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설마 두 분만 오신 건가요?
아침 해가 떠올랐다.
드넓은 벌판 위에 시체가 없는 곳이 없었다. 지평선까지 죽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수천 명의 헌터들이 열 배가 넘는 몬스터들을 전멸시켰다.
사냥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우리가 이겼다!"
"와아아아!"
살아남은 헌터들이 함성을 질렀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고 탈진과 부상으로 인해 주저앉은 자들도 있었다.
어제 오후 늦게 시작된 전투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어제 아침부터 각자의 위치에서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냈던 헌터들은 24시간 동안 이어지는 전투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던 강주혁 역시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입안에는 지독한 단내가 났다.
‘음?’
강주혁은 문뜩 자신의 어깨가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마지막까지 곁에서 싸우던 안다정이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면서 강주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안 팀장……."
머리를 밀어내려고 하다가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딱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주선우와 공허진도 바닥에 주저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고단한 하루였다.
‘뭐지?’
갑자기 살기가 느껴졌다. 강주혁은 살기가 느껴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 바셋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강주혁을 쏘아보고 있었다.
밤새도록 조금도 쉬지 않고 싸운 강주혁과는 달리 크리스 바셋은 탈진상태에 빠져서 여러 차례 후방으로 빠졌다고 돌아왔다.
그래도 밤을 꼬박 새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몹시 남루하고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지금 당장 싸울 수 있는 사람처럼 날카로웠다. 강주혁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안다정을 보고 눈이 돌아간 것 같았다.
‘저 새끼가.’
크리스 바셋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던 강주혁은 그를 노려보았다.
강주혁과 눈이 마주친 크리스 바셋은 금방 눈을 내리깔면서 살기를 거뒀다.
저벅. 저벅.
크리스 바셋이 강주혁에게 다가왔다.
"고맙습니다."
크리스 바셋이 강주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강주혁은 일어서지 않고 고개만 들었다.
"당신은 오늘 헌터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뭐요?"
강주혁의 말에 크리스 바셋이 정색했다.
강주혁에게 생명을 빚진 건 인정하지만 자신의 판단은 옳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돌발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저랑 김철수 주무관님이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지도 않았겠죠.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을 구하기 위해 헌터들이 방어선을 포기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탈출하지 않고 거인들을 공격하려고 멈춰선 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애초에 후방에만 머무르던 거인들을 자극한 건 당신이었죠."
"그놈들이 바위를 던지면 방어선이 남아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거인을 잡았습니까?"
"……."
"방어선이 무너진 후에 싸우는 것과 방어선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걸 포기하고 싸우는 것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애초에 이 정도 숫자의 몬스터를 피해 없이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방어선이 무너질 때까지 버텼다면 지원군이 더 많이 모였을 것이고 그만큼 전면전을 벌였을 때 피해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미국 헌터 업계가 과대평가된 모양이군요. 그런 판단력으로 최고의 헌터라는 타이틀을 따낸 걸 보니."
크리스 바셋가 어금니를 깨무는 소리가 강주혁의 귀에까지 들렸다. 하지만 말로도 행동으로도 감히 강주혁에게 대들지 못했다.
"영웅 놀이를 할 생각으로 여기에 왔다면 그냥 돌아가세요."
크리스 바셋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주변에 있던 헌터들의 시선이 모였다.
"강 팀장."
그때, 신태원 회장이 강주혁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본 신태원은 여전히 정정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24시간을 싸웠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두 눈은 여전히 광채로 번뜩였다.
남궁천 사장과 이윤철 사장이 신태원 회장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강주혁은 어깨에 기대고 있는 안다정을 조심스레 바닥에 뉘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같았으면 깨웠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해해 주리라고 믿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무사해서 다행이네."
신태원 회장은 강주혁과 안다정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이 한없이 깊어졌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적진 한복판에서 고군분투하던 강주혁 일행을 구하기 위해서 헌터들에게 방어선을 포기하고 공격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신태원 회장이라고 들었다.
제안을 한 사람이 업계의 원로인 신태원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신태원에게 맺힌 게 많은 강주혁이지만 이번만큼은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우리가 나서지 않았어도 자네는 어떻게든 살아남았겠지."
신태원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크리스 바셋에게 손을 내밀었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한국을 위해서 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리스 바셋은 머쓱한 표정으로 신태원과 악수를 나눴다.
강주혁은 신태원이 크리스 바셋의 허물을 덮어주려 한다는 걸 알았다.
강주혁도 판단력을 문제 삼아서 비난은 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던전에서 헌터가 오판을 내려서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는 흔하다. 그런 일로 헌터에게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회사 차원에서 능력을 의심해서 좌천시킬 수도 있고 평판이 나빠져서 동료들이 불신하게 되면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크리스 바셋에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당시 신광의 현장 책임자는 크리스 바셋이었다. 명령 불복종도 아닌데다가 의도 자체도 좋았다. 그 의도가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처벌을 가할 수는 없었다.
"난 좀 쉬어야겠습니다."
자리가 불편해진 크리스 바셋은 금방 자리를 떴다.
"강 팀장."
한 걸음 앞으로 나온 남궁천이 강주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하네. 그리고 고맙네."
최근에 미국 대통령이 바뀌었을 때 크리스 바셋은 백악관에 초청을 받았다. 그만큼 미국 내에서는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헌터다.
그런 헌터가 한국에서 죽어버린다면 분명 시끄러운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신태원이 크리스 바셋에게 책임추궁을 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손님이 잘못한 건 주인이 책임져야지."
신태원 회장이 남궁천 사장에게 뼈있는 말을 건넸다.
"헌터 업계 전체에게 책임을 져야죠. 태원공략이 아니라."
남궁천 사장이 오리발을 내밀었다.
"자네의 잘난 손님 때문에 우리 회사는 최고의 헌터를 잃을 뻔했네. 그건 어떻게 할 셈인가?"
"개인적으로 사례하겠습니다. 강 팀장,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나?"
"합동 공략을 빨리 진행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강주혁의 답변에 남궁천 사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 *
사망자 86명. 부상자 121명.
웨이브 데이 때 인명피해가 나오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만 피해 규모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컸다.
헌터들은 이름처럼 사냥꾼이지 전사가 아니다. 그런 헌터들이 전근대 시대에서나 볼법한 대규모 회전을 벌였다.
평소라면 보스 취급을 받았을 몬스터들이 수십 마리가 동시에 나왔다. 게다가 전투에서 가장 격렬했던 시점이 한밤중이었다. 헌터들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인지라 생존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사태에 대해서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책임을 추궁하는 여론은 생기지 않았다. 그저 전투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고 이 예기치 않은 상황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을 내놓을 뿐이었다.
강남 게이트 단지에 있는 한 대형병원.
"부장님."
강주혁이 주차장에서 나와 두리번거리고 있는 유덕현에게 인사했다.
"다들 모였지?"
"네. 부장님."
유덕현을 포함해서 공략 1부 직원들이 모두 모였다. 다들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복장만큼이나 얼굴도 침울했다.
"가자."
유덕현이 앞장서서 합동 장례식장으로 걸어갔다. 공략 1부 직원들이 그를 따랐다. 태원공략에서도 네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웨이브 데이 때 사망자가 나오는 경우는 많아도 공략회사 소속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광야에 있는 대형공략회사 소속의 헌터들은 국내 헌터들 중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난 축에 속한다. 평소에도 광야에서 실전경험을 쌓고 조직적으로 싸우면서 팀워크를 갈고닦으니 생존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사망자는 대개 실력이 검증이 되지 않고 일거리가 생길 때마다 이합집산하는 프리랜서들에게서 발생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고, 결국 공략회사 쪽에서도 꽤 많은 사망자가 나오고 말았다.
"훌쩍."
조문을 끝내고 난 후, 코끝이 빨개진 공허진이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 있는 장하민 역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사망자들 중에는 4부 4팀의 힐러인 한준우 대리도 있었다. 두 번째 마석 매장지를 찾으러 나섰을 때 함께 했던 헌터. 그 후에 있었던 웨이브 데이 때도 준수한 활약을 보여줬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으나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성격이 모나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팀에 있으면 든든한 그런 사람이었다.
"신태훈도 왔네요."
안다정의 말에 강주혁이 고개를 들었다.
공략에서 추태를 보여서 쫓겨났던 신태훈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문을 끝낸 그는 4부 4팀 사람들에게 짧게 목례를 한 후 신태원 회장이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유가 뭘까?’
강주혁은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이번 2차 웨이브는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이다.
회귀 전과 달라진 것들은 전부 강주혁으로 인해 초래된 변화들이다. 그래서 강주혁이 이번 일이 꼭 자신 때문에 벌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블랙 헌터들이랑 관계가 있나?’
윤정석과의 연락이 관계가 끊어진 것도 찜찜했다. 윤정석이 강주혁과의 약속을 어기고 잠수를 타버렸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이윤철 사장까지 나서서 일을 무사히 마칠 경우 사례하겠다고 했다. 회사에서 성공하는 것을 바라게 된 윤정석이 아무 말도 없이 포기할 리가 없었다.
강주혁과 연락이 닿는 동안 윤정석은 꽤나 의욕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조만간 조직에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윤정석과 다시 연락이 닿으면 많은 궁금증이 해소될 것이다.
그동안 강주혁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 * *
2주 후.
신광공략이 남아 있는 공략 불가 지역에 대한 합동 공략을 제안했다. 계약상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기는 했지만, 날짜를 잡는 건 어디까지나 신광의 권한이었다.
남궁천 사장은 강주혁의 요구에 따라 웨이브 데이의 여파가 가라앉자마자 합동 공략을 추진했다.
합동 공략 참여 인원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강주혁은 1부 2팀에다가 안다정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1부 2팀 멤버들은 팀워크 차원에서 최고의 선택지였다. 이번에 들어갈 공략에서는 뛰어난 장거리 공격수가 필수였기에 안다정도 포함시켰다.
사전 미팅일.
합동 공략에 참여하는 신광의 헌터들이 미팅을 위해 태원공략에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랜만이에요."
신유정이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또 오셨군요."
강주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신유정을 맞이했다.
"강 팀장님은 제가 오는 게 싫은 모양이군요."
"그럴 리가요. 부장님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강주혁은 영혼 없이 답했다.
이미 남궁천 사장에게 신유정이 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저 이제 부장 아니에요."
"실력 부족으로 좌천당했습니다. 낙하산의 한계죠."
지난번 공략에도 참석한 신광의 에이스 김정현이 덧붙였다.
"오랜만입니다. 팀장님."
강주혁이 웃으면서 김정현을 반겼다. 하지만 김정현은 인사에 답할 수 없었다.
퍽!
"컥!"
신유정에게 복부를 가격당해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두 분은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요."
"맞아요. 언제나 사랑이 넘치죠."
"으으, 진짜 때리는 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설마 두 분만 오신 건가요?"
"그건 아닌데……."
신유정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뚜벅. 뚜벅.
그때, 양복 차림의 백인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강주혁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크리스 바셋은 강주혁의 시선을 외면했다.
"잠깐 저랑 얘기 좀 할까요?"
두 사람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신유정이 강주혁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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