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강주혁입니다. 이쪽은 윤정석 과장이고요."
강주혁은 미모의 비서와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하하"
윤정석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상대는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저한테도 수행비서가 배정된다는 얘기는 못 들었군요. 내근비서만 있는 거 아닌가요?"
이사부터 상무까지는 사내에서 근무하는 내근비서 한 명이 배정된다. 수행비서가 붙는 건 전무부터다.
"이사님께 전무급 대우를 하라는 회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수행비서는 대개 남자분이 맡지 않나요?"
"대개는 그런데 회장님께서 저를 지목하셨습니다. 혹시 제가 불편하신가요?"
채윤정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아, 그런 건 아닙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업무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해야 할 일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주시겠어요?"
"네. 이사님께서 보실 수 있도록 집무실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른 일 생길 때까지 편하게 계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네. 이사님."
강주혁은 채윤정을 비서실에 남겨놓고 윤정석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와."
윤정석이 탄성을 터뜨렸다.
업무를 보는 책상은 사무실에 있는 것보다 네 배 정도 컸다. 뒤에 있는 벽은 전부 유리였는데 회사 앞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집무실 안에 냉장고와 세면대도 있었다. 손님을 위한 가죽소파도 있었고. 전체적인 인테리어도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당연하게도 양준기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강주혁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양준기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여긴 집무실이 아니라 호텔 같은데요."
"하나 마시고 가요."
강주혁은 냉장고 안에 있는 음료수를 꺼내서 윤정석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근데 비서한테는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구세요?"
"제가요?"
"네. 비서한테 좀 쌀쌀맞게 대하신 것 같아서."
윤정석이 보기에도 티가 났던 모양이다.
"회장님이 저를 감시하려고 붙여둔 사람처럼 보여서요."
"에이, 설마요. 회장님이 왜 그런 일을 하시겠어요."
강주혁은 빙그레 웃었다.
윤정석은 자신의 공로를 높게 평가한 신태원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주혁은 신태원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저렇게 곁에 사람을 붙여놓으면 제 개인적인 약점을 알아낼 수도 있죠. 제가 뭔가 실수를 할 수도 있고요. 제가 회장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을 하거나 이 회사를 떠나려고 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카드 하나가 생기는 겁니다."
"그런 분으로 안 보이시던데요?"
"그럼 어떤 분으로 보이시던가요?"
"그냥…… 좀 깐깐한 영감님?"
확실히 신태원이 인자한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간이 지나면 회장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될 겁니다."
신태원 회장과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강주혁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딛고 있는 기분이었다.
만약 신태원 회장이 아쉬워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그와 대립각을 세웠다면 스트레스로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이다.
"그런가요?"
"어떤 사람이든 확실히 알기 전까지는 신뢰하지 않는 게 좋아요."
"전 회사 사람들이 썩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님도 그렇고요."
"그렇게 봐주니까 고맙군요. 사실 정석 씨는 운이 좋은 케이스에요.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아요. 자기가 올라갈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남을 끄집어 내리는 짓을 서슴없이 하죠."
윤정석은 강주혁이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했는지 모른다.
강주혁이 그 투쟁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건 경쟁자들로 하여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압도적인 격차를 보여준 후였다. 그전까지는 강주혁도 지독한 이전투구를 겪어야 했다.
"그러니까 정석 씨도 항상 정신 바짝 차려요. 회사는 전쟁터나 마찬가지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바쁠 텐데 내려가 봐요."
"네. 이사님."
"오늘 저녁에 훈련 끝나고 가볍게 한잔합시다. 정석 씨 진급도 축하해야죠."
"좋죠. 그럼 가 보겠습니다!"
윤정석은 씩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강주혁은 윤정석을 내보낸 후에 책상으로 다가갔다. 매끈매끈하게 닦여져 있는 표면을 손으로 훑으면서 원목의 감촉을 느꼈다.
의자 뒤의 유리벽으로 강남 게이트단지 전체가 훤히 보였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웠다. 아직까지 갈 길이 멀지만 적어도 목표가 눈앞에 보이는 곳까지는 온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죽은 헌터들 때문인가.’
블랙 헌터 토벌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랬다.
블랙 헌터 측의 사망자는 102명, 부상자는 12명밖에 없었다. 127명이 포로가 되었다.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적인 지도자를 잃었고 조직은 완전히 와해 되었다.
하지만 공략회사 측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사망자 52명에 부상자 71명. 전투 중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서 불구가 된 이들도 많았다.
웨이브 데이 때 입은 피해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대형 공략회사들은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었다.
대형 공략회사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넘쳐났지만, 그중에서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걸 할 수 있는 사람들만으로 정기 공략을 해결하려고 하니 헌터들의 업무량이 배로 늘었다.
공략 1부는 사망자가 없고, 여러 경사가 겹쳐서 분위기가 달랐지만 다른 곳은 초상집이나 마찬가지였다.
헌터 업계와 이 사회를 위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강주혁으로 인해 촉발된 전쟁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동종 업계 종사자들이 흘린 피를 대가로 이 자리에 오른 것 같아서 마음이 찝찝했다.
강주혁은 착잡한 마음을 억누른 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채윤정이 준비해 준 자료를 펼쳤다. 한눈에 보기 좋도록 정리된 서류들은 그녀가 우수한 재원임을 말해주었다.
‘인터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언론 인터뷰 준비라는 걸 확인한 강주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광야에서 벌어진 전투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헌터와 블랙 헌터가 싸운 적은 많아도 던전 안에서 그 정도 규모로 맞붙은 적은 없었으니까.
규모만 따지고 보면 전쟁이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중은 전쟁이 어떻게 해서 벌어졌으며 어떻게 헌터들이 승리할 수 있었는지를 궁금해했다.
당연히 블랙 헌터들의 근거지를 알아내고 전투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강주혁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언론에서는 강주혁에 대한 특집기사를 내고 있었고, 네티즌들은 강주혁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전투 이후, 강주혁이라는 이름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에서 빠진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좋은 이야기들이었다. 헌터 업계의 기록이란 기록은 모두 갈아치워 버린 초신성이다. 엄청난 실적을 내서 태원공략을 한국 1등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전무랑 싸워서 이긴 천재 중의 천재다. 포스트 신태원이다.
강주혁의 출생성분이나 집안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에 대한 진실은 헌터 관리국의 고위직이나 공략회사의 회장들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그걸 굳이 터뜨릴 이유는 없었다.
강주혁은 하루아침에 슈퍼스타가 되었지만 유명세를 누리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다. 오히려 그 유명세 때문에 죽은 사람들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희생자를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강주혁은 자신을 과거로 보내줬던 회중시계를 떠올렸다.
이제 강주혁은 블랙 헌터들의 근거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만약 또 한 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블랙 헌터들이 세력을 키우기 전에 그들을 토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피해가 없을 수는 없지만 지금보다는 적을 것이다.
‘그리고 회귀 전보다 아는 것도 많지.’
강 씨 집안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았다. 김동훈의 정체도.
혹시 시간을 조정해서 더 어릴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집안이 몰락하기 전에 비극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에 대한 지식은 넘쳐난다. 회귀를 한 번 더 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이번에도 나오느냐는 건데.’
회중시계는 <용의 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티아메트 급 블랙 드래곤에게서 나왔다. 회귀 전과 같다면 이번에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안 나올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딱히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이 세계를 가능하게 했던 물건이 이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좀 이상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또 있기를 바라야지.’
마지막 제단은 태원공략이 소유하고 있다. 언제든 공략에 들어갈 수 있다. 결심을 굳힌 강주혁은 서류를 덮어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서실로 나가니 채윤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장님 잠시 뵙고 올게요. 하던 일 계속하세요."
강주혁은 곧장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실 비서에게 사장님을 뵙고 싶다고 했다.
비서에게 강주혁의 방문을 전달받은 이윤철은 곧장 들어오라고 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어서 오게. 강 이사. 집무실은 어떤가? 마음에 드나?"
"물론입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결정이었지. 마침 잘 왔네. 강 이사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와있거든."
"저를요?"
강주혁은 이윤철 뒤로 보이는 소파 쪽을 슬쩍 봤다. 손님으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강주혁과 눈이 마주친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누구지?’
덥수룩한 수염에 산발한 머리, 목이 늘어난 티셔츠 위에 걸치고 있는 야상점퍼엔 천을 덧대어서 꿰맨 자국이 있었다.
입고 있는 카키색 카고 바지도 색이 빠져서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신발에는 굳어 버린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대형 공략회사의 사장실에 손님으로 올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남자가 강주혁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인사하게. 이쪽은 신대성 전 부회장님의 장남인 신태양 군이네."
"……!"
강주혁은 잠시 충격을 받아서 말을 잇지 못했다. 회귀 전에도 소문만 무성했던 사람으로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신 씨 집안의 장손으로 태원그룹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였다. 그룹 승계를 위해 착실히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신태원에게도 인정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엇나가기 시작하더니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걸 내던지고 제3세계의 오지를 떠도는 방랑자가 되었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신대성뿐만이 아니라 신태원까지 나서서 방황하는 장손을 한국으로 데리고 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강주혁이 회귀하기 전까지 신태양은 한국 땅을 밟지 않았다.
"자네를 아직 군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군."
이윤철이 어색하게 웃었다.
신태양은 강주혁보다 나이가 많았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적어도 30대 중반은 넘을 것이다.
"그냥 편하게 부르셔도 돼요. 공식적인 직함도 없는데요."
신태양은 소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거만하기 짝이 없는 신태훈하고는 풍기는 느낌이 달랐다.
"반갑습니다. 신태양이라고 합니다."
"강주혁 이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주혁은 덤덤히 악수를 나눴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바닥은 무척 거칠었다.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라 막노동꾼의 손바닥 같았다.
강주혁을 바라보는 신태양의 두 눈에는 진한 슬픔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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