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죽어라!
이윤철 사장이 연락을 돌리기 시작한 지 두 간 만에 수백 명의 헌터가 톨게이트 앞 광장에 집결했다. 평소에는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던 공략회사들이 블랙 헌터 타도라는 대의 앞에 단결한 것이다.
신태원 회장을 포함한 과거의 거물들은 경쟁자이기 전에 전우였다. 그래서 공공의 적이 나타났을 때 쉽게 뜻을 모을 수 있었다. 많은 사상자가 나왔던 2차 웨이브가 블랙 헌터들이 일으킨 거라는 사실도 큰 영향을 줬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대형 공략회사의 수장들은 모두 죽은 헌터들의 원수를 갚고 싶어 했다. 동시에 그렇게 위험한 존재가 있다면 되도록 빨리 제거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 결과, 당장에 공략에 들어가야 하는 헌터들을 제외한 모든 인력이 동원되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꼭 군대처럼 보였다. 공략이 아니라 전쟁을 벌이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헌터 관리국은 자신들이 주도하지 않는 합동 작전에 대해서 항의하고 해산을 건의했으나 회장들은 헌터 관리국과 무능과 부패를 이유 삼아 묵살해 버렸다.
"뭐야? 왜 이래?"
"왜 갑자기 모이라고 했는지 아는 사람?"
헌터들은 갑작스러운 소집령에 당혹스러워했다. 그들은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르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무슨 일 있나?"
"웨이브 데이도 아닌데……."
모여 있는 헌터들을 보고 있는 시민들도 의아해했다.
하나하나가 살인 기계나 마찬가지인 헌터들이 떼거리로 모여 있으니 불안한 눈빛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강주혁 역시 그런 분위기를 느끼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광공략 소속의 헌터들은 모두 자기네들 회사로 돌아갔다. 크리스 바셋도 일이 어떻게 풀릴지 궁금하다면서 함께 하기로 했다.
"피곤하지는 않냐?"
유덕현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습니다."
"안 팀장이랑 허진이는?"
"저도 괜찮아요."
"커피 마셔서 괜찮아요."
"이번 일 끝나면 다들 좀 푹 쉬어."
"진짜죠?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예요."
휴가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피로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것 같았다.
"강주혁 팀장, 정석 씨."
그때, 태원공략 별관 입구에 서 있던 이윤철 사장이 손짓을 했다.
"예. 사장님."
"이쪽으로 오게."
"정석 씨, 갑시다."
강주혁은 윤정석을 데리고 운집한 헌터들의 앞쪽으로 나갔다. 이미 헌터들이 출진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에 윤정석은 더 이상 포로행세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렇게 모인 이상, 블랙 헌터가 정보를 입수하더라도 대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별관 입구에는 신태원과 박종근을 포함한 각 회사의 회장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전 시대의 전설들이었다. 그리고 평사원 입장에서는 하늘과도 같은 사장과 임원들이 그들을 보좌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거물급 헌터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그들이 풍기는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각성자가 아니라 일반인이었다면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기절해 버렸을 것이다.
"으……."
윤정석은 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역시도 이런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강주혁과 윤정석이 신태원에게 인사를 했다.
"자네가 윤정석 사원인가?"
"네. 회장님."
"정말로 큰일을 해냈군. 고맙네."
"아닙니다!"
당황한 윤정석이 큰소리로 외쳤다. 업계의 원로들은 윤정석의 패기 넘치는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머금었다.
신태원 회장도 씩 웃더니 강주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강주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전히 미묘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이번 일이 자네의 아이디어였다고 들었네."
"네. 회장님."
"우리가 자네 덕을 톡톡히 보는군."
"과찬이십니다."
강주혁은 고개를 숙여서 쓴웃음을 감추었다. 신태원 회장의 말이 마치 너는 아직 우리 사람이 아니라는 뜻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도 그런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칭찬을 들어 마땅할 일을 했는데도 강주혁을 바라보는 원로들의 시선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대부분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강주혁을 봤고 몇몇 이들은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오직 대현공략의 박종근 회장만이 강주혁을 보면서 대견스럽다는 듯이 웃어주었다.
‘다들 알고 있군.’
강주혁이 회장들 모두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이 자리에 없는 스승 권대호가 무척 아쉬워졌다.
"형님, 한 말씀 하시죠. 다들 누구랑 싸워야 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현공략의 박종근 회장이 다가와 신태원에게 말했다.
신태원은 다른 원로들을 쓱 훑어보았다. 그들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 노릇을 할 사람으로는 신태원이 제격이기는 했다.
"알겠네."
신태원이 회장은 태원공략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헌터들은 웅성거림을 멈추고 신태원을 바라보았다.
로비 입구는 광장바닥보다 기껏해야 계단 세 개 정도밖에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 선 신태원은 아주 높은 곳에서 헌터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신태원이 입을 열었다.
어조는 담담했지만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광장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태원공략의 신태원 회장입니다."
그 말 한마디로 발언권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신태원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여기에 있는 노인네들을 대표해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다들 일 하느라 바쁠 텐데 이렇게 불려 나와서 당혹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항상 떠들썩하던 광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우연히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도 그 분위기에 압도당해 덩달아 발소리를 죽였다.
"다들 최근에 블랙 헌터들이 말썽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우리의 눈을 피해 광야에 숨어들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수는 수백에 가깝게 늘어났습니다."
헌터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는 자도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의 동료들을 앗아간 2차 몬스터 웨이브는 그들이 일으킨 것입니다."
소란은 더 커졌다. 하지만 신태원이 한 손을 들자 광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말하는 사람이 신태원이 아니었다면 아마 아무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있는 대다수는 블랙 헌터와의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건 저를 포함한 늙다리들의 싸움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칼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언제든 그 대상이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한준공략의 헌터들이 귀화초 서식지를 조사하러 나섰다가 블랙 헌터들에게 전멸한 사건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2차 몬스터 웨이브로 인한 참사는 헌터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적들의 규모를 생각했을 때 여기에 있는 몇몇은 오늘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나는 군대의 사령관이 아니라 기업의 경영자일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 죽음을 명령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위험을 원치 않은 사람은 지금 떠나도 좋습니다."
살고 싶으면 떠나라. 하지만 강주혁의 예상대로 어느 누구도 떠나지 않았다.
많지는 않겠지만 블랙 헌터들을 타도해야 한다는 대의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최근의 사건들로 동료를 잃은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직장을 잃기 싫어서일 것이다. 공략회사의 수장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자리다. 그러니 이 자리를 떠나는 건 곧 회사를 떠나는 걸 의미했다. 대형 공략회사를 다님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를 모두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일에 뜻을 모아줘서 고맙습니다. 모두 무운을 빕니다."
신태원 회장은 로비 입구에서 내려갔다. 헌터들이 좌우로 흩어지면서 길을 내주었다.
신태원 회장을 비롯한 원로들이 그 길을 따라 톨게이트로 걸어갔다. 그들이 완전히 지나간 후 모여 있는 헌터들이 원로들을 따라나섰다.
* * *
블랙 헌터들의 근거지는 광야의 미개척 지역에 있는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고지대는 강남 게이트단지에 필적할 정도로 넓었고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아래쪽에서 위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지대 위로 올라올 수 있는 루트가 상당히 제한적이라서 방어에도 용이했다.
교주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불길한 예감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다.
"교주님."
그때, 강주혁의 공략팀이 진입한 탑으로 정찰을 나갔던 조직원이 교주를 찾아왔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멸한 것 같습니다."
"전멸이요?"
교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교주님 말씀대로 덩굴을 이용해서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그곳에는 공중에 떠 있는 섬이 있었습니다."
교주는 태연했다. 다른 사람은 몰랐지만 그는 광야에 부유 섬이 여러 개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요?"
"탑 꼭대기에도 교전의 흔적이 있었습니다만, 사망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탑의 꼭대기와 부유 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끊어져 있었습니다."
"부유 섬까지 따라간 모양이군요."
"네. 교주님."
"그 후에 강주혁과 일행이 복귀했고요."
좀 전에 공략회사 내에 심어놓았던 정보원이 태원과 신광의 합동공략팀이 복귀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웨이포인트를 만들었군.’
탑은 블랙 헌터들이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탑으로 복귀한 것은 아니다.
유일한 방법은 현장에서 발견한 마석을 이용해서 웨이포인트를 만드는 것이다. 마석이 넘치도록 많고 전문기술자가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강주혁만 복귀했다면 형제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군요."
교주는 침음을 흘렸다.
제아무리 강주혁이 강해도 백여 명의 고수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마존으로 완전히 각성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렇다고 강주혁 일행 중에 강주혁만큼 강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크리스 바셋이라는 미국인이 명성만큼 대단한 헌터가 아니라는 것은 교주도 알고 있었다.
안다정이나 김정현이 걸출한 실력자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래도 강주혁만큼은 아니었다.
교주는 강주혁이 승리한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저주스러웠다.
‘언제까지 나를 방해할 셈이냐.’
처음에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하찮은 놈이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검술도 4분의 1밖에 없었고, 재능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두각을 드러내더니 교주의 계획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강력한 존재로 거듭났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건지 교주로서도 알 수 없었다.
신대성이 성에 차지 않았던 교주는 한 때 강주혁으로 신대성을 대체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강주혁을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통제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지켜보았지만 강주혁으로 인해 대계가 어그러질 조짐이 보이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내가 직접 갔어야 했다.’
공략팀 하나를 잡겠다고 백여 명의 고수들을 투입한다고 결정을 내렸을 때 측근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교주는 그것으로도 모자란다면서 교단에서 가장 뛰어난 궁사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세뇌를 어쩔 수는 없겠지.’
교주도 윤정석이 강주혁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살려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실하게 세뇌를 시켜놓았기 때문에 윤정석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자백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교주님!"
그때, 다른 형제가 교주에게 다가왔다. 표정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입니까?"
교주가 고개를 돌렸다.
"공략회사 헌터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뭐라고요?"
쾅!
그때, 저지대와 고지대를 연결해 주는 동굴 입구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헌터가 폭연을 헤치면서 튀어나왔다.
얼굴이 상당히 낯익었다.
"죽어라!"
강주혁과 윤정석 두 사람이 앞을 막아서는 형제들을 베어나갔다. 그들 뒤로 공략회사의 헌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