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네 적은 내가 아니다
‘세뇌당했구나.’
강주혁은 자신을 향해 진한 살기를 드러내는 윤정석을 보면서 생각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동안 조직을 위해서 초개처럼 목숨을 바치는 블랙 헌터들을 많이 봐왔으니까.
정신교육만으로 그런 사람을 수백 명씩 만드는 건 국가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분명 마법이나 약물 같은 수단을 사용했을 것이다. 윤정석의 눈 색깔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다행이군.’
강주혁은 여기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 놓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덕분에 제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았습니다."
윤정석의 목소리에 광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아직 프락치라는 의심을 사고 있죠."
윤정석의 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강주혁이 덩달아 힘을 줘야 했다. 단기간에 실력이 급상승한 느낌이었다.
"팀장님의 목을 가져가서 진짜 동지로 인정받아야겠습니다."
"할 수 있으면 해봐요."
강주혁의 말에 윤정석이 발끈했다.
"그 오만한 낯짝을 찢어주마!"
윤정석이 기세를 끌어올리면서 강주혁을 압박해갔다.
챙! 캉!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강주혁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익!"
강주혁이 자신의 맹공을 여유 있게 받아내자 악에 받친 윤정석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직 멀었다. 애송이."
강주혁은 흐르는 물처럼 윤정석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동시에 그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컥!"
윤정석은 옆으로 나뒹굴었다.
스컹!
윤정석이 다리 쪽에서 확실히 벗어난 걸 확인한 강주혁은 구름다리를 지탱하고 있는 쇠사슬을 하나 끊어 버렸다.
"조심해!"
"빨리 건너!"
다리가 휘청거리자 다리 위에 있던 블랙 헌터들이 우왕좌왕했다.
"으아아악!"
몇 명은 아래로 추락했다.
남아 있는 자들은 다리를 완전히 건너기도 전에 보법을 펼치면서 강주혁이 있는 쪽으로 넘어왔다.
강주혁이 견제하기에는 수가 너무 많았다.
"쳐라!"
백호지진보로 인해 잠시 그로기상태에 빠져 있던 적들도 정신을 차리고는 강주혁을 공격했다. 윤정석의 개입 덕분에 몸을 추스릴 시간을 번 것이다.
사아아악!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화살 하나가 강주혁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캉!
강주혁은 다리를 다 끊지 못하고 화살을 막아야했다. 의문의 저격수가 계속해서 견제를 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강주혁은 다리를 끊어서 블랙 헌터의 진입을 막는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일행은 뒤쪽으로 빠진 후. 여전히 교전 중이었지만 강주혁처럼 포위당하지는 않았다.
‘플랜 B로 간다.’
강주혁은 다시 한 번 땅을 굴렀다.
콰르르.
"으아아악!"
이번에는 화염이 솟구쳐 달려드는 블랙 헌터들을 모두 태워 버렸다.
주작비상보를 사용한 강주혁은 높이 도약해서 자신을 둘러싼 블랙 헌터들을 뛰어넘었다.
원래 사신무극검을 구성하는 속성을 전환하는 데에는 상당한 내공과 집중력,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강주혁은 끝없는 수련을 통해서 그것들을 대폭 줄였고 지금처럼 격렬한 전투 중에도 수월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탁!
"팀장님!"
강주혁은 단숨에 일행 근처에 착지했다.
"크리스 헌터님은?"
"난 괜찮습니다."
크리스 바셋은 블랙헌터를 베어 넘기면서 말했다. 공허진의 응급처치 때문에 금방 상처를 털어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이대로는 위험해요. 어떡하죠?"
신유정이 강주혁에게 물었다.
블랙 헌터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이 인원으로 정면승부를 벌이면 주선우 같은 사람은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강주혁은 별들 아래 어슴푸레 드러나는 언덕을 보았다.
"안쪽으로 후퇴합시다."
"몬스터는요?"
회귀 전의 기억대로라면, 이 넓은 땅덩어리에 몬스터는 딱 한 마리밖에 없었다. 그 몬스터가 절망적일 정도로 강한 게 문제지만.
강주혁은 그 몬스터의 약점을 알고 있었지만 블랙 헌터들이 그렇지 못했다.
"이이제이로 가야죠. 몬스터 입장에서는 우리나 이놈들이랑 똑같아요. 크리스 헌터님, 제가 후미를 맡을 테니 선봉에 서주십시오. 다들 크리스 헌터님을 따라요. 목적지는 저 언덕입니다."
"알겠습니다."
일행은 강주혁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강주혁은 달려드는 블랙 헌터들을 베어나가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베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적이 달려들었다.
"팀장님! 뒤로 빠져요!"
마지막까지 강주혁의 뒤를 받쳐주던 안다정의 외침이 들여온 건 그때였다.
강주혁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뒤로 돌아서 달아났다. 눈앞에 적이 있는 상황에서 등을 보이는 건 자살행위지만 강주혁은 개의치 않았다.
펑!
머리 위에서 강렬한 마력 반응이 느껴졌다.
쏴아아!
보지 않아도 환영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경지에 오른 궁사의 환영궁은 화살 하나로 수백 개의 마력 화살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것들은 소나기처럼 쏟아져 강주혁을 노리던 블랙 헌터들을 덮쳤다.
펑! 펑!
"윽!"
"으악!"
고강한 블랙 헌터들도 강렬한 마력이 실린 화살 수십 발을 연달아 맞자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마력 화살에는 약간의 유도성능까지 있어서 바닥에 떨어지는 것 없이 모두 적들에게 꽂혔다. 덕분에 강주혁은 몰려드는 적들을 떨쳐낼 수 있었다.
"놓치지 마라!"
여전히 많은 적들이 뒤에 있었으나 이미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이쪽이에요!"
"고마워요!"
보법이라면 강주혁과 안다정도 뒤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블랙 헌터들과의 거리를 더 벌리면서 나머지 일행의 뒤를 따랐다.
강주혁의 예상대로 이 부유 섬에는 몬스터가 없었다. 덕분에 일행들도 언덕까지 멈추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등 뒤에서 블랙 헌터들이 바짝 추격하고 있었지만 앞을 막아서는 놈들이 없어서 따라잡히지는 않았다.
우르르. 콰쾅.
선두에 선 크리스 바셋이 언덕 위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짙은 먹구름이 언덕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머금은 번개들이 자꾸만 꿀렁거리면서 불길한 소리를 냈다.
‘왔다.’
이 지역의 주인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척.
선두에 선 크리스 바셋이 언덕 꼭대기에 도달하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검을 고쳐 잡았다.
"티, 팀장님……."
나머지 사람들도 굳어 버렸다. 그들은 도움을 바라는 얼굴로 강주혁을 쳐다봤다.
강주혁은 침착하게 일행과 나란히 섰다.
언덕 꼭대기의 한복판에 원형 건물이 하나 있었다. 벽과 천장이 대부분 날아간 상태여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건물의 중심에는 왕좌가 있었고, 그 위에는 황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앉아 있었다.
웨이브 데이 때 만났던 거인처럼 키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건 아니었지만 3미터가 넘는 신장은 인간 입장에서 충분히 거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거인에게서 회귀 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 일행들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눈앞의 거인이 지금까지 직접 마주한 존재들 중에서 가장 강대하다고.
절그럭.
황금 거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투구 아래의 회색빛 얼굴은 죽어버린 사람의 그것과 같았다.
하지만 가슴팍에 박혀 있는 황금색 구체는 살아 있는 어떤 생명보다 강력한 생기와 활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황금 거인이 옆에 있던 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콰지지직.
창끝에서 강렬한 전격이 뿜어져 나왔다.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몰려든 먹구름이 전격을 빨아들였다.
콰쾅! 콰지직!
언덕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구름이 벼락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모두 움직여요!"
강주혁의 명령에 일행들이 흩어졌다.
쾅!
그들이 서 있던 곳에 벼락이 꽂히면서 땅이 움푹 파였다. 벼락 한 방에 담겨 있는 마력이 엄청났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뒤에는 백여 명의 블랙 헌터, 앞에는 정체불명의 보스 몬스터.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강주혁이 그렸던 그림이기도 했다.
"왕좌 뒤에 제단이 있어요! 그 제단부터 먼저 건드려요!"
"제단이요?"
"저놈은 제가 잠깐 맡을 테니 우회해서 가요! 어서!"
일행은 이 상황에서 웬 제단이냐면서 묻거나 따지지 않았다.
그저 강주혁의 판단력을 믿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콰지직!
"조심해요!"
하늘에서 끝도 없이 벼락이 떨어졌다. 일행은 그것들을 피하기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녀야했다.
쾅!
"악!"
"신 팀장님!"
벼락에 빗맞은 신유정이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김정현이 재빨리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했다.
쾅!
또 한 번 벼락이 떨어졌지만 공허진의 보호막이 두 사람을 지켜냈다. 하지만 보호막이 단번에 깨져 버렸다.
훗날 <셀레스티얼>이라고 불리게 된 저 황금 기사는 전 세계에서 이곳만 있는 몬스터다.
셀레스티얼 자체의 전투력도 끔찍할 정도로 강하지만 더 큰 문제는 셀레스티얼이 불러내는 벼락들이다.
S급 헌터의 오러스킨도 단번에 파괴할 만한 공격력을 가진 벼락이 교전 중에 쉴 새 없이 떨어진다.
게다가 그 벼락은 셀레스티얼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기도 했다. 이는 셀레스티얼이 상당히 특이하게도 마나가 아니라 소울 즉, 영력을 기반으로 싸우는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지금 떨어지는 벼락들도 겉보기에는 마법사가 사용하는 라이트닝과 유사하지만 그 성질은 사뭇 달랐다. 오히려 공허진이 만들어내는 홀리 웨폰에 가까웠다.
엄청난 공격력과 광범위한 지원공격, 자체 회복력이 더해진 탓에 회귀 전에는 1차 공략팀이 셀레스티얼에게 전멸당하기도 했다.
그 후 임원까지 포함된 2차 공략팀이 투입되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강주혁이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덤벼라!"
강주혁은 셀레스티얼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기세를 끌어올렸다. 일행이 제단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야 했다.
셀레스티얼은 텅 빈 눈구멍으로 강주혁을 바라보았다.
콰지직!
등 뒤에서 황금빛 전격으로 이루어진 여덟 개의 날개가 뿜어져 나왔다.
척!
셀레스티얼이 자세를 잡았다. 몸이 공중으로 살짝 떠오른 상태에서 강주혁을 향해 단번에 쇄도했다.
콰콰콰!
전방이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났다. 주변의 흙이 모두 뒤집어졌다. 거인이 아니라 벼락이 지나간 것 같았다.
콰앙!
셀레스티얼이 강주혁을 창으로 찔렀다. 강주혁은 간발의 차이로 창을 흘려냈다. 하지만 강주혁이 아니라 강주혁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 자체를 찌른 것처럼 충격이 몰려왔다.
"큭!"
강주혁은 뒤로 튕겨져 나갔다.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멈춰 서지 못하고 뒤로 한참 밀려나야 했다.
간신히 멈춰 섰을 때는 등 뒤에서 섬뜩한 살기를 느껴야 했다.
쾅!
강주혁이 옆으로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도끼가 그가 있던 자리를 찍었다. 건장한 블랙 헌터가 자신의 도끼를 회수하면서 욕지기를 내뱉었다.
"쥐새끼 같은 놈!"
"타락한 마존에게 죽음을!"
강주혁 일행을 추격해 온 블랙 헌터들이 언덕 꼭대기에 도착한 것이다.
‘어서 와라.’
강주혁은 엄청난 수의 블랙 헌터들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블랙 헌터들을 무시한 채 셀레스티얼을 향해 달려갔다.
"쫓아라!"
블랙 헌터들은 망설임 없이 추격에 나섰다.
그들 역시 셀레스티얼의 기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강주혁을 죽이기 위해서는 셀레스티얼과의 교전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블랙 헌터들이 모르는 게 한 가지 있다. 셀레스티얼은 다른 몬스터들과는 달리 영력을 사용하는 신성한 존재. 자신과 반대되는 어둠의 권속들에게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 마치 강주혁의 멸마검처럼.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마(魔)를 받아들이고 체화한 블랙 헌터들은 악마종 몬스터과 유사한 성질을 띠고 있다.
그래서 더 강한 것도 있지만 멸마검처럼 마를 참하는 공격에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다!’
강주혁은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셀레스티얼에게 달려들었다.
콰지직!
셀레스티얼이 전격을 머금은 창을 휘두르는 순간, 강주혁은 바닥을 훑듯이 자세를 낮춘 채 슬라이딩을 했다.
촤아악!
흙먼지를 휘날리면서 뒤로 빠져나간 강주혁은 정수리에서 찌릿한 감각을 느끼고 다시 한번 몸을 날렸다.
콰쾅!
예상대로 강주혁이 있던 곳에 벼락이 떨어졌다. 셀레스티얼은 자신의 공격을 피해서 뒤로 빠진 강주혁을 노려보았다.
‘네 적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이내 몰려드는 블랙 헌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면의 악마를 떨쳐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워 온 강주혁과 달리 블랙 헌터들은 악마에게 온전히 영혼을 맡긴 자들.
셀레스티얼이 누구를 먼저 노릴지는 뻔했다.
척!
셀레스티얼이 블랙 헌터들에게 창을 겨누었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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