인의 아들로 태어나 아비의 죄를 씻기 위해 일종의 구도자가 된 것이다.
정작 죄를 저지른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반성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신태양은 혼자서 그 죄를 짊어지고자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나름의 효도인 것 같기도 했다.
‘대기업 회장님이 아니라 신부님이 어울리는 사람이군.’
신태양은 예상외로 섬세한 마음을 가진 사람 같았다. 이런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에는 너무 여린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마음의 위안은 얻었습니까?"
신태양은 슬픈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가해자는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피해자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저 혼자 그렇게 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니더군요. 그저 제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이라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
"그래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태양 씨가 그 일에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상황이 좀 이상하군요.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강 이사님인데 이사님이 저를 위로하고 있으니……."
신태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강주혁을 마주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깊고 슬퍼졌다. 그는 강주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태양 씨는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신다고 해서 아버지의 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신태양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신태원과 신대성이 무릎 꿇고 빈다고 해도 강주혁은 그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죄지은 자는 벌을 받는다. 이게 강주혁이 가진 철칙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이사님이 어떤 마음으로 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지. 이사님의 칼끝이 아버지를 향하고 있다는 것도요. 그냥 제 마음이 이렇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신태양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잘 알겠습니다."
강주혁은 신태양을 보면서 할아버지의 죄를 짊어졌던 아버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신태양이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
강주혁은 신 씨 집안과 관련된 모든 걸 짓밟을 생각이었다. 내심 신 씨 성을 가진 모든 사람을 배척하고 증오했다.
‘신 씨라고 다 똑같진 않구나.’
하지만 신태양을 보고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런다고 복수의 칼날이 무뎌지지는 않겠지만 동시에 그것이 눈먼 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경산시 화곡리.
한적한 시골 마을은 어스름이 몰려오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마을의 뒷산에 있는 게이트는 밤에도 서늘한 푸른빛을 흘리고 있었다.
"부회장님!"
게이트를 담당하고 있는 김문식 부장은 갑작스러운 신대성의 방문에 화들짝 놀랐다.
"잘 있었나?"
신대성이 김문식을 보면서 씩 웃어 보였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헌터들은 전부 신대성의 심복이었다. 다들 과거에 이런저런 문제를 저지른 자들로 신대성이 뒤를 봐주지 않았다면 철창신세를 지거나 거지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일한 동아줄인 신대성에게 과할 정도로 충성했다. 사실상 태원공략의 직원이 아니라 신대성 개인의 사병에 가까웠다.
그룹에서 절대적인 위상을 가진 신태원 회장의 영향력도 이들에게는 크게 미치지 않았다.
"어쩐 일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내려오셨습니까?"
"저 던전에서 확인해 볼 게 있네. 헌터들은 어디에 있나?"
신대성은 게이트를 턱짓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전부 숙소에 있습니다."
게이트가 산골에 있고 도시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출퇴근을 하기보다는 회사에서 제공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쪽을 택했다. 다들 크고 작은 하자가 있는 이들이라서 가족도 없었다.
주말에는 삼삼오오 모여 시내로 나가지만 평일에는 다들 이곳에 모여 있었다.
"다들 나오라고 하게."
"무슨 일이신지?"
"던전에서 확인할 게 있네."
"지금 몬스터들 거의 다 잡아놨습니다. 제가 안내할 수 있습니다."
김문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대성은 수행원을 스무 명 가까이 대동하고 있었다.
신대성의 손발이나 마찬가지인 만큼 다들 실력자들이다. 웬만한 던전은 이 인원만으로도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다른 사람도 필요하네. 야근 수당 두둑하게 챙겨줄 테니 다들 준비해서 나오라고 하게."
김문식은 잠깐 의아함을 내비쳤으나 이내 표정을 고쳤다.
"네. 부회장님. 20분 내로 준비 끝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김문식이 방송으로 소집령을 내렸다. 그의 장담대로 15분쯤 지나자 모든 헌터들이 완전 무장한 상태로 회사건물 앞에 모였다.
인원은 총 45명. 신대성이 데리고 온 사람들까지 합치면 60명이 넘는다. 신대성은 비서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십니까!"
헌터들은 신대성을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부회장 자리에서 쫓겨난 게 한참 전인데도 그들은 여전히 신대성을 부회장이라고 불렀다.
"쉬는데 불러내서 미안하네. 급하게 확인할 게 생겼네."
헌터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데리고 이 오밤중에 확인해야 할 게 무엇인지 무척 궁금할 것이다.
"아닙니다! 부회장님!"
"맡겨만 주십시오!"
하지만 과한 충성을 보여주는 이들 덕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신대성은 그들을 보면서 냉소를 삼켰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 준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저들에게 준다면 저들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편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대성의 충성스러운 개처럼 굴었고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을 거야. 들어가지."
"네. 부회장님."
신대성은 헌터들과 함께 게이트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죠."
길 안내는 헌터들이 아니라 신대성의 비서가 맡았다. 헌터들은 의문스러운 표정이었으나 토를 달지는 않았다.
비서는 마치 이곳에 몇 번 와본 사람처럼 길을 잘 알았다.
일행은 한 시간 정도 걸었다. 다행히 몬스터와 마주치진 않았다.
"여깁니다."
비서는 커다란 바위 앞에서 멈춰 섰다.
"곧바로 시작하지."
신대성의 말에 비서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파지직!
두 손바닥 사이에서 검붉은 스파크가 튀었다.
"으으, 으아아악!"
모여 있던 헌터들과 수행원들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실처럼 이어진 피들이 비서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신대성은 혐오감이 가득한 눈으로 비서가 벌이는 기행을 보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 일말의 죄책감이 있었으나 더 큰 열망이 그것을 덮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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