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시간을 벌겠습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크리스 바셋은 눈을 껌뻑였다.
키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인이 일격에 반 토막이 났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크리스 바셋은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방금 본 장면은 현실감이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지독한 무력감과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전투기술인가?’
하지만 전투기술이라기보다는 마법 같았다. 강주혁이 검으로 거인을 양단하기 전, 벼락이 거인의 머리를 때렸다.
엄밀히 말해서, 검이 아니라 벼락이 거인을 가른 것이다. 그리고 벼락이 떨어진 바로 그 자리에 강주혁이 나타났다.
어떤 헌터도 자력으로 거인의 머리보다 높이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강주혁이 벼락 그 자체로 변해서 거인을 쪼개버렸다. 크리스 바셋은 다시 태어나도 못할 일이었다.
‘진짜 괴물이구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미국 최강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아시아의 소국에 있는 헌터들 쯤이야 당연히 자신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다.
크리스 바셋이 한국에 온 건 세계최대의 던전과 안다정 때문이지 여기에 있는 헌터들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은 그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공략 경쟁에서 패배했을 때도 팀원들의 기량과 공략 센스가 부족해서 졌다고 생각했다. 헌터에게 가장 중요한 전투력에서는 자신이 압도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실전에서 보니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강주혁은 분명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콰르릉.
일격에 세로로 양분된 거인이 한 템포 늦게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었다. 그건 피가 아니라 마치 파도 같았다. 수십 미터 높이에서 쏟아지는 피는 수압도 상당해 보였다.
"피해요!"
강주혁이 얼이 빠져있는 크리스 바셋에게 외쳤다. 크리스 바셋도 정신을 차리고는 강주혁과 함께 줄행랑을 쳤다. 등 뒤에서 피의 파도가 몰아닥쳤다.
"이쪽입니다!"
자세히 보니 또 한 명의 헌터가 있었다. 공략 경쟁 때 감독관으로 인사를 나눴던 김철수 헌터. 느낌만으로도 실력자라는 걸 알 수 있는 사내였다. 이 아수라장을 뚫고 온 걸 보면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
"달려요!"
콰아아아!
세 사람은 간발의 차이로 피의 파도를 떨쳐낼 수 있었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피의 바다에 잠겨 휩쓸려갔다.
"저 친구들 열 받은 것 같은데요?"
강주혁이 후방을 보면서 말했다.
방어선에 던질 바위를 찾기 위해 흩어졌던 거인들은 싸늘한 주검이 된 동료를 보면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 뒤로 최소 일만은 될 것 같은 몬스터 대군이 추가로 몰려오고 있었다.
"동감입니다."
"여기에 있다가는 죽습니다. 어서 복귀하죠."
크리스 바셋은 그제야 두 사람이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겁도 없이 거인들을 잡겠다고 나섰으나 정작 거인들 앞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이 두 사람이 오지 않았다면 분명히 여기에서 죽었을 것이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분명 바보 같은 판단을 내린 그를 경멸할 것이다. 크리스 바셋은 굴욕감에 몸서리쳤다.
"갑시다."
세 사람은 다시 방어선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 앞에 여전히 수천의 몬스터가 있었다.
강주혁은 대검을 휘두르면서 몬스터의 파도를 헤쳐 나갔다. 쌍검을 사용하는 김철수는 꼭 악귀처럼 보였다.
크리스 바셋도 미력하나마 힘을 보탰다. 여기까지 올 때처럼 힘이 넘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큰 부상은 없었다. 아직 충분히 싸울 수 있었다.
쿠어어어!
그때, 거인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세 사람은 싸움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쿵! 쿵! 쿵!
뒤를 돌아보니 거인들이 빠른 속도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그린스킨들을 밟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진군을 멈췄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다.
콰직!
거인들이 땅을 디딜 때마다 압사한 몬스터들로 인해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제기랄.’
그 압도적인 위용에 크리스 바셋은 전율했다.
힘이 넘칠 때 만용을 부리는 사람이 대개 그렇듯 크리스 바셋 역시 무력한 상태가 되면 눈에 띄게 소심해진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저런 것들이랑 싸울 생각을 했던 몇 분 전의 자신을 저주했다.
쿵! 쿵! 쿵!
거인들은 느리지만, 특유의 보폭을 이용해서 빠르게 거리를 좁혀왔다.
김철수가 전방의 몬스터들을 도륙하는 동안 뒤를 힐끔거리던 강주혁이 갑자기 멈춰 섰다.
"강 팀장님!"
김철수와 크리스 바셋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벌겠습니다. 먼저 가세요."
"안 됩니다! 이러려고 강 팀장님한테 부탁드린 게 아닙니다."
"저놈들이 방어선까지 닥치면 성벽이 의미가 없어져요. 잠깐 시간만 벌고 따라갈 거니까 어서 가요."
"그럼 저도 남겠습니다."
"그럼 나도……."
기진맥진한 상태인 크리스 바셋은 당장 방어선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자기 때문에 목숨을 건 두 사람만 남겨 놓고 돌아갈 순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 이 두 사람이 죽게 되면 자신의 헌터 경력은 완전히 끝장난다.
"……말리진 않겠습니다."
강주혁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 * *
강주혁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김철수와 크리스 바셋도 떠나지 않고 주변의 몬스터들과 싸웠다.
쿵! 쿵! 쿵!
우어어!
선두에 선 거인이 발을 들어 올렸다. 강주혁은 압사한 그린스킨의 시체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발바닥을 올려다봤다.
쾅!
거인이 발을 들어 강주혁을 찍었다. 하지만 강주혁은 한 템포 빠르게 옆으로 빠져나갔다.
땅을 찍은 발은 무게 때문에 깊이 박혔다. 덕분에 강주혁은 수월하게 발등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탁! 탁! 탁!
강주혁은 거인의 발등을 타고 발목을 향해 질주했다.
거인은 다리에 올라탄 벌레를 털어버리려는 듯 발을 흔들었다. 디디고 서 있는 곳이 끊임없이 요동쳤지만 강주혁은 조금의 흔들림 없이 균형을 잡으면서 앞으로 질주했다.
"으아아아!"
그리고 전력을 다해 대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서걱!
거인의 발목에 세로로 금이 그러졌다. 강주혁은 곧바로 몸을 날려 발 아래로 뛰어내렸다.
푸악!
강주혁이 만들어놓은 금이 빨갛게 변하더니 피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거인이 절규하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뒤에 있던 그린스킨들에게 재앙이 덮쳤다.
"끄으으윽!"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여봤지만 통증 때문인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강주혁은 좀 전처럼 청룡강림검을 사용해 거인을 통째로 반으로 쪼개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내공 소모를 우려해 발목에 상처를 입히는 선에서 끝냈다.
지금은 거인을 끝장내는 것보다 방어선까지 진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중요했다.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크아아아악!
앉은뱅이가 된 거인이 주먹으로 강주혁을 찍으려고 했다.
쾅! 쾅! 쾅!
하지만 강주혁은 언제나 한 템포 빨리 사정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다른 거인을 향해 달려갔다. 김철수와 크리스 바셋도 그를 따라갔다. 지금은 뭉쳐야지만 살 수 있다.
강주혁에게 발목을 베인 거인은 근처에 있던 트롤을 잡아서 그에게 던졌다.
"조심하세요!"
김철수의 외침에 일행은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 처박힌 트롤이 산산조각 나면서 흩어졌다.
강주혁은 계속해서 거인들의 발목을 베어 나갔다. 김철수도 강주혁을 따라서 시도를 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크리스 바셋은 잔챙이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했다.
세 사람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거인을 공격했다. 거인들을 그들을 잡기 위해서 전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우왕좌왕했다.
"크리스 헌터님이 한계입니다."
김철수가 헉헉거리면서 말했다. 강주혁이 네 번째 거인을 주저앉힌 직후였다.
슬쩍 보니 크리스 바셋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싸우기는커녕 도망 다니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사실, 힘이 빠진 건 강주혁도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웨이브를 막느라 하루 종일 싸웠다. 늦은 오후부터는 단 1분도 쉬지 못하고 격전을 벌여왔다.
체력의 한계는 진즉 왔다. 지금은 정신력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난감하군.’
아직 거인은 여섯 마리가 더 있었다. 지평선 쪽에서 세 마리가 더 오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공성 무기인 괴물들.
노련하고 고강한 헌터라면 일대일로도 상대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하급 헌터들에겐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우와아아아!"
그때, 갑자기 방어선 쪽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수백의 헌터가 성벽을 넘어서 몬스터들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강주혁이 벌어준 시간 동안 다른 지역에 있던 지원군이 모두 모였다.
거인들을 저지하기 위해서 적진 한복판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강주혁 일행을 구제하기 위해서 헌터들이 방어선을 포기한 것이다.
* * *
광야 내부에 있는 블랙 헌터의 근거지.
"교주님을 뵙습니다."
한준공략의 방어선에 정찰을 다녀온 윤정석이 교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드세요."
윤정석이 고개를 들자 새빨갛게 물든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교주는 그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을 읽을 수 있었다.
교주가 준 약은 윤정석의 정신을 완벽하게 굴복시켰다. 그는 교주의 완전한 노예가 된 상태였다.
"말씀하세요."
교주가 윤정석에게 물었다.
"몬스터들이 전멸했습니다."
블랙 헌터들이 웅성거렸다. 교주가 손을 들자 소요가 잦아들었다.
"방어선은 어떻게 됐습니까?"
"뚫지 못했습니다."
윤정석은 송구하다는 표정을 말했다.
"예상 밖이군요."
교주는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헌터 관리국과 한준공략의 동반 몰락으로 어수선한 상황에 웨이브 데이까지 겹쳤다.
이를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한 교주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몬스터들을 총동원해 던전 브레이크를 노렸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웨이브에 속한 몬스터하고는 별개로 미개척지역에서 따로 모은 병력이었다. 웨이브를 막느라 지쳤을 헌터들을 가볍게 압도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방어선의 한쪽을 뚫은 후, 다른 방어선에 있는 헌터들은 무시하고 게이트를 향해 줄곧 진격시킬 작정이었다.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는가는 상관하지 않았다. 일부만이라도 게이트를 통과하면 시민들이 동요할 것이다.
한준공략의 방어선은 여러 공략회사의 헌터들이 연합해서 담당하고 있다. 그곳이 뚫려서 서울에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시민들은 광야를 담당한 공략회사들을 불신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사회의 혼란은 블랙 헌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안겨줄 것이다.
"그린스킨들이 방어선을 뚫지 못했습니다. 헌터들이 버티는 동안, 다른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던 병력이 도착했습니다. 저녁 무렵에 헌터들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습니다."
"기껏해야 수십 명이 맡고 있던 방어선이었습니다. 수만이나 되는 그린스킨이 그곳을 뚫지 못했다는 겁니까?"
"헌터들의 저항이 너무 강했습니다."
교주는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쌌다. 자신이 공략회사의 헌터를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인들은 어떻게 했나요?"
"별동대로 나선 헌터가 발목을 공격해서 이동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후방에 있었을 텐데요?"
"그린스킨을 뚫고 거인에게 당도했습니다."
"허, 그 헌터가 누구죠? 혹시 아는 사람입니까?"
"……강주혁 헌터였습니다."
답변을 하는 태도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교주의 뺨이 분노로 떨렸다.
강주혁을 회유하는 게 어렵다는 것은 이미 확인을 했다.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 살려두려고 했지만 대업에 너무 큰 지장을 주고 있었다.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
"윤정석 형제."
"네. 교주님."
"그자의 목을 가져오세요."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