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모든 이야기는 강 씨 집안의 선산에서 생성된 게이트에서 시작되었다.
게이트와 이어진 던전의 심장부에는 외부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지하 동굴이 하나 있다. 그 동굴의 벽에는 검술 구결이 룬 문자로 새겨져 있는데, 그 검술이 바로 무극검이었다.
구결의 발견자인 강주혁의 조부 강중혁은 무극검을 마스터해서 경산마존이 되었다.
그러나 무극검은 끔찍한 부작용을 가진 위험한 검술이었다. 경산마존은 아들과 함께 사신검이라는 미로 속에 무극검을 감추어뒀고 그것을 쉽게 익히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부작용만 감수할 수 있다면 사신검을 익히지 않고도 무극검을 익히는 게 가능하다. 경산마존이 그랬던 것처럼.
경산마존은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무극검의 원전이 있는 동굴 전체를 봉인해 버렸다. 그 후로 어느 누구도 동굴에 다가가지 못했다.
"난 또 뭐라고. 또 그 얘기인가?"
경산으로 내려가서 동굴의 봉인을 풀자는 교주의 제안에 신대성을 냉소를 흘렸다.
처음 만났을 때 교주가 신대성에게 제안한 것도 동굴의 봉인을 풀자는 것이었다.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켜 강 씨 집안을 몰아낸 것도 결국 동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봉인을 해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생에 걸친 고련 끝에 인간을 아득히 초월하는 존재가 된 경산마존이 자신의 남은 생명까지 불살라가면서 만든 봉인진이었다.
이 세상에 그걸 깰 수 있을 만큼 강대한 마력을 가진 존재는 없었다. 수많은 이능을 사용하는 교주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네놈의 헛소리만 듣고 낭비한 시간과 돈이 얼만데 아직도 그딴 소리를 하는군."
신대성이 이를 갈았다.
교주는 제시한 방법은 두 가지였고 신대성은 둘 다 시도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첫째는 마석에 담긴 마력을 추출해서 봉인진을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마석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신대성은 아버지가 이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바라는 건 궁극의 무(武)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무극검을 지고의 무예에 다가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봤지 그것 자체를 지고의 무예로 보지 않았다. 무극검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걸 경계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신대성은 동굴에 새겨진 구결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다. 괜히 그 얘기를 꺼냈다가 아버지와 의견충돌이라도 생기면 모든 걸 잃을 테니까.
그 대신 신대성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 태원공략으로 들어오는 마석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마석의 출처를 세탁하기 위해서 암시장에서 여러 사람을 거치게 만들었다. 중간과정은 블랙 헌터들이 직접 맡았다.
그렇게 해서 세탁을 끝낸 마석은 경산으로 조금씩 흘러들어 갔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마석을 빼돌리는 건 알아차려도 그 마석의 진정한 용도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강주혁에 의해 그 일의 총책임자였던 양준기가 죽고 마석 횡령 루트가 드러나면서 이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일을 어렵게 만든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었습니다."
교주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마석을 이용해 봉인을 해제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다. 신대성은 힘은 신태원의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신대성에게 충성하는 이들도 결국은 그가 신태원의 아들이기 때문에 충성하는 것이다. 신태원의 눈을 속여가면서 일을 벌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을 동시에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바로 사신무극검을 익히는 것. 이를 위해서는 경산마존의 아들이 만든 비급이 필요했다.
신대성을 그것을 찾기 위해서 엄청난 인원을 동원해서 강주혁의 고향마을을 샅샅이 뒤졌다. 인원이 많아지자 입막음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이 사실이 신태원의 귀에 들어갔다.
신태원이 추궁하자 신대성은 자신이 강 씨 집안을 망하게 했으며 그 이유가 사신무극검이었다는 식으로 실토했다.
누구보다도 무극검을 두려워하는 아버지지만 그걸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누구보다도 탐낼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신태원은 강 씨 집안에게 저지른 짓에 대해서는 격분했지만 사신무극검의 존재에 대해서는 흥미를 보였다. 궁극의 무에 대한 지독한 열망이 눈을 흐리게 만든 것이다.
신태원은 신대성을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하면서도 비급을 찾는 일만큼은 도와주었다.
덕분에 신대성은 두 개의 비급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걸 완전히 익힐 수 있는 재능이 없었다. 처음에는 도와주던 아버지도 어느 순간에는 손을 놓고 말았다.
무극검에 다가가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모두 실패로 끝난 것이다.
"아버지한테 말하라고?"
"절대 아닙니다."
신태원이 원하는 건 안전하게 쓸 수 있는 사신무극검이지 사용자를 미치게 하는 무극검이 아니다.
만약 무극검의 원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오히려 그걸 없애 버리려고 할지 모른다.
"그 방법 외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당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나도 쓰레기지만 네놈 같은 괴물은 아니다."
신대성이 으르렁거렸다.
"그럼 이대로 모든 걸 잃을 생각입니까? 당신이 마땅히 가져야 할 모든 것들을?"
신대성에 짙은 번민이 묻어났다.
"네놈은 기어이 나를 미치게 만들 작정이군."
신대성은 처음부터 무극의 힘을 갈망하는 동시에 두려워했다. 경산마존 같은 괴물도 이성를 빼앗길 만큼 강렬한 힘이었다. 신대성이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 그 힘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경산마존은 힘을 휘두르면서도 꺼려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 힘에 지배당하고 말았죠. 하지만 진정으로 탐닉한다면 그 힘은 사용자에게 무한한 자유를 줄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거면 네놈이 차지하지 왜 나에게 떠먹이려고 하는 거지?"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무극검과 비슷한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극의 자석이 그렇듯이 서로를 밀어낼 수밖에 없죠.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제가 취했을 겁니다."
신대성의 얼굴에 고뇌의 빛이 서렸다. 어차피 가만히 있으면 서서히 말라 죽게 될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도 당신이 그 힘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번 휘둘러보고 싶지 않습니까? 당신이 본 적조차 없는 힘입니다."
신대성은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려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까지 넘지 못했던 선이 흐려져 가고 있었다.
* * *
"안녕하세요. 이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광야로 들어가는 톨게이트 앞에서 신태양과 만난 강주혁은 그와 악수를 나눴다.
‘돌겠네.’
신태양의 노숙자 같은 몰골은 그대로였다. 머리랑 수염이라도 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오히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길어졌다.
근처를 지나가는 헌터들도 신태양의 지저분한 모습에 눈길을 한 번씩 주곤 했다. 한 달 정도 장기공략을 하다가 복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마 신태원의 장손이라고 하면 다들 놀라서 자빠질 것이다.
‘냄새가 안 나서 다행이네.’
외모에서 예상되는 악취는 전혀 나지 않았다. 면도랑 이발도 안 하고 옷도 잘 갈아입지 않지만 그거하고 별개로 샤워는 자주 하는 모양이다.
‘뭐 하는 인간인지 모르겠네.’
강주혁은 바로 이 요상한 몰골 때문에 신태양을 신태훈만큼 미워할 수 없었다.
재수 없는 아버지를 빼다 박은 신태훈을 볼 때마다 강주혁은 강렬한 살인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신태양에게서는 신대성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신 씨 집안의 사람들하고도 확실히 달랐다.
그래서인지 신태양은 신태훈만큼 거북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태양을 신뢰하거나 좋게 보는 건 아니었다.
‘신대성이 날 죽이라고 보낸 걸 수도 있지.’
신태양은 강주혁을 도와 마지막 제단을 찾는 일을 자청했다.
회장의 손자지만 정식직원도 아니었기에 공략팀에 끼워 넣기가 애매한 상황. 이윤철은 못이기는 척 허락해 주었다.
신태양이 불편했던 강주혁은 혼자서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이윤철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전의 공략에서 강주혁에게도 위험한 상황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강주혁은 신태양 한 명이 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이 있을까라는 생각했지만 이윤철은 신태양 한 사람이면 평범한 공략팀 하나를 데리고 가는 것과 비슷할 거라고 말했다.
‘실력은 있다는 얘기겠지.’
신태양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던 강주혁은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신태양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마석 매장지를 찾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마석 매장지를 찾게 되면 주가에도 호재가 되니 여건만 된다면 이윤철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강주혁 이사님."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강주혁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공략 1부 3팀 사람들이 있었다.
"공략 들어가는 길?"
"네. 아침부터 일정이 빡빡하게 잡혀서요. 이사님은 마석 매장지?"
안다정은 싱그러운 미소로 답했다.
"네. 팀장님은 어디로 가요?"
"저야 늘 가던 곳이죠. 언론 상대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을 텐데 피곤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제가 원해서 가는 거니까요. 기자들한테 시달리는 것보다 이쪽이 낫네요."
"어?"
그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신태양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신태양과 눈이 마주친 안다정은 흠칫하고 놀랐다.
신태양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안다정을 보다가 눈길을 거두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인사하세요. 신대성 전 부회장의 아드님인 신태양 씨입니다."
"네에?"
예상대로 공략 1부 3팀 사람들은 경악했다. 복장만 보면 노숙자였으니까.
"반갑습니다. 신태양입니다."
신태양이 고개를 숙여 헌터들에게 인사했다.
"혹시 두 분 구면인가요?"
강주혁은 미묘한 기류를 내비친 안다정과 신태양에게 물었다. 둘 다 미국에서 생활했으니 접점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요. 처음이에요."
"네. 저도요."
하지만 두 사람은 단호히 부정했다.
‘전 남친이라도 되는 건가?’
강주혁은 찝찝한 기분을 속으로 삼켰다.
"그럼 다들 무운을 빕니다."
"이사님도 조심하세요."
"꼭 성공하고 밥 사주세요! 1부 2팀만 챙기지 마시고요."
"네네."
강주혁과 신태양은 1부 3팀 사람들을 먼저 보낸 후 던전에 진입했다.
그리고 웨이포인트를 이용해 마지막 공략 불가 지역으로 이동했다.
"엄청나군요."
신태양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대한 분지 안에 수만에 달하는 브론즈 골렘들이 병마용의 병사들처럼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분지가 끝나는 곳에 있는 산에는 다른 브론즈 골렘보다 수십 배나 큰 거대 브론즈 골렘이 있었다.
브론즈 골렘은 전체적인 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지만 흉악할 정도로 강한 맷집을 자랑한다. 그래서 소규모 지역에서는 보스 취급을 받는다.
그런 몬스터가 수만 마리나 모여 있는 탓에 이곳은 환경적인 요인이 아니라 순수하게 몬스터 때문에 공략 불가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임원들을 대거 투입하고 몇 달 정도 고생한다면 정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스폰 데이만 되면 브론즈 골렘들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경제적 가치도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버려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저 골렘들이 웨이브 데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다른 마석 매장지의 몬스터들도 마찬가지다.
"이걸 써먹으면 됩니다."
파지직!
강주혁의 손에서 번갯불이 번쩍였다. 특이하게도 하얀색 빛을 띠는 전격. 셀레스티얼이 지키고 있는 제단에서 얻은 힘이었다.
"가시죠."
강주혁은 앞장서서 골렘들에게 다가갔다.
끼이익.
골렘들의 머리가 하나씩 돌아갔다.
우우웅.
골렘들의 눈에 빨간색 불이 들어왔다.
"약점은 등입니다."
"알겠습니다."
강주혁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골렘에게 다가갔다.
쿠어어!
골렘이 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골렘이 강주혁이 머리통을 찍는 것보다 강주혁의 손바닥이 골렘의 다리에 닿는 게 더 빨랐다.
파지지직!
끼이익! 끼익!
아주 작은 전격이었지만 닿자마자 골렘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전격에 휩싸인 골렘이 경련을 일으켰다.
쿵!
한참을 부들부들 떨던 골렘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자리에서 도약한 강주혁은 골렘의 무릎과 어깨를 연달아 디딘 후 골렘의 뒤로 넘어갔다.
푹!
그리고 대검을 골렘의 등에 쑤셔 박았다.
쿵!
골렘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강주혁이 시범을 보이자 신태양이 고개를 끄덕인 후 골렘에게 달려들었다.
파지직!
제단의 힘으로 골렘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건 강주혁과 똑같았다.
하지만 그다음 행보는 사뭇 달랐다.
"흡."
심호흡과 함께 검을 뒤로 당긴 신태양은 앞으로 튀어 나가면서 골렘의 명치를 찔렀다.
‘등이라고 했는데…….’
골렘의 전면은 후면에 비해서 엄청나게 두꺼운 장갑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고강한 내공을 가진 헌터라도 쉽게 부술 수 없다.
강주혁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콰지지직!
하지만 검을 따라 흘러들어 간 뇌기가 골렘을 관통하는 순간, 등 쪽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쾅!
골렘의 상체가 여러 개의 조각으로 부서졌다.
‘뭐지?’
강주혁은 신태양이 가진 힘에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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