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태원공략 공략 1부 사무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이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유덕현은 팀장 자리에 앉아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 강주혁에게 말을 붙였다
"아, 부장님까지 왜 그러세요. 그냥 하시던 대로 이름 부르세요."
강주혁은 질색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인마, 회사 생활 종칠 일 있냐? 임원을 이름으로 부르게."
유덕현이 재미있다는 듯이 킬킬 웃었다.
신태원 회장의 파격적인 결정으로 부장을 건너뛰고 곧바로 임원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그 결정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사장이 되고도 남을 실적을 쌓았으니까.
다른 업계와는 달리 헌터 업계는 실적만으로 임원이 될 수 없다. 임원 자리에 어울리는 실력 즉, 전투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강주혁은 이미 1년 전에 단신으로 전무를 꺾음으로써 실력까지 증명했다.
강주혁이 임원이 되는 걸 막아온 건 그저 헌터 업계의 오랜 관습뿐이었다. 로열패밀리도 40대에나 임원이 될 수 있는 업계의 특성상 30대 초반인 강주혁을 이사로 올리는 건 회장 입장에서도 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강주혁이 블랙 헌터와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그런 부담도 사라졌다. 윤정석을 투입해서 블랙 헌터들의 근거지를 찾아낸 것도 강주혁이었고, 교주를 잡아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도 강주혁이었다.
회사뿐만이 아니라 헌터 업계 전체에 길이 남을 업적이었고 그 공로로 특진을 한다고 해서 과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강주혁은 헌터 업계 역사상 최연소 임원에 등극했다.
"이놈들아, 이사님 짐 정리하시는데 뭘 하고 있냐? 어서 돕지 못하고."
유덕현이 1부 2팀 사람들에게 농담조로 잔소리를 했다.
"직접 하신대요."
화려하게 회사로 복귀한 윤정석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윤 과장."
"네. 부장님."
"넌 또 뭐가 불만이기에 입이 댓 발로 나왔어? 남들은 던전에서 몇 년 동안 굴러야 겨우 할 수 있는 승진을 단박에 두 번이나 한 놈이."
2계급 특진과 10억. 목숨을 걸고 블랙 헌터의 근거지를 알아내 온 윤정석이 회사로부터 받은 보상이었다.
회사 외부에서의 활동으로 얻어낸 결과지만 아무도 회장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윤정석이 아니었다면 블랙 헌터들을 토벌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만약 블랙 헌터들을 토벌하지 못했다면 헌터들은 끊임없이 일자리를 위협받았을 것이다.
"이사님이 우리를 버리고 떠나시니까 그렇죠. 안 그렇습니까? 공 팀장님."
윤정석이 공허진에게 말했다. 그녀 역시 블랙 헌터와의 전투에서 보여준 활약과 지금까지의 실적을 인정받아서 과장으로 진급했다.
동시에 강주혁이 임원이 되면서 떠나는 바람에 1부 2팀의 팀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몰라요."
공허진은 울상을 지었다. 강주혁이 다른 회사와의 합동 공략으로 자리를 비울 때마다 임시로 팀장 역할을 맡아왔다.
하지만 임시로 팀장이 되는 것과 진짜 팀장이 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강주혁은 특유의 존재감 덕분에 자리에 없을 때에도 큰 의지가 되었다. 그런 강주혁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무척 컸다.
"버리다뇨. 전 항상 여러분을 지켜볼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주혁도 착잡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회귀 전에는 죽을 때까지 떠나지 못했던 공략 1부였다. 한직으로 밀려나기 전까지는 강주혁이 직접 이끌기도 했고.
그때는 결코 되지 못했던 임원이 되었다. 태원공략의 주인이 되겠다는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다. 그런데도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곳에서의 시간들, 이곳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이사님이 지켜본다고 하니까 뭔가 무서운데요?"
주선우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역시 강주혁이 떠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을 배려해서인지 싫은 티를 내지는 않았다.
"제가 없어도 제가 있는 것처럼 해줬으면 좋겠네요."
"그래. 주혁이가 없어도 주혁이 있을 때만큼 실적 올려. 할 수 있지?"
"부장님, 그건 좀……."
유덕현이 하얗게 질린 1부 2팀 사람들을 보면서 킬킬거렸다.
"대충 끝난 것 같군요."
평소에도 책상에 꼭 필요한 물건만 두는 습관이 있어서 짐이 많지는 않았다. 불필요한 문서는 그때그때 파쇄했고 중요한 문건은 USB 안에 있었다.
정리를 끝내고 소지품을 모두 모으니 A4용지 상자 두 개가 나왔다.
"부장님."
강주혁은 유덕현 앞에 섰다. 유덕현은 씩 웃었다.
그 얼굴을 보니까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강주혁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애써야 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강주혁은 말없이 유덕현을 끌어안았다. 유덕현은 덤덤히 강주혁의 등을 쓸어주었다.
회귀 전이나 회귀 후에나 언제나 큰 형님처럼 강주혁을 감싸주던 사람. 살아남기 위해 한없이 비굴하게 굴다가도 부하들을 위해서라면 온몸을 내던졌던 사람. 그 넉넉한 성품 덕분에 강주혁에게는 항상 태산처럼 여겨지던 사람.
이제 그 산을 떠나서 홀로 서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고도 아쉬웠다.
"안 팀장님?"
강주혁은 옆 파티션에 있던 안다정을 찾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고개만 들었다.
"축하해요."
안다정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강주혁은 그녀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것을 발견했다.
강주혁은 감정을 드러내는 걸 꺼리는 안다정이 내비친 감정이 당혹스러우면서도 기꺼웠다. 회귀 전에는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 버렸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인연을 쌓았다.
검사 강주혁의 스승은 아버지였고 권사 강주혁의 스승은 권대호였다. 헌터 강주혁의 스승은 회귀 전의 안다정이었다. 안다정에게 많은 걸 빚진 강주혁은 공략 1부를 떠나는 걸 힘들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그녀라고 생각했다.
"화, 화장실 좀……."
강주혁과 눈이 마주친 안다정은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사무실을 떠났다.
"쟨 또 왜 저러냐?"
유덕현은 일부러 실실 웃으면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게요. 퇴사하는 것도 아닌데."
"네가 자기보다 먼저 임원 되는 게 속상해서 그런 모양이지."
강주혁은 유덕현과 함께 어색하게 웃었다.
"공 팀장님."
공허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강주혁과 짧지만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이사님 아니었으면 못 버텼을 거예요."
공허진이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코끝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공 팀장님이 잘해서 그런 거죠. 같은 팀인데도 자주 자리를 비워서 너무 미안하네요. 그만큼 공 팀장님을 믿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줘요."
"자신은 없지만……열심히 해 볼게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염치 불고하고 부탁할게요. 우리팀 잘 이끌어줘요."
"네. 이사님."
공허진은 슬픈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주 대리님."
이번 전투로 대리로 승진한 주선우가 활짝 웃어 보였다.
"모자란 팀장 잘 따라줘서 정말 고마워요."
"함께 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이사님 덕분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느낌이네요."
주선우는 강주혁이 내민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굳은 악수를 나눴다.
같은 시기에 회사를 들어왔는데 한 사람은 대리가 되고 한 사람은 이사가 되었다. 주선우도 결코 늦은 진급은 아니었지만 강주혁 때문에 빛이 바랜 감이 있었다.
하지만 주선우는 그런 걸로 앙심을 품을 만큼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다. 강주혁은 그런 주선우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미안하기도 했다. 주선우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를 과소평가했으니까.
"정석 씨는 이거 좀 들어요."
"네?"
강주혁은 자신과 감동적인 작별 인사를 나누려고 무게를 잡은 윤정석에게 상자를 가리켰다.
"요즘 그런 거 시키면 갑질 신고당합니다."
"나한테 찍히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강주혁이 악마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부장님, 이래도 되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나도 강주혁 라인이다. 떫으면 퇴사해."
"아니, 죽을 고생하고 겨우 돌아온 사람한테 나가라고 하시는 건 좀……."
윤정석은 구시렁거리면서도 강주혁이 가리킨 상자를 들었다. 강주혁 나머지 상자를 들고 사무실 입구로 걸어갔다.
"최연소 임원 축하드려요!"
"보고 싶을 거예요!"
다른 직원들도 강주혁을 전송하러 나왔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강주혁은 들고 있던 상자를 윤정석에게 넘긴 후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생 많았어요!"
"임원 됐으니까 밥 많이 사 주세요!"
"물론입니다. 자주 내려올게요."
"임원이 사무실에 자주 내려오면 불편해서 일 못 해. 가끔 보자. 가끔."
유덕현의 잔소리에 강주혁은 웃음을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다.
엘리베이터 안.
"정석 씨."
"네. 이사님."
"고마워요."
"별말씀을."
윤정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강주혁은 그가 자신에게 보여준 무한한 신뢰와 대범함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일하는 장소는 달라졌지만 저는 여전히 제가 정석 씨의 사수라고 생각합니다."
"사수요?"
"정석 씨는 제 부사수나 마찬가지예요."
회귀 전에는 항상 그랬다. 위로는 유덕현과 안다정이 강주혁을 이끌어줬고 아래에는 윤정석이 받쳐주었다.
"공 팀장도 있잖아요."
"부사수가 반드시 한 명일 필요는 없죠. 아무리 바빠도 퇴근 후의 특훈은 빼먹지 않을 겁니다."
"이사님 약속이니까 믿겠습니다."
강주혁이 자신과의 특별한 인연을 이어간다고 생각해서인지 윤정석은 상당히 신나 보였다.
"그리고 한 가지 당부할 게 있습니다."
"뭔데요?"
강주혁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 윤정석의 손을 빌린 이유이기도 했다. 그와 따로 할 얘기가 있었으니까.
"주선우 대리를 잘 부탁합니다."
윤정석이 눈치를 잘 안 봐서 그렇지 눈치가 없지는 않다. 강주혁이 어떤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잘 알 것이다.
실질적으로 강주혁이 윤정석의 사수 노릇을 했지만 공식적으로 윤정석의 사수는 주선우다. 하지만 윤정석이 두 단계나 특진하는 바람에 족보가 꼬여도 단단히 꼬여버렸다.
졸지에 부사수보다 진급이 늦어져 버린 주선우는 억울한 심정일 것이다. 윤정석이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회사 업무로 실적을 쌓은 것도 아니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게다가 윤정석은 조금만 자기보다 약하다고 생각되면 이겨 먹으려면 고약한 습성이 있다. 마법사인데다가 재능도 평범한 수준인 주선우에게는 공허진처럼 윤정석을 두들겨 팰 수 있을 만한 전투력이 없다. 그러니 윤정석의 태도에 따라서 주선우의 회사 생활이 엄청나게 꼬일 수도 있었다.
"저도 선우 형이 아주 좋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솜씨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도 알고요."
윤정석은 예상외의 반응을 보였다.
"제가 이렇게 되는 바람에 심란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고요. 걱정 마세요. 저 때문에 선우 형이 기분 나빠할 일은 없을 테니까."
"지금 한 말 기억할게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강주혁은 의젓한 태도로 말하는 윤정석을 보면서 안도했다. 윤정석은 씩 웃어 보였다. 확실히 이번 일을 겪으면서 철이 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24층에 도착했다. 복도의 인테리어가 고급 호텔처럼 으리으리했다.
"여기는 공기부터 다른데요?"
"원래 전무님들 집무실이 있는 층인데 회장님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 주셨어요."
원래는 20층부터 한 층씩 올라와야 하는데 신태원 회장은 곧바로 강주혁을 전무들이 있는 층으로 보냈다.
어차피 금방 전무까지 올라갈 테니 중간에 번거롭게 방을 옮기지 말고 미리 전무 집무실을 쓰라는 말도 덧붙였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신태원은 강주혁이 양준기 전무가 쓰던 집무실을 쓰도록 만들었다. 실력으로 윗사람을 제끼면 그 사람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인지도 몰랐다.
"부럽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최소 20년은 걸릴 것 같은데……."
"대개는 그렇죠."
강주혁도 회귀 전의 시간까지 합치면 그 정도 되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강주혁은 약간의 설렘을 가진 채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정장차림에 단아한 인상을 주는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주혁에게 인사를 했다. 갑작스러운 미녀의 등장에 윤정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사님의 수행 비서를 맡게 된 채윤정입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