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교주를 잡을 겁니다
윤정석의 길 안내에 따라 블랙 헌터 근거지에 도달한 헌터 연합군은 우선, 수풀에 몸을 숨겼다. 수백에 달하는 인원이었지만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서 문제가 없었다.
"올라가는 게 문제군."
신태원이 까마득한 절벽을 바라보면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윤정석의 설명에 따르면 블랙 헌터의 근거지는 절벽 위의 고지대에 있다. 올라가는 방법은 암벽등반과 비좁은 동굴을 이용하는 것뿐.
암벽등반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그만큼 노출될 위험도 크다. 동굴 통로는 가끔 보초가 돌아다닌다.
이쪽이 압도적으로 머릿수가 많다면 그냥 들이닥쳐도 되겠지만 적들의 숫자가 정확하게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서 그렇게 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통로가 한 사람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서 적들에게 발각될 경우 한 명씩 올라가다가 각개격파를 당할 가능성이 컸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강주혁이 앞으로 나섰다. 회장들이 그를 바라봤다.
팀장 주제에 나섰다고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강주혁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까.
"방법이 있나?"
박종근 회장이 물었다.
"제가 윤정석 사원을 데리고 동굴 쪽으로 길을 뚫겠습니다. 들키지 않게 보초들을 암살할 수 있습니다."
신태원은 다른 회장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나랑 박 회장이 뒤따르지."
동굴이 끝나는 지점에서 적에게 협공당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강한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는 게 좋다. 그들이 버티면서 적들을 밀어내야지 나머지 사람들이 빠져나올 수 있다.
"감사합니다. 2분 정도 지난 후에 따라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석 씨, 가죠."
"네. 팀장님."
강주혁은 길잡이로 윤정석을 데리고 갔다. 윤정석은 금세 동굴 통로로 진입할 수 있는 벽을 찾아냈다.
강주혁이 벽을 짚자 손이 빨려들어 갔다. 숲에 숨어있는 헌터들도 이걸 보고 있을 것이다.
"갑시다."
강주혁도 앞장서서 들어갔다. 동굴 안은 칠흑 그 자체였다.
강주혁은 리치의 팔찌를 이용해서 자신과 윤정석에게 소음 제거 마법을 걸었다. 투명화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생략했다.
"이쪽으로 쭉 가시면 됩니다."
윤정석은 뒤에서 길 안내를 했다. 두 사람은 어두운 통로를 이용해서 한참을 올라갔다.
척.
기척을 느낀 강주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윤정석도 멈춰 섰다.
전방에서 두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척만으로도 제법 실력이 있는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근처까지 다가오면 투명화도 소음 제거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통로는 검을 휘두를 수도 없을 만큼 비좁았다.
휙!
강주혁은 멸마검을 냅다 집어던졌다.
푹!
아무것도 모른 채 일렬로 걸어오던 두 사람은 검 하나에 나란히 목이 꿰뚫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망했다.
"와……."
"쉿."
"죄송……."
강주혁은 시체를 누여놓고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동굴을 따라 올라갔다.
가는 길에 조우한 블랙 헌터 세 사람을 비슷한 방식으로 제거했다.
"다 왔습니다."
윤정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저 멀리서 작은 빛이 보였다.
"보초가 있군요."
가까이 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동굴이 끝나는 지점에 적들이 몰려있었다. 그들과 싸우다 보면 적들에게 금방 포위될 것이다.
"우리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죠."
잠시 후, 신태원을 포함한 회장들이 도착했다. 그들 뒤로 사장들이 따라붙었다.
"수고했네."
동굴 밖으로 나가는 통로를 확인한 신태원이 강주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보초들이 많습니다. 한 번에 치고 나가야 합니다."
신태원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를 돌아봤다.
"하 회장."
"나 불렀수?"
허리가 구부정하고 빼빼 마른 노인이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틈을 이용해 앞으로 나왔다.
양준기 전무의 마석 횡령 사건으로 태원공략과 엮였던 영광공략의 회장 하진호였다.
"하 회장이 힘 좀 써줘야 할 것 같소."
"그럽시다. 자리 좀 비켜주게."
강주혁과 윤정석으로 벽에 몸을 바싹 붙여서 하진호가 지나갈 수 있게 했다.
화르르.
하진호의 손바닥에서 불이 생성되었다. 그는 불씨를 주무르는 것처럼 손을 움직이다가 앞으로 쏘아 보냈다.
파이어 볼보다 훨씬 작은 불덩이는 꼭 파이어 볼트 같았다. 통로가 좁아서 일부러 작은 불씨를 만든 모양이다.
"좀 시끄러울 거야. 뛰쳐나갈 준비하게."
저 정도 불덩이가 터져봤자 얼마나 시끄러울까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대형 공략회사의 회장이 만든 불덩이니 절대 평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강주혁은 자세를 고쳐 잡고 돌진할 준비를 했다. 단숨에 바깥으로 나가 몰려드는 적들을 밀어내야 한다. 그래야지만 좁은 통로에 있는 아군들이 빠져나올 수 있다.
콰쾅!
파이어 볼트처럼 보이는 불덩이는 동굴이 끝나는 지점에서 찬란한 빛에 휩싸이더니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동굴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었다.
"우와악!"
선두그룹에 있는 사람들 중 최약체인 윤정석은 폭발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강주혁이 그를 잡아주었다.
넘실대는 화염이 동굴을 가득 채우면서 강주혁이 있는 곳까지 밀려들었으나 하진호가 손짓을 하자 모두 사그라졌다.
"길을 뚫겠습니다!"
강주혁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질주했다. 윤정석도 곧바로 그를 따라 달렸다. 회장들과 사장들이 뒤따랐다.
두 사람은 화염의 잔향과 열기가 남아 있는 동굴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끝에 도달해 보니 폭발의 여파로 동굴의 입구가 살짝 넓어져 있었다. 근처에 있던 보초들은 모두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동굴 밖은 탁 트인 평지였다.
"적이다!"
"막아라!"
사방에서 블랙 헌터들이 모여들었다. 삽시간에 수십 명이 강주혁을 에워쌌다.
서걱! 스걱!
강주혁은 다가오는 블랙 헌터들을 베어 나갔다. 그러면서 적들의 머릿수를 대충이나마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백, 2백?’ 윤정석이 수백이라고 얘기하기는 했지만 셀레스티얼과의 삼파전에서 사망한 이들이 거의 백 명 가까이 되었다, 그래서 숫자가 꽤 많이 줄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긁어모은 거지?’ 하지만 근거지에 있는 적들은 여전히 백 명은 가볍게 넘는 수준이었다. 수적으로는 공략회사 연합군과 거의 비등한 수준. 피해 없이 싸움을 끝낼 수는 없었다.
"죽어라!"
한 블랙 헌터가 창을 내질렀다.
"우악!"
적들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던 윤정석이 기겁을 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휙!
하지만 예리한 창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고 쫓아갔다.
캉!
창날이 윤정석의 옆구리를 찢어놓기 전, 강주혁의 검이 창을 걷어냈다.
블랙 헌터는 재빨리 내지른 창을 회수하려고 했으나 강주혁의 검이 더 빨랐다.
서걱!
날아오른 머리가 땅에 툭하고 떨어졌다.
"후우, 감사합니다."
윤정석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석 씨는 뒤로 빠져요."
"네?"
"이놈들 대부분이 우리네 부장님들보다 살짝 모자라는 실력자입니다. 아직은 정석 씨가 싸울 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되도록 사려요."
"네. 팀장님."
윤정석은 군말 없이 뒤로 물러섰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도 싸울 수 있다면서 허세를 부렸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철들었군.’
강주혁은 그런 윤정석이 대견스러웠다.
"크악!"
"막아!"
블랙 헌터들은 파죽지세로 몰려왔다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쪽은 한국을 대표하는 공략회사 회장들과 사장들인데, 저쪽은 부장급 밖에 안 되니 부딪히는 족족 갈려 나갔다.
동굴을 빠져나온 헌터들이 많아지고, 블랙 헌터들도 계속해서 모여들자 자연스럽게 전선이 확장되었다. 이때부터 헌터들 측에서도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크억!"
"힐러! 힐러!"
특히, 직급이 낮은 젊은 헌터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블랙 헌터들에게 당했다. 임원들이 있는 쪽은 헌터들이 유리했으나 다른 쪽은 블랙 헌터들이 유리했다.
‘역시 영약 덕분인가?’
한태성도 블랙 헌터에게 받은 약으로 단기간에 급성장할 수 있었다. 부작용도 컸지만 블랙 헌터들이 그런 걸 따질 것 같지는 않았다.
권대호에게 들은 광화문 전투도 떠올랐다. 임원급 고수의 수는 헌터측이 많았지만, 실력의 평균은 블랙 헌터측이 우세했다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블랙 헌터들은 부장급 실력자가 대부분이었다. 다행인 건 아직까지 그 이상의 실력자는 보이지 않다는 점. 강주혁의 기억상 이전 전투에서 셀레스티얼에게 죽은 궁사가 유일한 것 같았다.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임원들까지 총출동한 헌터측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략회사 헌터들 중에는 부장급 실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이쪽 피해도 커질 것이다.
‘방법이 없을까?’
단순히 사상자가 많아지는 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사망자가 많이 나오면 광야의 정기공략에 차질이 생긴다.
공략회사는 많지만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광야를 통제할 수 있는 공략회사는 그리 많지 않다. 후발주자로 들어왔다가 문제가 누적되어 쫓겨난 한준공략의 경우처럼 광야를 통제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체할 수 있는 인원과 조직이 보충될 때까지 광야가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서울이 위험해진다.
"정석 씨."
"네. 팀장님!"
강주혁은 뒤쪽에서 단검만 던지고 있는 윤정석에게 물었다.
"교주는 어디에 있어요? 다른 놈들이랑 구분할 수 있습니까?"
블랙 헌터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유는 세뇌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정석은 교주가 직접 자신을 세뇌했다고 말했다. 세뇌로 충성심을 강제로 주입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교주에게 세뇌를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교주를 죽이면 블랙 헌터들의 세뇌가 풀릴지도 모른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구심점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와해될 것이다.
"로브를 입고 있었습니다!"
"고마워요."
강주혁은 적들이 몰려오기를 기다렸다가 주작비상보를 쓰면서 높이 도약했다.
"으아악!"
적들을 날려버리는 것보다는 정찰이 목적이었다. 공중에 떠 있는 동안 강주혁은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저기 있다.’
교주를 찾는 건 어렵지는 않았다. 다른 블랙 헌터들은 헌터들에게 몰려가고 있는데 혼자서 반대로 가고 있었으니까. 남들과 다른 복장도 눈에 띄었다.
탁!
강주혁은 지상에 착지한 후 윤정석에게 말했다.
"정석 씨, 따라오지 말고 여기서 싸워요!"
"네? 어디 가시려고요?"
"교주를 잡을 겁니다."
"교주요?"
강주혁은 대답을 하는 대신, 등에 메고 있던 청룡검을 꺼내 들었다.
‘간다.’
강주혁이 대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광풍이 불어 닥쳤다. 바람은 적들을 찢어발기면서 갈수록 빠르고 강해졌다.
"으아악!"
검의 사정거리에 있던 모든 것들이 잘려나갔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막아라!"
"공격해! 공격하라고!"
블랙 헌터들은 강주혁을 막기 위해서 달려들었으나 뭔가 해보기도 전에 몸이 썰려 나갔다.
"활을 쏴!"
원거리 공격도 무용지물이었다. 엄청난 풍속 탓에 내공을 실은 화살조차 방향이 꺾여 버린 것이다. 마법 역시 마찬가지. 화염과 서리는 흩어졌고 번개는 굴절되었다.
강주혁은 단신으로 블랙 헌터의 진형을 뚫어버리면서 길을 만들어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시체들만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블랙 헌터들의 뒤편으로 나온 강주혁은 저 멀리 보이는 로브 차림의 사내를 향해 질주했다.
"교주님께 간다!"
"잡아라!"
블랙 헌터들은 보법을 펼치면서 강주혁을 추격했으나 결코 따라잡지는 못했다.
추격자의 수는 많지 않았다. 병력을 뺄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형이 무너졌다!"
"공격!"
"밀어붙여!"
등 뒤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블랙 헌터들의 진형이 무너진 틈을 타 헌터들이 기세를 끌어올린 것이다. 헌터들이 내뿜는 투지가 강주혁에게도 느껴졌다.
궁지에 몰린 블랙 헌터들은 강주혁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탁!
단숨에 들판을 가로지른 강주혁이 높이 도약했다. 달아나던 교주가 살기를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저놈이?’
교주는 한때 아버지의 부하 직원이었던 김동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