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미스터리네
"드르렁."
방패를 베게 삼아서 바닥에 누워있던 유덕현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정말 주무시네요."
"여기 던전인데……."
나머지 네 사람은 던전에서 당당히 낮잠을 잠으로써 부장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는 유덕현은 보면서 웃었다.
공략은 1시간 30분 만에 끝났다.
몬스터 사냥은 한 시간 안에 끝났지만, 최하층에서 점검을 하면서 올라오느라 반시간 정도 더 걸렸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꽤 꼼꼼히 던전을 뒤졌는데도 몬스터는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여왕 거미를 미끼로 삼아 숨어있는 거미들을 꿰어낸다는 강주혁의 작전이 들어맞은 것이다.
감독관들은 반신반의하면서 공략 결과를 점검하러 들어갔다. 일행은 그들을 기다리면서 오랜만에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점심 뭐 먹죠?"
"오랜만에 비싼 거 먹죠."
"강 팀장님이 쏘는 거예요?"
"물론 아니죠. 일단 회사로 복귀해서 사장님께 보고하는 겁니다. 그럼 비싼 점심이 생길 거예요."
강주혁의 농담에 일행이 웃었다.
"사장님도 같이 가시는 겁니까?"
주선우가 물었다.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높으신 분과 함께 하는 식사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직접 사주고 싶어 하실 것 같은데."
"이 기록으로 확정 나면 사장님이 아니라 회장님이 나서실 수도 있어요. 최소 부회장님은 나설 것 같네요."
안다정이 덧붙였다.
공략회사들 간의 진검승부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매출 1등이 마석 매장지 발견으로 얻어걸린 것이 아님을 증명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유명 헌터까지 합세한 신광의 공략팀까지 큰 차이로 이겨버렸다. 얼떨결에 국위선양까지 해버린 셈이었다.
"크리스 바셋의 반응이 궁금하군요."
"엄청 분해할 거예요."
안다정이 말했다.
"참, 안 팀장님도 헌터스 나오셨죠. 혹시 크리스 바셋이랑 만난 적 있어요?"
"같은 팀이었어요."
"네?"
"진짜요?"
안다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팀장이 된 후 예전에 비해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어디까지나 예전에 비해서다. 안다정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더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다정은 친절하게도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헌터로서는 훌륭하지만, 사람으로서는 진짜 별로예요. 아마 자기가 잘나서 신광이 1등을 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리고 한국 헌터들 수준이 미국보다 낮다고 단정했겠죠. 이번 일로 정신을 좀 차렸으면 좋겠네요."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저기 감독관들 나왔어요."
공허진이 동굴 입구 쪽을 가리켰다.
김철수 주무관을 포함한 네 명의 감독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부장님 깨워야겠네요."
"부장님, 일어나세요. 다 끝났습니다."
"어? 음?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유덕현이 눈을 뜨면서 인상을 썼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긴장돼서 그런가. 어제 통 잠을 못 잤지 뭐야."
유덕현이 부스스한 몰골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 끝났습니다."
김철수가 말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남아있는 몬스터는 없었습니다."
일행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외쳤다.
"만세!"
"우리가 1등이다!"
"주혁이 만세!"
"강 팀장님 만세!"
네 사람은 강주혁을 얼싸안은 채 방방 뛰면서 추태를 부렸다. 유덕현과 공허진은 기쁨에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다른 분들도 계시는데 좀 자중을……."
강주혁은 흥분한 일행을 진정시켰다. 그러다가 김철수와 눈이 마주쳤다. 항상 침착하고 무뚝뚝한 모습을 보여주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꽤 놀란 모습이었다.
"몬스터들이 대부분 보스룸에 있더군요. 어떻게 하신 겁니까?"
김철수가 강주혁에게 물었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팀이라고 해도 거미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내려가는 동안 교전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내막을 모르는 사람은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들 것이다.
"비밀입니다."
강주혁의 대답에 김철수는 예상외로 피식 웃어 보였다.
"어쨌든 축하드립니다. 최종승자는 태원공략이 되었군요."
"주무관님도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행은 다른 감독관들하고도 인사를 나눴다.
회사 소속인 그들은 놀라면서도 배가 아픈 표정이었다. 그들이 속한 회사는 1시간대는커녕 2시간대에도 접근하지 못했으니까.
"우리 인센티브 받겠죠?"
"설마 사장님께서 그냥 넘어가시겠어?"
"회사의 이름을 빛냈는데 두둑하게 챙겨주실 거다. 걱정 마."
"슬슬 갈까요?"
"그럼 우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일행은 감독관들과 헤어진 후 곧장 회사로 복귀했다.
공략은 딱 12시 끝났는데 감독관들이 검사를 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이미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늦었는데 밥 먹고 들어갈까?"
"짐도 많은데 두고 가는 게 어떨까요? 사장님께 보고도 드리고요."
"그래. 그게 낫겠다."
일행은 공략 1부 사무실로 복귀했다.
"어? 부장님 오셨다!"
"안녕하십니까!"
공략 1부 직원들은 어째서인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뭐야? 벌써 다 먹은 거야?"
"아직 안 먹어요."
"왜? 무슨 일 있어?"
"대표팀의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죠."
"어떻게 됐어요?"
"자식들, 당연히 우리가 1등이지."
좀 전에는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감격해하던 유덕현이었지만 직원들 앞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진짜요?"
"대박!"
"축하드려요!"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부장님, 우리 어서 가야 해요."
"가긴 어딜 가?"
"사장님께서 호텔 뷔페 잡아놓고 기다리고 계세요. 대표팀 복귀하면 공략 1부 직원들 전부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요."
"뭐? 우리가 언제 올지 알고?"
유덕현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강 팀장이 있으니 금방 올 거라고 하시던데요."
"그, 그건 그런지."
"어서 가요. 기다리시겠어요."
"다들 출발! 초고속으로 달려간다!"
공략 1부 사람들은 보법까지 펼쳐가면서 근처에 있는 5성급 호텔의 뷔페로 달려갔다.
이윤철 사장은 텅 빈 테이블에 앉아서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혼밥을 하는 모습이 어쩐지 무척 자연스러워했다.
자리를 모두 맡아놓은 건지 주변 테이블도 모두 비어 있었다.
"사장님!"
"아, 유 부장, 일찍 왔네. 다들 기다리느라 배고플 텐데 음식부터 가져오게."
"네! 사장님!"
공략 1부 직원들은 음식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하지만 대표팀은 보고를 위해서 이윤철 사장에게 다가갔다.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유덕현이 적장의 목을 베고 온 장수처럼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1분 30분?"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지. 나도 사장 자리를 고스톱으로 딴 게 아니거든."
이윤철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면서 씩 웃어 보였다.
"모두들 고생 많았네. 자네들이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라서 정말 자랑스럽군."
"과찬이십니다."
"강 팀장."
"네. 사장님."
"이번에도 신박한 방법으로 시간을 단축시켰다지?"
"……운이 좋았습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사장님."
강주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들도 가서 음식 가져오게. 아침부터 고생했는데 점심이라도 든든하게 먹어야 하지 않겠나."
"네. 사장님."
일행은 곧장 음식을 가지러 갔다.
‘누구지?’
강주혁은 이윤철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정보를 입수했는지 궁금했다. 게다가 강주혁이 어떤 식으로 공략에 기여를 한 건지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공략시간이야 감독관들 중 누군가가 알려줬을 수도 있지만 공략 방법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다.
‘미스터리네.’
사장을 넘어 회장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강주혁에게 높으신 분만이 가질 수 있는 저런 정보력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추측조차 못 할 방식으로 정보를 입수하는 것을 보면 자신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혁아."
그때, 뒤따르던 유덕현이 강주혁의 어깨를 잡았다.
"네. 부장님."
"사랑한다."
유덕현이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말씀을.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 * *
태원공략이 왕좌를 지켰다.
공략 경쟁에 관심을 쏟고 있던 대중은 열광했다. 태원공략의 주가는 또 한 번 치솟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태원공략의 승리를 축하하지는 않았다.
신광공략 사장실.
"안타깝게도 태원공략이 우리를 이겼습니다."
남궁천 사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왓(What)!"
크리스 바셋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이 영어로 말하는 건 처음 듣는군요."
남궁천 사장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아…… 정말입니까?"
크리스 바셋은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어눌한 한국어로 말했다. 놀랍게도 그는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았다.
어떤 계기로 한국어를 배웠느냐는 질문에 크리스 바셋은 한 한국인 여성을 좋아해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답했다.
한국에 온 이후로 크리스 바셋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국어만 사용했다. 그리고 자신 앞에서 영어를 쓰지 말라는 요청까지 해서 신광의 직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야지만 자신의 한국어 실력이 는다는 게 이유였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특히, 크리스 바셋에게 배정된 팀원들은 아직은 살짝 모자란 그의 한국어 때문에 불편했지만, 회사에서 어렵게 모셔온 VIP이기에 따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크리스 바셋은 자신의 금기를 깨고 영어를 말해 버린 것이다.
"정확하게 1시간 30분. 우리보다 45분을 단축했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제 공략은 완벽했습니다."
크리스 바셋은 오만한 사람이긴 하지만 일에 관해서 만큼은 겸손할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미국 던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이지만 광야는 처음이라는 사실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공인된 S급 헌터이고, 경쟁 지역의 몬스터들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크리스 바셋은 공략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우선, 헌터 관리국을 통해 전달받은 한준공략의 보고서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부실한 회사답게 공략 보고서는 엉망이었다. 크리스 바셋은 남궁천 사장에게 요청해서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았다.
그 정보를 토대로 공략을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계획안을 세 개나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끌 팀원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최선의 안을 채택했다.
팀원들의 기량을 체크하고, 팀워크를 다지기 위해서 경쟁 지역에 들어가기 전, 다른 지역의 공략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정보를 반영해서 계획안을 한 차례 더 수정한 후에야 최종안이 나왔다.
남궁천 사장이 과하다고 지적할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덕분에 그 전까지 선두를 달리고 있던 대현공략을 압도할 수 있었다.
크리스 바셋은 더 이상 좋은 성적은 나올 수 없다고 자부했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노력의 부족을 탓했을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기에 지금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불가능할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
남궁천 사장은 크리스 바셋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투로 말했다.
"그 사람입니까? 전에 사장님이 말한? 주, 혁, 강?"
"맞습니다."
남궁천 사장이 말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헌터가 한 사람 있다고. 몇 년 후에는 전 세계 최강이 될 수도 있다고.
크리스 바셋은 그 얘기를 듣고는 코웃음을 쳤었다. 그 헌터가 세웠다는 혁혁한 실적들을 듣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실적이 곧 실력을 말해주는 건 아니니까. F급 헌터도 운 좋게 마석 매장지를 찾으면 높은 실적을 낼 수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탈주한 전무를 일대일 싸워서 죽였다는 얘기도 허무맹랑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크리스 바셋은 애초에 자격이 없는 사람을 전무 자리에 앉혀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뜻밖의 결과를 마주하니 남궁천이 했던 이야기가 더 이상 허풍처럼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공략한 겁니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크리스 바셋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이 미지의 적수가 동원한 방법을 알기 전까지는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헌터와 만날 수는 있죠."
크리스 바셋의 눈이 커졌다. 가슴속에서 호기심과 호승심이 함께 일었다.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꼭 그러고 싶습니다."
크리스 바셋의 눈빛이 뜨겁게 타올랐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