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퍼걱!
강주혁과 그리핀이 충돌한 지점에는 깃털과 살점이 터져 나왔다. 단체로 주선우에게 덤벼들던 그리핀들이 강주혁이 휘두른 거검에 분쇄되었다.
그리핀을 돌파한 후 추락하던 강주혁은 덩굴을 이용해서 멈춰 섰다. 그리핀의 피를 뒤집어쓴 탓에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투두둑.
강주혁의 머리 위로 터져나간 그리핀의 살점들이 떨어졌다. 그는 대검을 우산처럼 들어서 피의 비를 막았다.
‘미친…….’
크리스 바셋은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저 인간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미 웨이브 데이 때 강주혁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외부인인 자신보다 광야에 익숙한 강주혁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자위했다. 상황이 다르다면 자신한테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강주혁이 한번 붙어보자고 제안했을 때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약점을 분석하고 자신의 강점을 강화한다면 붙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하고 머리를 굴려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공략 당일이 되었다. 주변 사람들에겐 공략에 지장을 줄 것 같아서 대련을 하지 않는 거라고 했지만 다들 믿지 않는 눈치였다. S급 힐러만 있다면 언제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미치겠군.’
공략이 끝나면 강주혁과의 대결을 피하기가 어렵다. 이번 공략을 통해서 어떻게든 강주혁의 약점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소극적으로 싸우면서 강주혁의 움직임을 눈여겨봤다. 하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기량은 물론이거니와 판단력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약하지만 빠른 마법들을 이용해서 적의 기동을 방해한다는 전략은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주혁은 그렇게 함으로써 마법사가 미끼가 되게 만들었다. 산개해서 공격을 펼치던 적들은 마법사를 집중 공격하기 위해 뭉쳤다가 떼죽음을 당했다.
‘저놈이 미국으로 건너오기라도 하면 난리가 나겠는데…….’
미국에는 크리스 바셋과 대등한 실력자로 알려진 헌터가 세 명 더 있다. 크리스 바셋은 근소한 차이로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의 스타 헌터 모두 강주혁의 적수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들 괜찮아요?"
강주혁이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주선우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눈앞에서 그리핀들이 터져나가는 바람에 그 역시 피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다.
하지만 전투에 제대로 기여를 해서 그런지 기분은 괜찮아 보였다.
"저도요."
"공 대리님이 치료해 줬어요. 괜찮아요."
"나도 괜찮습니다."
"저랑 선우 씨는 좀 씻어야겠군요."
강주혁은 두 번째 제단에서 얻은 물의 힘을 이용해서 피를 씻어낸 후 첫 번째 재단에서 얻은 바람의 힘으로 몸을 말렸다.
주선우도 강주혁을 따라 했다.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여기서 빨리 벗어나는 게 좋겠죠?"
일행은 여전히 짙은 구름 속에 있었다. 시야가 상당히 제한적이어서 언제든 공격을 당할 수 있었다.
"동감이에요."
"조금만 더 가면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가보죠."
일행은 다시 힘을 내서 등반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행이 구름층을 완전히 벗어났을 때는 해가 저물기 직전이었다.
일행의 눈앞에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홀리 쉿(Holy Shit)."
"맙소사……."
"섬?"
하늘 위에 커다란 땅덩어리가 떠 있었던 것이다.
"새삼 여기가 던전이라는 게 실감이 나는군요."
"마법적인 힘이겠죠?"
"그럴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니까요."
"일단, 저기까지 올라가 보죠."
탑과 땅덩어리 사이에 구름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강주혁이 거기까지 일행을 이끌었다.
"여기가 끝이에요!"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등반이 끝났다. 구름다리가 있는 곳이 탑의 정상이었던 것이다. 일행은 프로답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루 종일 등반을 한 터라 앉거나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이곳은 엄연히 던전이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오늘 모험은 여기서 끝내야겠군요. 여기서 야영을 하겠습니다."
"저기로 건너가서 자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신유정이 불안한 듯 말했다. 탑의 꼭대기에서 자는 것보다 넓은 땅덩어리 위에서 자는 게 더 안정감 있어 보였다.
하지만 구름다리 너머의 땅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고 있는 강주혁은 생각이 달랐다.
"여기도 충분히 넓잖아요. 저기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 일단은 여기에서 쉬도록 하죠."
탑의 두께 덕분에 천장 위도 상당히 넓었다. 축구장이 들어가고도 남을 너비였다.
"그리고 이 다리 앞에 진을 치고 있으면 방어하기도 좋을 겁니다."
강주혁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정찰부터 하죠."
일행은 탑의 천장을 샅샅이 뒤졌고 위험 요소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야영을 준비했다.
"불침번은 제비뽑기로 정할까요?"
"그럽시다."
제비뽑기로 네 개의 조가 만들어졌다.
일곱 명이어서 한 명은 혼자 불침번을 설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사람이 크리스 바셋이 되었다.
"제가 한 번 더 서죠."
팀장인 강주혁은 같은 조로 뽑힌 김정현 하고 불침번을 선 후, 크리스 바셋과 한 번 더 서겠다고 했다.
"필요 없습니다.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그냥 원칙대로 하시죠."
결국 강주혁이 불침번을 두 번 서기로 했다.
대신 순서를 조정해 이어서 두 번 서기로 했다. 순서도 가장 빨랐고.
밤이 깊었다.
"그럼 고생하세요."
"김 팀장님도 편안한 밤 되세요."
강주혁은 불침번을 끝내고 다음 사람인 크리스 바셋을 깨우러 가는 김정현을 바라보았다.
유쾌한 성격에 입담도 좋아서 대화가 즐거운 사람이었다. 강주혁을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품기 마련인 질투나 시기 같은 것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가 있는 것 같은데.’
강주혁뿐만이 아니라 지난번 합동 공략 때 참여했던 안다정도 신유정과 김정현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있다는 걸 감지했다.
당사자들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면서 서로에게 악담을 퍼붓곤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티가 나는 것 같았다. 무례한 발언을 거침없이 날려대면서도 사이가 돈독했으니까.
단순한 직장동료가 아닌 건 분명하고 친구 사이도 아닌 것 같았다.
‘나 때문인가?’
회귀 전 신유정은 김정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하고 결혼했었다.
상대가 재벌가의 도련님이었다는 건 기억하지만 헌터 업계 쪽 사람은 아니어서 누군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회귀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신유정이 강주혁과의 내기로 인해 몇 년 일찍 태원을 떠났다는 것이다. 회귀 전에는 태원을 떠나면서 아예 헌터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쉬움이 남았는지 다시 신광으로 복귀했고, 그곳에서 김정현과 친분을 쌓게 된 것이다.
강주혁은 자신의 행동들도 인해 변해 버린 운명들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저벅. 저벅.
그때, 김정현과 교대를 한 크리스 바셋이 강주혁에게 다가왔다.
"피곤하지는 않습니까?"
강주혁이 물었다.
"괜찮습니다."
"잠을 설친 것 같군요."
강주혁은 붉게 충혈이 된 크리스 바셋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랬습니다."
크리스 바셋은 시큰둥하게 답했다. 강주혁은 그런 그를 보면서 웃음을 머금었다.
‘심란해서 그랬겠지.’
강주혁은 크리스 바셋이 자신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주혁이 싸우는 모습을 최대한 많이 보기 위해서 일부로 소극적으로 싸웠다는 것도. 안다정 앞이라고 오버액션을 하던 이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강주혁은 이미 이전 전투에서 서로의 밑천을 다 봤다고 생각했다. 크리스 바셋만이 아니라 강주혁도 생명이 위협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으니까.
할 수 있는 걸 모두 했고 그걸 봤다면 결코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걸 알 것이다.
"당신 같은 헌터가 왜 이런 나라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크리스 바셋이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 정도면 세계무대에서도 먹힐 겁니다. 이 나라에만 있기에는 아까운 사람입니다."
"한국 헌터의 수준이 별로라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바깥에서 보기에는 그렇죠."
국력의 차이가 헌터들의 강함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례 관계가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인구가 많을수록 더 뛰어난 각성자가 생길 가능성이 크고 나라의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을수록 우수한 각성자가 제대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니까 아주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다.
크리스 바셋 역시 미국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이유로 전 세계 최강으로 거론되곤 했다.
하지만 강주혁이 보기에는 거품이 심했다. 크리스 바셋이 대단한 헌터라는 건 분명하지만 세계 최강은커녕 미국 최강도 아닐 것이다.
헌터들은 일반인에 비해서 노화의 영향을 덜 받는다. 육체의 노쇠화를 마력의 상승으로 보완할 수 있으니까.
이윤철 세대가 신태원 세대보다 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양준기를 쓰러뜨린 강주혁도 신태원과 권대호를 상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아마 일선에서 물러난 미국의 원로 헌터들 중에도 크리스 바셋을 가지고 놀 수 있을 만큼 강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세계 최대의 던전이 있습니다. 당신도 그것 때문에 한국에 온 게 아닙니까?"
"물론 그렇죠. 이곳이 세계 최대인 것은 맞지만 세계 최강의 몬스터가 있는 건 아닙니다. 사냥꾼을 강하게 해주는 건 결국 사냥감 아닙니까?"
크리스 바셋이 큰소리를 치는 데에는 근거가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몬스터들 중 가장 강력한 몬스터는 미국의 게이트에서 나온 티아메트 급 드래곤이었다.
광야는 규모 면에서는 압도적이지만 아직 그 정도 몬스터가 나온 적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미국은 세계 최고의 헌터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입니다."
강주혁은 뜻밖의 제안을 하는 크리스 바셋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그가 이런 제안을 하는 속내가 뻔했으니까.
크리스 바셋은 강주혁과의 결투를 두려워하고 있다. 대련 신청을 받았으니까 싸움을 회피하면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물론, 챔피언이라고 모든 도전을 받아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강주혁의 실력을 모르는 상태에서 안다정 때문에 발끈해서 한 판 붙어보고 싶다는 말을 해버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싸움을 회피한다면 무서워서 꼬리를 내렸다는 걸 인정해 버린 꼴이 된다.
그렇다고 붙자니 잃을 게 너무 많았다. 아직까지 강주혁은 세계무대에 나가지 않았다. 그저 작은 나라에서나 유명한 헌터일 뿐이다. 그런 헌터에게 패배하면 한순간에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강주혁을 세계무대로 데려가려는 꼼수를 쓰는 것이다. 강주혁이 진가를 인정받은 후라면 그에게 패배해도 체면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만약 강주혁이 미국에 가고 싶어 한다면 다리를 놓아줄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저를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당신의 실력은 인정합니다."
강주혁은 빙그레 웃었다.
"저도 언젠가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강주혁은 알고 있었다. 이 길의 끝에 세계 최강의 몬스터가 있다는 걸.
17년 후에도 그 블랙 드래곤은 여전히 최강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티아메트 급이었지만 그 강함은 차원을 달리했던 진짜 괴물이었다. 만약 블랙 드래곤이 광야 밖으로 나왔다면 서울이 지도에서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지난 웨이브 데이 때문입니까? 확실히 규모가 크기는 했지만 미국에서도 그 정도 웨이브는 몇 번 있었……."
"잠깐."
강주혁은 크리스 바셋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탑의 모서리로 걸어갔다. 크리스 바셋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주혁을 따랐다.
모서리가 가까워지자 크리스 바셋도 등에 메고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누군가 탑을 오르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