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잘 가라
아침 해가 밝아왔다.
어둠이 물러나자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늘어선 시체들이 보였다.
한밤중의 추격전은 보스 몬스터까지 포함된 삼파전으로 이어졌다.
셀레스티얼의 위용과 강맹함 때문에 싸움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강주혁 일행 역시 그 시간과 긴장감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강했다.
반면에 블랙 헌터들은 윤정석과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사했다. 대부분 셀레스티얼에게 일부는 강주혁 일행에게 죽었다.
"다들 괜찮아요?"
강주혁은 물었다.
"네. 팀장님."
공허진이 말했다.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눈빛만큼은 생생했다.
셀레스티얼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 뒤에서 지원만 했던 주선우는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하지만 마나를 모조리 쥐어 짜낸 터라 눈이 퀭했다.
김정현과 안다정도 초췌해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반면에 체력이 모자란 신유정과 크리스 바셋은 계속 싸우는 게 어려울 만큼 힘들어했다.
순간적인 전투력만큼은 강주혁에 비견될 정도로 강한 크리스 바셋이지만 싸움이 길어지면서 힘이 빠졌다.
"아직 더 싸울 수 있습니다."
윤정석이 씩씩하게 답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직후 곧바로 강주혁 일행에 합류해 셀레스티얼과 블랙 헌터들과 싸웠다.
아직 혼자서 블랙 헌터들을 감당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미끼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틈을 만들어줬다.
"하아, 하아."
최후의 블랙 헌터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변절해 버린 윤정석을 노려 보였다.
다른 블랙 헌터들이 있을 때는 후방에서 자신의 장궁으로 저격만 했다. 그의 궁술은 셀레스티얼에게도 유효한 피해를 입힐 만큼 강했다. 종종 강주혁 일행에게 기습적으로 날려댄 화살 역시 위협적이었다.
강주혁은 저 최후의 블랙 헌터가 귀화초 수색작전 때부터 존재감을 드러냈던 저격수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쪽으로 건너오기 전에 크리스 바셋을 잠시 전투 불능으로 만든 것도 저자였다.
하지만 원거리에서든, 근접전에서든,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는 안다정과 달리 저격수는 활을 들 때만 강했다. 전방을 지켜주던 블랙 헌터들이 모두 도륙당하고 셀레스티얼과 직접 마주하자 약점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검술도 수준급이었지만 궁술만큼은 아니었고 부장급 블랙 헌터들을 고블린처럼 썰어버리는 셀레스티얼과 합을 나누자 금방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척!
셀레스티얼이 자세를 잡고 블랙 헌터에게 창을 겨누었다. 마에 물든 자들에 대한 셀레스티얼의 증오는 결코 꺼지지 않는 것 같았다.
덕분에 일행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셀레스티월에게 피해를 누적시킬 수 있었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던 갑옷도 모두 떨어져 나가고 지금은 회색의 피부만 남아 있었다.
게다가 하늘을 뒤덮은 채 끊임없이 벼락을 떨어뜨려대던 구름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피해가 누적되자 구름을 통제하는 힘도 상실해 버린 것 같았다.
모두 블랙 헌터들을 베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 강주혁 일행을 무시한 대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 죽어가는 블랙 헌터보다 강주혁 일행이 자신에게 더 큰 위협일 텐데도 셀레스티얼은 자신의 사냥을 멈출 줄 몰랐다.
촤아아악!
셀레스티얼이 공중에서 살짝 뜬 상태로 블랙 헌터 저격수에게 쇄도했다.
"공격해요!"
강주혁 일행이 등을 보인 셀레스티얼에게 달려들었다.
"제기랄."
저격수는 옆으로 몸을 빼는 동시에 장궁으로 셀레스티얼에게 활을 날리려고 했다. 모자라는 검술보다는 전매특허인 궁술로 승부를 보려는 것 같았다.
서걱!
하지만 저격수가 물러난 거리보다 셀레스티얼의 창이 더 길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뱉은 ‘제기랄’은 저격수의 유언이 되었다.
"으아아아!"
가장 먼저 셀레스티얼에게 짓쳐 들어간 사람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김정현이었다.
하지만 셀레스티얼은 곧바로 몸을 회전시키면서 창을 휘둘러 그의 망치를 쳐냈다.
캉!
"윽!"
엄청난 힘에 김정현은 자세를 잃고 비틀거렸다. 셀레스티얼은 곧장 창을 찌르려고 했으나 안다정이 날린 화살이 어깨에 꽂히는 바람에 움찔하고 말았다.
푹!
강주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공허진이 걸어준 홀리 웨폰으로 배로 강해진 칼날이 셀레스티얼의 명치에 박혀 있는 황금색 구체를 꿰뚫었다.
크아아아아!
셀레스티얼이 끔찍한 비명을 토해냈다.
그리고 강주혁의 머리통을 찍기 위해서 주먹을 들었다.
"뒈져라!"
하지만 윤정석이 몸을 날려서 손을 베었다. 그의 검으로는 셀레스티얼의 피부를 벨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격을 저지하기에는 충분했다.
쿵!
셀레스티얼이 무릎을 꿇었다. 강주혁을 뜯어내려고 들었던 팔이 힘없이 축 처졌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잘 가라."
강주혁은 자신의 모든 내공을 칼날의 한 지점으로 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터뜨렸다.
쾅!
무극검으로 인해 셀레스티얼의 몸이 완전히 터져 버렸다.
회색빛의 피부는 인간의 피부와 비슷한 질감이었지만 피를 흘리진 않았다.
이번에도 살점이 터지는 대신 그냥 재로 변해서 흩어져 버렸다.
블랙 헌터 전원 사망. 보스 몬스터 소멸. 강주혁 일행은 전원 생존. 중상자도 없었다.
"끝났다!"
"이겼다!"
일행은 만세를 외치면서 기뻐했다. 신유정은 기쁜 마음에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승리의 기쁨은 밤새도록 싸우면서 쌓인 피로감을 잠시 잊게 만들어 주었다.
"고마워요. 정석 씨한테 큰 빚을 졌네요."
강주혁은 마지막 순간에 셀레스티얼의 공격을 막아준 윤정석과 굳은 악수를 나눴다.
"굳이 제가 안 도와드렸어도 알아서 하셨을 거잖아요."
"그래도 훨씬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어요. 몸은 좀 어때요?"
"좀 피곤한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세뇌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셀레스티얼에게 얻어맞으면서 풀려버렸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정석 씨!"
태원공략의 헌터들이 윤정석에게 몰려들었다.
싸우는 동안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었지만 다들 할 말이 많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팀장님이 시킨 특별임무를 완수하고 왔죠."
윤정석이 가슴을 활짝 펴면서 으스댔다.
"특별임무요?"
"블랙 헌터 조직에 들어가서 정보를 캐내라고 하셨죠."
"그, 그건 회사 업무가 아니지 않나요?"
주선우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 아니죠. 하지만 우리 회사도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블랙 헌터는 헌터 업계 전체의 문제다.
헌터 업계의 선두주자인 태원공략도 블랙 헌터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맞아요. 오늘 일만 봐도 그렇죠."
안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뿐만이 아니다. 신광과의 합동 공략에서는 블랙 헌터들과 거래를 한 한태성이 문제를 일으켰다. 대현공략과의 합동 공략에서는 블랙 헌터들이 난입했다.
누군가는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헌터 관리국이 그 모양이니 누구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정석 씨가 퇴사까지 해가면서 그러는 건……."
공허진은 윤정석이 대의를 위해서 너무 많은 걸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윤정석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믿기 어려울 것이다.
"사장님도 알고 계세요. 정석 씨가 임무를 마치면 회사에 복귀시키기로 했어요. 비공식적인 거긴 하지만 엄연히 회사 업무의 연장선에서 한 일이니까 실적으로 인정해 주실걸요."
"오? 진짜요?"
"정말 다행이에요."
주선우와 공허진은 그제야 얼굴을 폈다.
"제가 많이 보고 싶으셨군요."
윤정석은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공허진이 딱 잘라서 말했다.
"나갈 때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전부 쇼였군요."
주선우는 강주혁과 윤정석을 보면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미리 말을 못 해줘서 미안합니다. 정석 씨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어요.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저랑 정석 씨, 그리고 이윤철 사장님밖에 없어요."
"알겠어요.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죠."
공허진과 주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서운한 표정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저, 말씀 중에 실례해요."
태원공략 헌터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유정이 끼어들었다.
"아, 정신이 없어서 소개하는 걸 깜빡했군요."
강주혁은 신광의 헌터들과 윤정석이 인사를 나누도록 했다.
"나이스 투 밋 유."
크리스 바셋과 악수를 나눈 윤정석은 초등학교 다닐 때 주워들은, 그리고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영어문장을 말했다.
"한국말 잘합니다."
"네? 아, 네."
윤정석은 멋쩍어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동안 블랙 헌터들이랑 있었던 거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거예요?"
신유정이 물었다.
"미개척 지역에 본부가 있습니다."
"위치는 알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조만간 옮길 것 같기는 하네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더 중요한 거요?"
"지난번 웨이브 데이 때 2차 웨이브가 있지 않았나요?"
"그랬죠."
"그 웨이브는 블랙 헌터들이 일으킨 겁니다."
* * *
강주혁 일행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탐색에 나섰다. 강주혁은 왕좌가 주위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계단을 찾아냈다. 지하에는 이전과 비슷한 규모의 마석 매장지가 있었다.
주선우는 마석을 이용해서 웨이브 포인트를 만들었다. 작업이 끝났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강주혁 일행은 일부러 하룻밤을 더 묵고 아침에 나갔다.
"이거 놔라! 이 개자식아!"
강주혁 일행은 일부러 윤정석을 포박해서 데리고 나갔다. 윤정석도 포로로 잡힌 척을 했다. 강주혁의 제안에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곳곳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블랙 헌터의 첩자들을 의식해서였다. 윤정석이 전향했다는 게 알려지면 블랙 헌터들은 조치를 취할 테니까.
"사장님께서 직접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강주혁은 윤정석을 데리고 가려는 감사과 직원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윤정석을 데리고 사장실로 갔다.
다행히 이윤철 사장은 사장실에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고생했네. 어서 들어오게."
톨게이트에 있는 직원으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은 건지 이윤철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사장실은 공략팀 전원이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넓었고 자리도 많았다.
"공략은?"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애썼네. 블랙 헌터들이 습격을 했다고 들었네."
"네. 정확한 수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50에서 백 명 사이로 추정됩니다."
"엄청난 숫자군. 그자들을 전부 죽인 건가?"
"저희만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보스 몬스터를 이용해서 잡았죠.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윤철은 강주혁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윤정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녀왔습니다."
일부러 포로행세를 하던 윤정석이 그제야 얼굴을 폈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우리 회사뿐만이 아니라 헌터 업계를 위해서도 큰일을 했네. 회장님께 말씀드려서 회사 차원에서 꼭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지."
이윤철의 말에 태원공략 헌터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욕까지 먹어가면서 위험한 일을 도맡은 윤정석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뭘 좀 알아냈나?"
"네. 물론입니다."
윤정석은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을 차근차근 보고했다.
"교주가 몬스터를 조정한다고?"
이윤철이 가장 주목한 부분은 교주로 불리는 우두머리가 몬스터를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수만에 달하는 몬스터를.
"네. 최근에 있었던 2차 웨이브 역시 교주가 일으킨 것입니다. 원래는 한준공략이 빠지면서 취약해진 방어선을 와해시켜서 공략회사들에게 타격을 줄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그게 막혀 버렸죠. 정찰병들이 그 원인으로 강주혁 팀장을 지목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것 때문에 이번에 살수들을 그렇게 보낸 건가?"
"네. 강주혁 팀장을 살려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이윤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공략회사 내에서 블랙 헌터의 정보원들이 있을 겁니다. 이번 일이 실패했고, 자기네들 정보가 새어나갔다는 걸 알게 되면 조치를 취할 겁니다."
강주혁이 말했다.
"놈들이 근거지를 옮기기 전에 쳐야겠군."
"네. 사장님."
"내가 회장님께 연락하지. 회장님께서 다른 공략회사들을 모아주실 거야. 신 팀장."
"네. 사장님."
"남궁천 사장에게 지금 상황 좀 설명해 주게. 오늘 당장 놈들을 쳐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신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피곤하겠지만 조금만 힘을 보태주게."
이윤철 사장이 공략팀에게 말했다.
애초에 이렇게 될 줄 알고 던전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네. 사장님."
웨이브 데이 때 죽은 헌터들을 원수를 갚을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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