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잘 좀 합시다
푹!
안다정의 지원사격으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강주혁은 데몬의 흑검을 땅에 꽂았다.
그리고 등에 메고 있던 태양의 방패를 꺼내 들었다.
스르릉.
허리춤에 차고 있던 멸마검을 뽑고 그 자리에 샐러맨더를 꽂아 넣었다.
검과 방패. 백호검의 스타일이다.
기동성이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용이한 주작검으로 지상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파괴력이 강력한 청룡검으로 적들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이 싸움의 목적은 섬멸이 아니라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 강주혁은 이 많은 적을 혼자서 다 죽이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일 때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지금까지 입힌 피해만으로도 적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지금부터는 백호검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울 생각이었다.
크아아아!
수십의 오크들이 강주혁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도끼날이 예기로 번뜩였다. 성벽 쪽으로 갔다가 강주혁의 등을 노리는 몬스터들도 있었다.
강주혁은 침착하게 방패에 마력을 주입했다.
번쩍.
방패의 전면에서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
본디 동굴에서 살아가는 그린스킨들은 모두 빛에 취약했다. 갑작스럽게 강렬한 빛이 쏟아지자 그들은 눈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다.
때마침 강주혁의 검이 하얗게 빛났다. 공허진이 홀리 웨폰을 걸어준 것이다. 강주혁은 추가로 내공까지 불어넣었다.
영력과 내공은 뒤엉키면서 검신 위에 3미터가 넘는 검기가 덧씌워졌다.
서걱!
강주혁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 거검을 무력화된 적들에게 휘둘렀다.
"컥!"
열 마리의 오크가 동시에 양분되었다. 강주혁은 흩뿌려진 피를 뒤집어쓰면서 적들을 베어나갔다.
키에에엑!
하늘에서 와이번과 하피가 발톱을 앞세우면서 달려들었지만, 다리가 잘려 나가자 비명을 지르면서 다시 하늘로 달아났다.
강주혁이 빠른 속도로 앞으로 치고 나가자 등 뒤를 노리려던 적들은 공격을 하지 못하고 그의 뒤만 쫓았다.
서걱! 서걱!
이미 쌓여 있던 시체들 위에 또 다른 시체가 쌓였다. 한창 시체를 쌓으면서 전방으로 돌진하던 강주혁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뒤따르던 적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기세로만 놓고 보면 후방에 있는 거인들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세로만 모든 걸 판단해서는 안 된다.
갔다가 고립당할 수도 있고, 그사이에 방어선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무리하지 않고 되도록 공허진과 안다정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으아아아아!"
그때, 신광공략의 방어선 쪽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강주혁을 둘러싼 몬스터들도 함성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기에 그도 그쪽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
불타는 대검과 철갑으로 무장한 크리스 바셋이 성벽 위에서 도약해 몬스터들 한복판에 뛰어내렸다.
‘설마…… 날 따라 하는 거야?’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았다. 강주혁은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회귀 전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할 만큼 높은 곳에 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강주혁을 노골적으로 의식하면서 모방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크리스 바셋은 우렁찬 함성을 연달아 터뜨리면서 대검으로 적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크리스 바셋을 혐오하는 안다정조차도 그가 뛰어난 헌터라는 점을 인정했다. 얼핏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오거도 트롤도 그의 참격 앞에서는 예외 없이 양분되었다.
수백의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오히려 적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나쁘진 않겠지.’
강주혁은 크리스 바셋이 냉철한 상황판단 없이 저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신광의 방어선은 상당히 위태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 바셋이 적들의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강주혁은 신경을 끄고 눈앞의 적들을 처치하는 데 집중했다.
"우오오오!"
하지만 크리스 바셋이 지나치게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저러다가 방전되기 십상인데.’
강주혁이 청룡검에서 백호검으로 전환한 이유 중 하나는 체력과 내공 관리를 위해서였다. 청룡검은 위력이 강한 대신에 체력과 내공의 소모도 가장 심했다.
청룡검의 경우 데몬의 흑검이 부여해 주는 힘을 이용해서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기는 하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그것도 무색해진다.
그래서 시선을 끄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본격적인 싸움은 백호검으로 하는 것이다.
크리스 바셋이 휘두르는 불타는 대검도 체력과 내공 소모가 심할 것 같았다. 보기에는 화려하고 강력하지만 그 효과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미지수였다.
"조심해요!"
강주혁이 크리스 바셋에게 정신이 팔려 있을 때, 후방에 있던 안다정이 고함을 질렀다. 강주혁은 본능적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크아아아!
후방에 있던 거인이 자기 머리통만 한 바위를 들어 던졌다. 바위는 엄청난 속도로 강주혁에게 날아왔다. 피하기에는 바위가 너무 컸다.
‘젠장!’
강주혁은 타이밍을 맞춰서 백호금강갑을 두르고 방패로 몸을 가렸다.
콰쾅!
"윽!"
강주혁은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뿐.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바닥을 디디고 있는 발은 뒤로 10센티미터 정도 밀려났을 뿐이었다.
‘기대 이상이군.’
강주혁도 백호금강갑과 태양의 방패가 합쳐진 결과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성벽이 뚫렸어요!"
"공 대리님, 여기 좀 봐주세요!"
강주혁은 기적적으로 피해 없이 넘어갔지만, 뒤에 있는 성벽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강주혁을 강타한 바위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성벽으로 날아간 것이다.
말이 조각이지 작은 덩어리조차 거의 승용차랑 맞먹는 크기였다. 성벽을 덮친 바위는 벽의 일부를 무너뜨렸고 이는 몬스터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바윗덩어리에 깔려서 사망한 사람은 없었으나 파편에 맞아 부상을 당한 사람은 여럿 있었다.
쿵! 쿵!
뒤에 있던 거인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서성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투척할 바위를 가져오려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상황이 악화되었지만 그만큼 시간도 많이 흘렀다. 조금 있으면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강주혁은 몬스터들을 베어 넘기면서 성벽이 무너진 곳으로 달려갔다.
"제가 막아줄 테니까 부상자들부터 치료해요!"
"네! 팀장님!"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학살했다.
"크리스 헌터님!"
"돌아와요!"
그때, 신광의 방어선 쪽에서 간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강주혁은 고개를 돌렸다.
‘뭐 하는 거야?’
방어선 근처에서 싸우던 크리스 바셋이 더 과격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거인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아마도 거인들이 바위로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걸 우려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지나치게 무모했다.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거인들이 있는 곳까지 밀고 들어가는 건 강주혁도 할 수 있었다.
그다음이 문제지.
만 단위가 넘어가는 몬스터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건 어떤 헌터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내 알 바 아니지.’
강주혁은 크리스 바셋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위치를 고수했다.
크리스 바셋이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그를 돕거나 구제할 방법을 생각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강주혁이 전방에서 홀로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태원공략의 방어선은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공허진이란 특급 힐러 덕분에 부상자들은 빠르게 복귀할 수 있었다.
"강 팀장님! 지원군이 왔어요!"
안다정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탁!
강주혁의 옆에 누군가 뛰어내렸다.
"주무관님이 이렇게 반가운 건 처음이군요."
"애쓰셨습니다."
김철수가 무뚝뚝한 어조로 허리춤에서 검을 한 자루 더 뽑았다.
서걱! 서걱!
그리고는 쌍검을 이용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강주혁의 예상대로 칼을 쓰는 솜씨가 범상치 않았다.
"지원군 규모는 어느 정도 됩니까?"
두 사람은 싸우면서 대화를 나눴다.
"일단은 헌터 관리국 소속의 헌터들이 모두 왔습니다. 그래봤자 50명 정도지만 다른 방어선에도 연락을 했으니 상황이 정리가 되는대로 도착할 겁니다. 근데 크리스 바셋 헌터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기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강주혁은 지평선 어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큰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왜 저기에?"
"좀 전부터 거인들이 바위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막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위태로워 보이는데요?"
너무 멀리 있어서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 바셋의 검이 뿜어대는 화염이 눈에 띄게 약해진 것만은 분명했다.
"저기까지 갔으니 그럴 수밖에요."
거인들이 있는 곳까지 가는 곳도 문제였지만 거기서 거인들이랑 싸우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체력과 내공이 고갈된 상태로는 지역 보스로 취급되는 몬스터 열 마리와 싸울 수 없다.
"왜 말리지 않았습니까?"
"제 앞가림하기도 바빴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헌터라고 하니 묘수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전혀 아닌 것 같은데요."
"본인의 선택이니 어쩔 수 없죠."
"크리스 바셋 헌터가 사망하면 미국하고 외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민간인인 강주혁과 공무원인 김철수의 관점은 달랐다.
나라를 대표하는 헌터가 외국에서 죽는다면 분명 나라 간의 문제가 될 것이다. 본인이 원해서 한 일이라도 왜 안 말렸냐는 식으로 따지고 들 수 있으니까. 한국과 미국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저기까지 들어갔다가 다른 사람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팀장님과 저라면 가능합니다."
"저도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주무관님처럼 나라의 녹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사람이죠. 그것도 아주 많이. 유감스럽지만 저는 나라를 위해서 죽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팀장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김철수는 다시 한번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강주혁은 싸우면서 그를 흘낏 봤다.
자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인간. 별로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안다정에게 집착하는 크리스 바셋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김철수와 크리스 바셋에게 빚을 지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둘 다 앞으로 강주혁을 귀찮게 굴 가능성이 큰 인간들이었으니까.
"후우."
짧게 한숨을 쉰 강주혁은 근처에 꽂혀있던 데몬의 흑검을 뽑아 들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 * *
크리스 바셋이 성벽에서 뛰어내린 건 강주혁에게 뒤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주혁이 하는 걸 자기도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죽어라! 이 쓰레기들아!"
처음에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나 싸우다 보니 예상외로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고블린이나 오크 따위는 아무리 많아도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것들보다 급이 높은 오거나 트롤들도 한방이라는 점에서는 잡졸들과 마찬가지였다.
가끔 급강하해서 머리를 노리는 하피와 와이번이 거슬렸지만 큰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콰쾅!
하지만 거인이 거대한 바위를 태원공략의 방어선을 향해 던졌을 때는 생각이 달라졌다.
‘괴, 괴물 같은 놈…….’
무슨 수를 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강주혁은 그 거대한 바위를 직격으로 맞고도 무사했다. 크리스 바셋이 맞았다면 몸이 으깨져 버렸을 공격이었다.
쿵! 쿵!
후방의 거인들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집어던질 것을 찾고 있었다. 조만간 저런 공격이 또 날아올 것이다.
‘저놈들은 내가 잡는다.’
저번 공략에서도 체면을 구겼다. 이번에는 꼭 자신이 더 나은 헌터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맷집에서는 강주혁이 한 수 위인지 모르겠으나 전투력에서는 분명히 자신이 나을 것이다.
꽈드득.
크리스 바셋은 어금니를 깨물면서 검을 고쳐 잡았다.
그가 냉철한 판단력을 발휘하는 건 어디까지나 일을 준비할 때다. 일단 일이 벌어지고 나면 본능과 직감에 몸을 맡긴다.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엔 안다정이 있었다.
전투의 흥분과 강주혁에 대한 승부욕에 사로잡힌 크리스 바셋은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으아아아!"
크리스 바셋이 자신을 에워싸는 몬스터들을 베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인을 향해 길을 뚫기 시작했다.
"크리스 헌터님!"
"위험합니다!"
"돌아오세요!"
뒤에서 외치는 소리도 모두 무시해 버렸다. 그다음부터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무아지경 상태에서 그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쿵!
하지만 수백의 몬스터를 베어 죽이면서 거인의 앞에 도착했을 땐, 몸이 조금씩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엄청난 탈력감에 자세를 잡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던 화염도 점점 힘을 잃어갔다.
‘제기랄…….’
거인의 비틀거리는 크리스 바셋을 밟기 위해서 발을 들어 올렸다.
파지직!
그때,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더니 하늘에서 엄청난 크기의 벼락이 떨어져 거인의 정수리를 때렸다.
콰지지직!
거인의 몸을 가로지르면서 내려온 전격이 땅을 찍었다. 전격이 사라진 자리에는 강주혁이 검은색의 대검을 든 채 앉아 있었다.
"잘 좀 합시다. 신입 헌터도 아니고."
강주혁이 몸을 일으키면서 짜증을 냈다.
쩌적!
거인의 몸이 세로로 쪼개어지면서 허물어져 내렸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