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쿨럭!"
김종수가 입에서 또 한 번 피를 토해냈다.
"용서해라."
윤정석은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면서 김종수의 복부에 박혀 있는 검을 옆으로 뽑아냈다.
촤악!
"으아악!"
김종수가 피를 왈칵 쏟으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으으."
몇 번 움찔거리던 김종수의 몸은 이내 차갑게 굳어버렸다.
윤정석은 지금 이 순간이 자기 삶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로의 삶은 이전과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짝짝짝.
대장인 고태우를 시작으로 블랙 헌터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브라보!"
"제법인데."
"잘했다."
그들은 무슨 재미있는 놀이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즐거워했다. 윤정석은 그들에 대한 살기와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서 애써야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성훈아."
"네."
"살려내."
일행에게 문을 열어줬던 최성훈이 쓰러져 있는 김종수에게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최성훈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 그는 그 손으로 김종수의 상처를 짚었다.
‘S급 힐러?’
윤정석은 깜짝 놀랐다.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건 S급 힐러뿐. 태원공략에도 임원까지 다 합쳐서 열 명도 안 되는 게 S급 힐러다.
공허진 대리가 그토록 고평가받는 이유는 부장은 되어야지 겨우 다다를 수 있는 S급의 경지에 사원 시절에 도달한 힐러기 때문이다.
그만큼 귀한 인재가 이런 범죄 조직에, 그것도 말단에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르다.’
윤정석이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영력을 이용한 치유 기술인데 어째서인지 영력을 사용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온화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이한 느낌만이 진하게 풍겼다. 게다가 손이 황금빛이 아니라 검게 물드는 것도 이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수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다행이다.’
저들이 사용하는 힘이 무엇이든 간에 윤정석은 안도했다. 김종수가 어떤 마음을 품었던, 그가 어떤 인간인지 간에 윤정석은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으으…… 헉!"
김종수가 화들짝 놀라면서 정신을 차렸다.
"고생했다."
고태우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 제가……."
김종수는 자신의 몸을 더듬기만 할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저놈을 죽이려는 네 투지를 봐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잘해라."
"감사합니다! 대장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김종수가 몸을 일으키더니 땅에 머리를 박고 절했다.
"평생 대장님께 충성하겠습니다!"
"충성은 내가 아니라 교주님과 마존께 바치는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고태우의 시선이 윤정석에게 향했다. 입에는 진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우리가 이 녀석을 되살려서 놀란 모양이군."
윤정석은 대답하지 못했다.
"블랙 헌터로서의 투지와 긍지를 보여준다면 우리는 몇 번이든 기회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줬던 기회도 빼앗아 버리겠지. 알아들었나?"
부릅뜬 두 눈에서 흘러나온 살기가 윤정석의 영혼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윤정석은 그 살기를 견디느라 안간힘을 썼다.
"……네. 대장님."
윤정석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일단은 우리 식구로 받아들이겠지만 나는 너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실력은 합격이지만 정신은 불합격이니까. 다음 시험 때도 우물쭈물한다면 내가 직접 죽일 것이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아주 고통스럽게."
"명심하겠습니다."
"종수도 이만 일어나라."
김종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윤정석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김종수의 두 눈동자가 피처럼 붉었다. 그 눈동자에서는 증오와 원망이 가득했다.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강한 열의가 느껴졌다.
윤정석은 그 시선이 견디기 어려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좋아. 당분간 이곳에 지내다가 웨이브 데이 때 광야로 들어간다."
"우리도 드디어 들어가는 겁니까?"
부하들이 대장에게 물었다.
"교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조만간 공략회사 놈들이랑 큰 싸움이 있을 거라고."
* * *
태원공략 공략 1부 사무실.
"얘들아!"
유덕현 부장이 부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공략 1부에서 유덕현이 얘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딱 세 명뿐.
강주혁, 안다정, 공허진. 그 세 사람만 고개를 들었다.
"네. 부장님. 무슨 일 생긴 겁니까?"
강주혁이 대표로 물었다.
"신광놈들이 신기록을 세웠다."
한준공략이 담당하던 지역들 중 하나를 놓고 아홉 개의 대형 공략회사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리스폰 주기가 사흘밖에 안 되는 특이한 지역이었는데 지형도 미로처럼 복잡하고 몬스터들도 강해서 공략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다.
"얼마나 단축시켰는데요?"
"거의 한 시간. 2시간 15분이야."
"네?"
"와……."
세 사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까지 최고 기록은 대현공략이 세운 3시간 20분이었다. 다른 회사들은 네 시간 전후가 나왔다.
한준공략이 담당하던 시절에는 평균적으로 여섯 시간 정도 걸렸다고 했으니 네 시간도 상당히 빠른 것이다.
참여한 회사들 모두 쏟아부을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부은 결과였다. 애초에 다들 한준공략보다 수준이 높기도 했고.
공략순서를 회사매출 역순으로 잡았기 때문에 태원공략의 순서는 신광의 바로 다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태원이 신광을 넘지 못한다면 신광이 최종우승자가 되는 것이다.
"신광도 부장 특공대를 보낸 건가요?"
정부에서 이번 경쟁에서 임원은 참여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대부분의 회사는 임원을 제외한 최강 전력인 부장 다섯 명으로 팀을 꾸리는 꼼수를 부렸다.
"그건 아닌데 다른 방식으로 꼼수를 부렸더라고."
"꼼수요?"
"미국의 <헌터스>에서 데려온 헌터를 투입했다더라."
<헌터스>는 미국 공략업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회사다. 전 세계적으로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굴지의 기업이다.
강주혁의 활약에 힘입어 태원공략 역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아직 시가총액으로 헌터스를 넘지 못했다.
헌터스에겐 광야가 없지만, 그 대신 전 세계의 게이트가 있었다. 게이트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나라는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적다.
그런 나라들은 외국인 헌터를 용병으로 고용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가장이 먼저, 그리고 많이 찾는 회사는 당연히 미국의 공략회사들이다. 그중에서도 으뜸인 헌터스는 전 세계에 수많은 사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헌터스는 안다정이 태원공략에 들어오기 전에 다녔던 회사이기도 했다.
"이름이 뭐래요?"
안다정이 물었다.
"크리스 바셋."
"그 사람이?"
안다정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저도 그 사람 알아요. 미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헌터잖아요."
공허진도 아는 척을 했다.
강주혁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헌터고, 세계 최대의 던전인 광야에 지대한 관심을 표하던 사람이었으니까.
회귀 전에도 광야를 공략하기 위해서 한국에 거의 눌러앉다시피 했던 사람이다. 직접 대련한 경우는 드물었지만, 실력 또한 한국의 기라성 같은 헌터들보다 뛰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쇼맨십도 뛰어난데다가 관심을 받는 걸 좋아해서 언론 앞에 자주 섰다. 다른 헌터들이 직장인이라면 크리스 바셋은 연예인에 가까운 헌터였다.
아직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미국에서는 할리우드 인기스타 못지않은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다.
"저도 헌터스에서 가장 뛰어난 헌터를 뽑으라면 그 사람을 뽑을 거예요."
안다정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근데 그런 사람이 왜 신광의 공략팀에 있는 겁니까?"
"최근에 신광이 미국에 진출하겠다고 헌터스와 협력 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 헌터스도 광야에 관심이 많고. 일종의 자매회사가 된 거지."
"신광이 괜찮은 회사이긴 하지만 미국에 진출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강주혁이 냉정하게 평가했다.
"남궁 사장이 야심이 있는 사람이잖아. 아니면 한국에서 우리한테 계속 치이니까 다른 쪽으로 활로를 뚫어보려는 거일 수도 있고."
"근데 아무리 자매회사 사람이라지만 신광 소속은 아니잖아요. 이거 반칙 아니에요?"
"교류 협력 계약을 통해서 기간제로 헌터 몇 명을 교환했나 봐."
"교환 학생 같은 건가요?"
"그럼 셈이지."
"회사가 무슨 대학교도 아니고……."
"그러게 말이다. 근데 정부 쪽에서도 그냥 넘어간 거라서 우리가 뭐라 할 순 없어. 쪽팔리기도 하고."
"맞습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헌터 한 명 합세했다고 그런 결과가 나오면 한국 헌터들 체면이 안 서죠."
강주혁은 미국에서 최고로 꼽히는 크리스 바셋과 한번 겨뤄보고 싶었다. 회귀 전에는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한 번쯤 붙어볼 만한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그래. 좋은 자세다. 신광이 용병을 쓰든 말든 우리는 우리 식대로 하면 되는 거야. 다들 준비는 되어있지?"
"네. 부장님."
"우리가 이 바닥의 최강자라는 걸 보여주자."
* * *
공략 당일 아침.
공략 1부 사무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기록 꼭 깨셔야 해요!"
"본때를 보여주세요!"
다른 직원들이 자랑스러운 태원공략 대표팀에게 응원을 보냈다.
최종 선발 인원은 유덕현, 안다정, 강주혁, 공허진, 주선우.
주선우는 태원공략 드림팀이라고 할 수 있는 4인방에 낄 만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최대 다섯 명까지 참석이 가능한 팀에 굳이 한 명을 적게 보낼 필요는 없다는 판단하에 뽑힌 것이다.
다른 공략회사는 객관적인 전력만을 생각해서 현역 부장들이나 그에 준하는 경력자들로 팀을 꾸렸지만 태원공략은 팀워크에 집중하는 쪽을 택했다.
오랫동안 강주혁, 공허진과 합을 맞춘 주선우는 팀워크 측면에서 최선의 선택지였다.
"알았어. 이놈들아. 부담스럽게."
유덕현은 과도한 열의를 보이면서 응원에 열을 올리는 부하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주선우도 체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 없는 동안 사고 치지 말고 잘들 해."
"사고 칠 겨를도 없죠."
"금방 다녀오실 거잖아요."
"맞아요. 점심은 여기서 드시는 거 아닙니까?"
만약 태원공략 대표팀이 기록을 갈아치운다면 점심 식사는 밖에서 할 수 있을 거다.
"……그래야지. 간다. 다들 농땡이 피우지 말고 열심히 해."
"네. 부장님. 다녀오십시오!"
"준비는 다했나?"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대표팀은 안으로 들어오려는 이윤철 사장과 입구에서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보기만 해도 든든하군. 잘할 수 있지?"
이윤철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네. 하하…… 물론입니다."
유덕현은 입으로는 웃었지만 표정은 자꾸만 일그러졌다.
일을 계획할 때는 좋았는데 막상 가려고 하니까 부담이 커진 것이다.
"회사를 대표하는 인재들이 총출동하니까 분명 좋은 결과가 있겠지."
거기다 회사의 사장까지 내려와서 응원을 빙자한 압박을 주니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꼭 좋은 결과를 거두겠습니다."
강주혁은 갈수록 소심해져 가는 유덕현을 대신해서 앞으로 나섰다.
"강 팀장이 있으니까 기대해도 좋겠지?"
"네. 사장님."
"자신감이 넘쳐서 좋군. 신광이 미국 헌터를 투입했다는 얘기는 들었지?"
"네. 사장님."
유덕현에게 크리스 바셋이 신광의 일원으로 공략 경쟁에 참여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공략업계 내부의 소식이었다.
하지만 불과 며칠 만에 크리스 바셋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미국의 스타 헌터가 한국에 있다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헌터 관리국의 비리 문제로 헌터 업계에 몰려 있던 대중의 관심이 공략 경쟁으로 옮겨왔다. 신광은 때맞춰서 크리스 바셋이 1년 동안 신광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만약 이대로 신광이 최종 승자가 된다면 한국 헌터들이 미국 헌터보다 못하다는 소리가 나올 거야."
고작 외국인 한 명이 추가된 것뿐이지만 그 사람이 미국을 대표할 만한 헌터고, 그 결과가 1등이라면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
강주혁이 아는 크리스 바셋이라면 그런 소리를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회귀 전에도 광야가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 생겼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 위인이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