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태양 씨가요?
"앉아서 얘기하지."
"네. 사장님."
이윤철이 두 사람을 소파로 안내했다. 비서가 강주혁에게 차를 가져다주었다.
"태훈이 녀석을 혼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신태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대련을 한 번 하기는 했죠."
강주혁은 신태훈과의 대련을 떠올랐다. 그날 강주혁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신태훈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겼다.
벌써 그것도 3년 전의 일이다.
"그 일로 뭔가를 배웠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신태양은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신태훈이 공략 도중에 동료를 버리고 달아난 일로 헌터 업계에서 완전히 축출된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입사 이후로 한 번도 뵌 적이 없네요. 도련님은 회사에 안 나오시나요?"
"도련님이라뇨. 그냥 씨라고 부르세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윤철 앞이라 예의상 그렇게 말했는데 신태양은 질색을 했다.
"주로 외국에 있다 보니 올 일이 없었네요."
"외국 쪽 공략회사를 다니신 건가요?"
"아뇨. 회사를 잠깐 다니긴 했는데 다른 일들을 했죠."
"태양 군 아니, 태양 씨로 하자. 나이도 있으니까. 어쨌든 이 친구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네."
이윤철이 부연했다.
"봉사활동이요?"
"<깃발 없는 공격대> 소속이야."
깃발 없는 공격대는 헌터들로 이루어진 다국적 NGO다.
주로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낙후되어서 헌터들을 고용할 만한 여력이 안 되는 국가들에 가서 게이트를 컨트롤하는 역할을 한다. 국경 없는 의사회의 헌터 버전인 셈이다.
신태양은 이윤철이 자신을 대신해서 대답하는 게 못마땅한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대단한 건 아닙니다. 아프리카나 남미 쪽에는 아직도 헌터들이 부족한 지역들이 많거든요. 그런 곳에서 거드는 거죠."
그런 국가들에서도 뛰어난 헌터들은 있다.
하지만 그들은 돈을 많이 주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나라로 떠나거나 군벌 즉, 블랙 헌터가 되어서 나라를 더 어지럽게 만든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건 돈이 되는 게이트뿐. 돈이 안 되는 게이트는 방치되다가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킨다. 깃발 없는 공격대는 그런 게이트들을 처리하는 것을 주업으로 한다.
돈이 되는 일이 아니니 주로 후원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확실히 신대성의 아들이 할 만한 일이 아니긴 했다.
평판 쌓기를 위해서 하는 일 같지는 않았다. 회귀 전에는 마지막까지 그룹 승계 싸움에 등판을 하지 않았던 신태양이니까.
"꼭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 직접 가서 보니까 정말 끔찍하더군요."
신태양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제 그만두신 겁니까?"
"아닙니다. 할아버지께 태원공략이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셔서 잠시 거들려고 왔습니다. 솔직히 여기보다는 그쪽 상황이 더 안 좋긴 한데…… 저도 신 씨 집안사람이니까 돕긴 해야죠."
웨이브 데이와 블랙 헌터와의 전쟁으로 태원공략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희생자들의 공백을 메우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새로 사람을 뽑고, 그 사람이 광야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야 한다. 그 기간 동안 남아 있는 헌터들은 평소보다 두 배로 일해야 한다. 평소에는 순시만 돌고 정기공략에 참여하지 않는 임원들도 모두 공략에 나서야 할 판이었다.
신태양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화려했던 경력을 생각한다면 또래의 헌터들보다는 분명히 나을 것이다.
"강주혁 이사를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신태양은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말을 잇지 않았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얘기가 아닌 모양이군."
"아, 대단한 건 아닙니다."
강주혁은 신태양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건 그렇고 강 이사는 어쩐 일인가?"
"남은 마석 매장지 공략에 관해서 의논드리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이윤철은 강주혁의 말에 껄껄 웃었다.
"강 이사도 가만히 보면 성격이 급한 것 같아. 지금까지 찾아낸 마석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웃으면서 말하긴 했지만 말에 뼈가 있었다. 회사의 업무량이 폭증한 시기라서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기에는 좋지 않았다.
공략의 목표도 매출을 올리는 것보다는 몬스터의 머릿수를 조정해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차원에 가까웠다.
태원공략의 경우 그동안 강주혁이 활약을 해준 덕분에 매출 면에서도 꽤 여유가 있었다. 신태원 회장도 무리하게 일을 벌이기보다는 회사의 안정화에 주력할 것을 당부했다.
"마석도 있지만 <용의 길> 끝에 있는 게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건 나도 궁금하네. 회장님도 그렇고. 그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부터 해주면 좋겠군. 강주혁 이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나."
블랙 헌터와의 전쟁으로 인해 강주혁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태원공략의 얼굴마담으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신광공략과의 첫 합동 공략으로 처음 매스컴을 탔고 대중이 강주혁을 완전히 잊어버리기 전에 또 한 번 주목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잘생긴 일반인이라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전쟁영웅으로 여겨졌다.
덩달아 헌터 업계 사람들만 알고 있었던 강주혁의 업적들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윤철은 이 상황을 회사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써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임원도 썩 좋지는 않군.’
강주혁 입장에서는 좀 억울했다.
업무량이 늘어난 공략팀을 도와야하기 때문에 일을 벌이지 말라고 하면 이해하겠는데 언론을 상대하는 것 때문에 하고 싶은 공략을 미뤄야 한다는 게 영 못마땅했다.
"크리스 바셋 헌터랑 싸우는 건 어떻게 할 셈인가?"
"저는 당장 지금에라도 싸울 수 있습니다. 이번 전투 끝나고 날을 잡자고 먼저 얘기를 했는데 알았다고만 하고 답변이 없네요."
"강 이사가 두려운 모양이군."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서 미국으로 떠날 것 같습니다."
"태원공략을 대표하는 헌터와 헌터스를 대표하는 헌터가 싸우는 것도 재미있을 텐데 아쉽게 됐네. 인터뷰는 어떻게 하기로 했나?"
"준비…… 하고 있습니다."
"안 내키는 모양이군. 헌터로 들어온 사람에게 이런 일까지 시켜서 미안하네. 그래도 자네가 유명해지면 회사의 이름값도 덩달아 오르니까 번거롭더라도 신경 좀 써주게."
한국 입장에서는 블랙 헌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이 호재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은 광야의 우수한 헌터 전력이 줄어든 것에 우려를 표했고 주가도 덩달아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이윤철은 강주혁을 띄움으로써 주가반등을 꾀하는 것 같았다. 강주혁이 속해있는 회사라는 이유만으로도 태원공략의 명성이 오를 테니까.
"제가 언론을 상대하는 것보다 마석 매장지를 하나 더 발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긴 하지. 근데 자네도 알다시피 공략팀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나. 양해 부탁하네."
"네. 사장님. 잘 알겠습니다."
강주혁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빨리하면 좋지만 좀 늦어져도 상관없었다.
"제가 강주혁 이사님을 도와주는 건 어떨까요?"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신태양이 입을 열었다.
"태양 씨가요?"
* * *
신대성의 저택.
"콜록! 콜록!"
신대성은 입을 막고 기침을 해댔다.
"제기랄."
간신히 기침이 멎은 후 손바닥을 보니 예상대로 검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후우."
신대성은 벽에 기댄 채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발작적으로 오르내렸다.
사신무극검을 습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대성은 결코 그것을 완전히 길들이지 못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육신은 언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끝인가…….’
이 상태로는 태원그룹을 차지하더라도 제대로 굴려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 같았다.
‘원래 내 건데…….’
장남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유산.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신대성은 자신의 몫을 되찾기 위해서 처절하게 싸워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타고난 그릇의 한계가 발목을 잡았다.
"흐흐, 흐흐흐."
신대성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려댔다.
이제는 인정할 때도 된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뛰어난 헌터가 될 수 있는 재능 자체가 없다는 것을.
‘헛짓거리였어.’
헌터가 아니라 다른 직업을 택했다면 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선택지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헌터의 아들로서 신대성은 반드시 훌륭한 헌터가 되어야만 했다.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따윈 없었다.
그저 헌터로서의 재능이 없는 것일 뿐인데 신대성은 선천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래서 블랙 헌터의 수장이 내민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헌터가 되고 싶었다.
‘그놈도 등신이었지.’
블랙 헌터의 교주는 신대성에게 무한한 힘을 약속했다. 하지만 교주도 틀렸다.
신대성은 사신무극검조차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아마 강주혁이 가지고 있는 청룡검을 익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지고 있는 주작검과 현무검도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는데 그것 하나가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새파랗게 젊은 강주혁은 너무나도 쉽게 사신무극검을 익혀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이제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강주혁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태원공략을 호시탐탐 노리던 사냥꾼은 이제 자신의 사냥감보다 더 거대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걸 보고야 신대성이 사신무극검의 진정한 주인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교주의 판단도 틀렸던 것이다.
‘한심한 새끼.’
신대성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던 교주는 죽어 버렸다. 그것도 강주혁에게.
자신과 손을 잡으면 온 세상을 주겠다는 식으로 떠들어대더니 등신같이 덜미를 잡혀서 죽어버린 것이다.
신대성도 이 끔찍한 검술을 도로 뱉어내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될 것이다.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은 채 몇 년 동안 낑낑거리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부회장님."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비서가 손수건과 물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신대성은 손수건으로 입언저리를 닦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태양이는 언제 온다고 했나?"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집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뭐? 그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죄송, 윽!"
"뭐야?"
비서는 갑자기 심장을 움켜잡았다.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으윽!"
"뭐야? 왜 그래?"
신대성은 몸을 일으켰다. 비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팔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비서가 감았던 눈을 떴다.
"오랜만입니다."
비서는 눈이 붉게 빛났다. 목소리에서 오싹한 냉기가 돌았다.
"마석훈."
신대성은 오랜만에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강주혁한테 죽은 줄 알았는데."
"저에겐 목숨이 여러 개가 있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군요. 그중 하나를 잃었을 뿐입니다."
신대성은 인상을 썼다. 교주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끔찍한 존재였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교주는 돌아와도 그가 이끌던 부하들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이 상황에서 교주 혼자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네놈에게 용건이 없다. 내 비서 그만 괴롭히고 꺼져라."
"제가 떠나면 당신에게는 뭐가 남습니까?"
"없지. 내 싸움은 끝났다. 어리석게도 네놈의 말을 듣다가 이 꼴이 났지."
"그건 당신의 재능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저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신대성은 검을 쥐었다. 눈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게는 목숨이 여러 개 있습니다."
신대성도 알고 있었다. 지금 검을 휘둘러봤자 저 귀신같은 놈은 또 달아나고 애꿎은 비서만 죽을 거라는 걸.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
"강주혁 때문에 당신도 저도 상당히 난감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뒤엎을 수 있는 카드가 하나 있습니다."
"말해 봐. 들어나 보지."
신대성은 검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경산으로 내려가서 마존의 봉인을 깨는 겁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