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아직 안 끝났습니다
"헉헉."
윤정석은 숨을 헐떡거렸다. 고태우를 필두로 한 블랙 헌터들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뒤쳐진 건 윤정석과 김종수뿐이었다.
"뒤쳐지지 마라."
선두에 있던 고태우가 일갈했다.
대놓고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짜증스러움이 말투에 묻어났다.
"죄송합니다!"
윤정석은 이를 악물고는 계속해서 달렸다.
체력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달린 적은 처음이었다.
오늘은 웨이브 데이.
윤정석과 블랙 헌터들은 각기 다른 회사의 프리랜서 헌터로 광야에 들어왔다.
몬스터 웨이브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전선에서 이탈한 그들은 미개척 지역에 있는 합류 지점에서 만나 블랙 헌터의 숨겨진 근거지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헌터들의 추격 때문에 고태우는 보법을 써가면서 속도를 높였다. 윤정석도 처음에는 보조를 맞췄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과 내공의 부족 때문에 속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저 인간은 괜찮은 것 같은데.’
김종수 역시 윤정석처럼 뒤처지긴 했지만 숨이 가빠지지는 않았다. 한계에 내몰려서 속도가 줄어든 게 아니라 관리 차원에서 속도를 줄인 것 같았다.
윤정석의 시선을 느낀 건지 김종수가 붉은 눈으로 윤정석을 힐끗거렸다. 힐러인 최성훈에 의해 되살아난 후로는 줄곧 저런 상태였다. 그리고 미묘하게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원치 않은 대결을 벌인 후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고태우가 시킨 일을 처리하느라 한두 마디를 주고받은 게 전부였다.
윤정석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눈 건 주로 고태우와 최성훈이었다. 두 사람은 윤정석의 개인사에 대해서 궁금해했고, 자기네들의 개인사를 털어놓기도 했다.
고태우는 공략회사가 게이트 관리를 똑바로 안 해서 생긴 던전 브레이크 때문에 가족을 잃었고 최성훈은 회사에서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 왔다."
선두에 서 있던 고태우가 달리는 속도를 늦추었다. 눈앞에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바위산이 나타났다.
"후, 후."
임계점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던 윤정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찰을 하고 흔적을 지운다. 성훈이는 발자국 좀 없애고."
"네. 대장님."
블랙 헌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윤정석도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한쪽 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몬스터도 헌터도 찾을 수 없었다. 윤정석은 나중을 위해서 이 장소를 눈여겨 봤다. 나중에 블랙 헌터들을 소탕할 때를 위해서 이곳까지 오는 길도 대략적으로 기억해 뒀다.
마지막으로 블랙 헌터에게 받은 가루를 허공에 흩어놓았다. 마력을 느끼는 걸 방해하고 몬스터의 채취를 만들어내는 가루였다. 이걸로 헌터들의 흔적을 지울 수 있었다.
시키는 일을 끝낸 윤정석은 좀 전의 장소로 되돌아갔다.
"문제없습니다."
복귀한 블랙 헌터들이 고태우에게 보고했다.
"이 쪽도 아무 이상 없습니다.
윤정석도 보고했다.
"좋아. 들어가자."
고태우는 갑자기 언덕을 이루고 있는 바위에 손을 짚었다. 손이 바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그 상태로 바위 안으로 스며들었다.
다른 블랙 헌터들도 대장을 뒤따랐다.
"봤지. 똑같이 따라하면 돼."
최성훈이 김종수와 윤정석에게 설명을 한 후 따라 들어갔다. 윤정석과 김종수도 시키는 대로 했다.
동굴 안은 칠흑 그 자체였지만 서로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따라 와라."
고태우는 빛이 없는데도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다른 헌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윤정석은 앞사람의 기척에 의지해 따라갔지만 중간에 몇 번 벽에 부딪히기도 했다.
길은 몇 번씩 꺾이면서 위를 향했다. 각성자인 윤정석도 숨이 찰 정도로 경사가 가팔랐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올라가자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면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여긴?’
천장이 없는 걸로 봐서 바위산 꼭대기로 올라온 것 같았다. 하지만 산의 정상이라기 하기에는 지나치게 지대가 평평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평야처럼 땅이 넓게 퍼져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바위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고원과 저지대를 나누는 절벽이었던 것이다.
‘블랙 헌터들의 본진인가?’
검은 전투복에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수백 명의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 같이 살이 떨릴 정도로 강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진짜 전쟁 나겠네.’
이 정도 수의 실력자들이면 광야의 공략회사들이 총출동을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모여 있던 블랙 헌터들이 윤정석 일행을 보고는 길을 터주었다. 고태우는 일행을 이끌고 한복판으로 갔다. 한복판에는 다른 곳과 구분되는 단이 있었다.
그 위에는 로브 차림의 남자가 정좌하고 있었다. 옆에 왕좌처럼 보이는 의자가 있는데도 남자는 굳이 거길 비워두고 옆에 앉아 있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고태우가 무릎을 꿇으면서 목청껏 외쳤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나머지 블랙헌터들도 부복하면서 머리를 숙였다. 윤정석과 김종수도 냉큼 따라했다.
"새로운 형제들이군요. 고개를 드세요."
블랙 헌터들이 고개를 들었다. 윤정석은 고개를 들어 교주를 바라봤다.
‘뭐지?’
교주의 얼굴이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마법으로 일시적으로 다른 사람을 변장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저런 건 처음이었다.
"우리의 동지가 된 것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합류해 줘서 고맙군요."
교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아직 미몽에서 깨지 못한 어리석은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축복받은 이 땅을 오랫동안 착취하면서 큰 권세를 누려왔습니다."
윤정석은 어리석은 형제들이 공략회사의 헌터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하늘은 그 권세가 영원히 이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쌓아온 오욕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혼란이 몰아쳤고 그들의 굳건한 성벽에는 큰 틈이 생겼습니다."
윤정석은 교주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교주는 헌터 관리국의 비리 사건으로 광야를 담당하는 대형 공략회사들이 어수선해진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언론도 연일 기사를 내면서 한준공략이 담당하던 방어선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한준공략은 예정대로 광야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그 후임으로 들어온 유한공략은 아직 미흡한 점이 많았다. 웨이브 데이를 제대로 넘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우리는 오늘, 어리석은 형제들에게 각성의 철퇴를 내릴 겁니다. 세상은 형제들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겁니다. 버림받은 그들은 잠에서 깨어나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교주가 옆으로 팔을 뻗었다.
"하늘의 군세가 우리가 함께 할 것입니다."
안개가 걷혀지면서 광활한 평야가 드러났다. 수천, 아니, 수만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평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린스킨이라고도 불리는 오크, 오거, 고블린, 트롤이 주를 이루었고, 중간에 하피와 와이번도 보였다. 거인들도 있었는데 머리가 구름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몬스터들은 블랙 헌터들이 눈앞에 있는데도 공격성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블랙 헌터들도 역시 몬스터들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설마 몬스터들을 길들인 건가?’
윤정석이 가지고 있던 상식이 무너졌다.
몬스터 테이머라는 건 영화나 게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던전에 있는 몬스터는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혐오를 품고 있기 때문에 길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떤 헌터도 그걸 해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수만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교주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라. 어리석은 형제들을 깨어나게 할 때가 왔다."
교주가 지평선을 가리키면서 명령했다.
쿠아아아!
몬스터들의 함성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광기어린 괴성을 토해내면서도 질서정연하게 한쪽 구석으로 몰려갔다.
윤정석의 기억대로라면 대형 공략회사의 방어선이 있는 방향이었다.
‘빨리 알려야 하는데…….’
윤정석은 마음이 급해졌다. 긴장한 탓에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그때, 몬스터들의 진군을 바라보고 있던 교주가 고개를 돌렸다.
"안타깝게도 의심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군요."
교주의 시선이 윤정석에게 옮겨 왔다.
"으아아악!"
교주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타버리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윤정석은 참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우리는 큰 싸움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굳건해야합니다. 아주 작은 의심이 대계를 무너뜨릴 수 있죠"
교주가 시선을 거둔 후에도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저벅. 저벅.
교주가 윤정석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윤정석은 일그러진 얼굴로 교주를 올려다봤다.
교주의 얼굴은 여전히 변화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몸을 가진 수십 명인 것 같았다.
윤정석은 속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교주는 분명히 생각을 읽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들키면 여기서 살아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고개를 드십시오."
윤정석은 고개를 들었다.
"그런 알량한 자기최면으로는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주가 손을 휘젓자 잔이 하나 생겨났다. 잔을 흔들자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걸 마시면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던, 어떤 생각을 품고 있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윤정석은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았다.
"남김없이 마셔요."
* * *
웨이브 데이.
정부는 예정대로 몬스터 웨이브를 가장 먼저 맞닥뜨릴 최전방 지역들을 아홉 개의 대형 공략회사에게 나눠줬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지역을 방어하는 동시에 한준공략이 담당하던 지역까지 담당해야 했다.
한준공략이 건설한 방어선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아홉 개의 공략회사들이 손발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유한공략의 헌터들이 지원을 하기로 했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을 거라는 건 자명했다.
당연하게도 대형 공략회사들은 각자의 정예들을 보내기로 했다. 태원에서는 공략 1부의 두 팀이 파견되었다. 신광에서는 새로 결성된 팀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태원과 신광의 방어선은 딱 붙어있었다.
"이겼다!"
하루 종일 이어진 몬스터 웨이브는 오후 늦게야 끝이 났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태원과 신광의 헌터들은 방어선을 무사히 지켜냈다.
"다정!"
전투가 끝나자마자 크리스 바셋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안다정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잘 지냈어?"
"그럭저럭."
"왜 연락을 안 받아?"
안다정은 정색하면서 대꾸했다.
"제가 당신을 싫어한다는 걸 꼭 말로 해줘야 하나요?"
"상관없어. 난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안다정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주변에 있는 헌터들이 조심스레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제발 좀 포기해요. 난 당신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나오니까."
"왜 날 그렇게 싫어하지?"
"몰라서 물어요?"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중요한 건 내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거야."
크리스 바셋은 삐뚜름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계속 귀찮게 하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해봐. 난 그딴 놈들은 신경 안 쓰니까."
크리스 바셋은 눈을 부라리면서 자신의 격을 과시했다.
그걸 본 강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완전 미친놈이었군.’
회귀 전에는 안다정과 같은 공간에 있었던 적이 없어서 이 정도인 줄 몰랐다.
"실례합니다. 헌터님."
강주혁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남의 개인사에 끼어들 정도로 오지랖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군요."
크리스 바셋이 강주혁을 노려보았다.
남궁천과 함께 봤을 때는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맛이 가버린 것 같았다.
"안다정 팀장님이 분명히 싫다고 했는데도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이건 나랑 다정의 문제입니다. 당신 일이나 봐요."
"아니요. 이건 내 문제도 아니에요. 당신이 혼자서 일으키고 있는 문제지. 당신이야 말로 헛소리 그만하고 당신 일이나 봐요."
안다정이 일갈했다.
"크리스 헌터님, 이곳은 태원공략의 영역입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다고는 하지만 법적으로 구분된 지역이죠. 회사의 허락 없이 들어오는 건 불법입니다."
"그래서?"
"신광의 영역으로 돌아가시죠."
"못가겠다면?"
"끌어내야죠."
크리스 바셋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 표정이 꼭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힘자랑 하고 싶은 얼뜨기처럼 보였다.
"당신이랑 꼭 한 번 붙어 보고 싶군요."
"저도 그러고 싶군요.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안 될 것도 없지 않나. 싸움도 끝났고……."
"아니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몬스터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니까.
"……강 팀장님 말이 맞아요."
안다정은 지평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평선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닥쳐오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