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지금이에요!
"높네요."
"꼭대기가 안 보여요."
"높이가 얼마나 될까요?"
공략 불가 지역에 도착한 일행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탑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에베레스트산 정도?"
"에이, 설마요."
눈앞에 펼쳐져 있는 탑은 광야에서 발견된 어떤 산들보다 높았다. 생긴 건 탑이지만 조사 결과 내부는 꽉 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표면이 엄청나게 튼튼해서 마법으로도 파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아주 매끈매끈해서 벽을 타고 오르는 것도 불가능했다.
탑을 오르거나 파괴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주변에 몬스터도 없었기에 신광은 이 탑을 공략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강주혁이 위치상 이 탑이 마석 매장지와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말해도 남궁천 사장은 쉽게 믿지 못했다. 강주혁이 지금까지 찾아낸 게 없었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오, 목 아파."
신유정이 구름에 가려진 꼭대기를 보려고 고개를 젖히고 있다가 목을 두드렸다.
"정말로 오를 수 있을까요?"
안다정이 강주혁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잖아요. 이번에도 잘 될 겁니다."
강주혁은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크 엘프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제단은 사용자에게 식물을 생성하고 성장시키는 힘을 부여했다.
탑 근처의 바닥에서 새싹이 하나 돋아났다. 땅 밖으로 나온 새싹은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성장해 거의 5초 만에 사람 키를 넘겼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탑에 쩍 달라붙더니 담쟁이덩굴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진짜 담쟁이덩굴 같네요."
"줄기가 더럽게 굵은 것 빼고요."
제단의 힘으로 탄생한 식물은 담쟁이덩굴을 연상시켰으나 줄기의 굵기는 성인 남성의 허벅지보다 굵었다.
"많을수록 우리가 안전해지니까 최대한 많이 심어요."
"네. 팀장님."
일행은 흩어져서 탑 주위에 담쟁이덩굴을 심기 시작했다. 담쟁이덩굴은 탑에 엉겨 붙은 채 끝도 없이 자라났다.
탑을 돌면서 담쟁이덩굴을 심는 데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탑의 두께가 두꺼웠다.
"이걸 밧줄처럼 타고 올라가는 거죠?"
"네."
"중간에 지치면 어떡해요?"
"몇 가지 팁을 알려드리죠."
강주혁은 담쟁이덩굴을 사다리처럼 잡고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줄기가 일직선으로 곧게 뻗는 게 아니라 구불구불하게 꺾이면서 올라갔기에 발을 디딜만한 곳도 많았다.
강주혁은 빠른 속도로 10미터 정도 올라갔다고 뒤로 드러눕듯이 하면서 뛰어내렸다.
"어어?"
"팀장님!"
강주혁은 침착하게 담쟁이덩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제단의 힘을 주입했다.
투둑.
줄기 벽에서 몇 개가 뜯겨져 나오더니 추락하는 강주혁을 공중에서 휘감았다.
그리고 탑 쪽으로 끌어당겼다. 강주혁은 다시 안전하게 탑에 매달릴 수 있었다.
"와."
"어떻게 한 거예요?"
"힘을 사용하면서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럼 이 녀석들이 거기에 따라서 움직일 거예요. 이렇게 할 수도 있죠."
강주혁은 여러 개의 줄기를 엮어서 침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누웠다.
"팀장님은 어떻게 이런 걸 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안 볼 때 몇 가지 실험을 해 본 결과죠."
강주혁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당분간 담쟁이덩굴에서 먹고 자고 해야겠네요."
"싸는 것도요."
신유정의 말에 일행은 정색했다.
"……갑자기 올라가기 싫어지는데요."
"저도요."
"부지런히 움직이면 하루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일단, 연습부터 하시죠. 등반은 줄기를 다루는 데에 익숙해지면 시작하겠습니다."
일행은 강주혁의 명령에 따라서 줄기를 이용해 낙하를 방지하거나 침대를 만드는 연습을 했다.
강주혁은 줄기의 움직임만으로 탑을 오르는 방법도 가르쳐줬다. 줄기가 사람을 감아서 위로 올려 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정교한 컨트롤이 필요했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자주 쓰기는 어려웠다.
일행이 줄기를 다루는 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에야 강주혁은 출발을 명령했다.
* * *
등반은 반나절 동안 계속되었다.
한 시간에 5분씩 휴식을 취하는 것 빼고는 멈추지 않고 올라갔다.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체력적으로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선우 씨가 계속 처져요."
강주혁의 예상대로 가장 먼저 체력적인 문제를 드러낸 건 마법사인 주선우였다.
"제가 돕겠습니다. 크리스 헌터님. 선봉을 맡으시죠."
"알겠습니다."
강주혁을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크리스 바셋이 고개를 끄덕였다. 탑을 오르기 시작한 이후로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태도도 없었고.
신유정, 김정현 하고는 틈틈이 대화를 나눴지만 태원공략 쪽 사람들하고는 말을 섞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안다정을 힐끗거리는 건 포기하지 않았다.
"팀장님!"
강주혁은 크리스 바셋에게 선봉을 맡겨놓고는 뛰어내렸다. 그리고 주선우 근처에서 줄기를 이용해서 멈춰 섰다.
"놀랐잖아요!"
"그냥 내려가면 안 돼요?"
강주혁의 번지점프를 본 팀원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툴툴거렸다.
"시간 절약해야죠. 먼저 올라가요."
강주혁은 그들을 무시하고는 주선우 쪽으로 이동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팀장님."
주선우는 헉헉거리면서 말했다. 호흡이 상당히 불안정했다. 자세히 보니 팔다리도 떨리고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도 몇 시간 동안 계속하면 끔찍한 고행이 된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잘한 것이다.
"마법사에게는 아주 힘든 일입니다. 자책할 필요 없어요."
"체력 단련을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습니다."
강주혁은 주선우가 남들보다 몇 배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노력이라는 게 거의 대부분 마법사로서의 능력을 강화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기초 체력 훈련도 열심히 해서 마법사치고는 아주 뛰어난 편이지만 다른 멤버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부족한 감이 있었다.
"이거 마셔요."
"이건?"
"지구력을 올려 주는 영약입니다. 효력이 하루 정도는 갈 거예요."
"그 정도면…… 엄청 비싼 거잖아요?"
"선우 씨도 알다시피 제가 좀 부자잖아요. 이 정도 지출은 별로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래도 자비를 들이는 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한동안 기대 이상으로 잘해 와서 자신감도 넘쳤다. 하지만 남들에 비해서 뒤처지자 금방 예전처럼 의기소침해졌다.
"우리는 미지의 영역으로 가는 중입니다. 어떤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여러 클래스가 있는 게 안전하죠. 그리고 선우 씨는 아주 뛰어난 마법사고요."
강주혁에게는 당사자의 동의만 있으면 누구든 차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실력이 있는 마법사가 필요하다면 1부 4팀 팀장인 하민지를 데리고 와도 됐다. 성격은 별로지만 마법사로서의 실력은 공략 1부 내에서 톱이니까.
하민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1부 3팀의 이정인 과장도 있다. 하민지만큼은 아니지만 주선우의 스승 노릇을 하고 있는 만큼 뛰어난 마법사다. 소속팀 팀장인 안다정하고의 팀워크도 좋고.
하지만 강주혁은 주선우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처음 팀장을 맡았을 때 평균보다 살짝 모자라는 실력을 가진 주선우는 냉정하게 말해서 골칫거리였다.
공허진처럼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회귀 전에 금방 퇴사를 해버려서 아는 것도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이정인 과장에게 과외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외부활동 때문에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주선우는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평균보다는 뛰어난 실력자가 된 것이다.
은연중에 주선우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강주혁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주선우는 강주혁이 전해준 약병을 받았다.
"엄청 써요. 한 번에 마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팀장님."
주선우는 안에 든 액체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더니 인상을 와락 구겼다.
"확실히 쓰긴 하군요."
"좀 어때요?"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잘 됐군요. 다시 올라가죠."
"네. 팀장님."
주선우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일행은 이미 꽤 멀어져 있었다.
강주혁은 거의 날듯이 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주선우 역시 그를 따랐는데 이전과는 달리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내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았고 심지어 앞지르기까지 했다.
일행은 하루를 꼬박 올라간 끝에 구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앞이 안 보여요."
"다들 조심해요."
갑자기 장님이 되어버린 일행은 손을 더듬어가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왔다.’
그때, 선두에 있는 강주혁이 기척을 느꼈다.
"전투 준비! 디딜 곳을 확보해요!"
강주혁의 외침과 동시에 독수리 상체에 사자의 하체가 합쳐진 그리핀 수십 마리가 안개를 헤치면서 일행에게 덤벼들었다.
크기가 거의 4미터에 육박했다.
서걱!
카악!
강주혁은 데몬의 흑검을 휘둘러 쇄도하는 그리핀을 양단해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동안 다른 그리핀이 달려들었다.
검을 휘두른 직후라 막는 게 어려운 상황. 강주혁은 일부러 아래로 몸을 던졌다.
쾅!
그리핀의 앞발이 강주혁이 있던 곳을 찍었다.
줄기를 이용해 그리핀의 바로 아래에 멈춰선 강주혁은 그리핀의 뒷발을 낚아챘다.
그리핀은 날개를 펄럭이면서 다시 날아오르려고 했으나 강주혁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으아아아!"
강주혁은 있는 힘을 다해 팔을 돌려 그리핀을 탑의 벽에다가 내팽개쳤다.
퍽!
벽에 충돌한 그리핀은 어딘가 부러진 것 같은 모양새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제기랄!"
"너무 빨라요!"
"으아아악!"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B급 몬스터인 그리핀을 어려워할 일행이 아니었다.
하지만 탑에 매달린 상태여서 피하는 게 어려웠다. 자세가 불안정한데다가 그리핀이 움직임이 워낙 날래서 공격을 맞추기도 어려웠다.
강주혁처럼 줄기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것도 웬만한 담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공격을 피하기 위해 뛰어내렸다가 공중에서 그리핀에게 잡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핀에게 붙잡혀 탑에서 떨어진 곳까지 끌려갔다가 추락한다면 무조건 사망이다. 이 높이에서 떨어져서 살아남을 수 있는 헌터는 없으니까.
그리핀은 빠른 속도를 이용해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고수하기 시작했다. 지능이 있는 놈이라서 헌터들과 정면승부를 하는 게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선우 씨, 계속해서 매직 미사일 날려요! 잡을 필요는 없어요! 비행만 방해하면 됩니다!"
"네! 팀장님!"
주선우는 계속해서 마법탄을 날렸다. 공격력은 미비하지만 뛰어난 유도 성능 덕분에 빗나가는 게 거의 없었다.
게다가 마법을 계속해서 연마한 덕분인지 여러 개의 마법탄을 모두 다른 적들을 향하게 하는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펑! 펑! 펑!
캬아악!
매직 미사일에 맞은 그리핀들은 추락하지 않았으나 잠깐 동안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지금이에요!"
일행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슉! 슉! 슉!
안다정은 허리에 줄기를 감은 상태에서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화살 하나에 그리핀이 한 마리씩 추락했다.
어떤 화살은 두 마리를 동시에 꿰뚫기도 했다.
콰지직!
강주혁도 청룡연뇌격을 사용해 그리핀을 격추시켰다.
키에에엑!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리핀들은 잠시 멀어졌다가 뭉쳐서 주선우를 향해 돌격했다.
주선우가 흐름을 빼앗은 장본인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으아아악!"
열댓 마리의 그리핀이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앞세우고 돌격하는 걸 본 주선우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탁!
그때, 주선우의 위에 있던 강주혁이 몸을 던졌다.
콰지지직!
뇌기를 잔뜩 빨아들인 대검이 자신보다 몇 배나 거대한 검기를 만들어 냈다.
스걱!
검기까지 포함해서 10미터. 강주혁이 휘두른 거인의 검이 공간 자체를 베어냈다.
그 공간 안에 뭉쳐져 있던 열댓 마리의 그리핀이 모두 지워졌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