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죽였습니다
"으아아악."
팔이 뽑혀져 나간 김주호는 처절한 신음을 토해냈다.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출혈이 너무 심해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김주호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데도 그를 신으로 떠받들던 제사장과 보초 둘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회귀 전, 헌터들은 이 마을을 정공법으로 무너뜨렸다. 다크 엘프들의 수가 워낙 많아서 헌터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김주호는 최후의 순간에 탈출하려다가 추격대에 사로잡혔다. 마을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구출된 헌터가 김주호의 만행을 털어놓았다. 김주호는 재판을 받고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다.
"공포……."
김주호가 마지막 숨과 함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쇼크로 인해 경련을 일으키던 몸이 완전히 굳었다.
강주혁은 다가가서 호흡을 한 번 더 확인한 후 확인 사살로 목뼈까지 부러뜨려놓았다.
‘이제 이건 내 몫이군.’
강주혁은 목걸이를 보면서 웃었다. 이 목걸이는 데몬의 흑검, 드래곤의 회중시계처럼 진정한 힘이 드러나지 않았던 아티팩트였다.
회귀 전에도 그랬다.
한준공략의 연구팀은 이 아티팩트의 진가를 밝혀내지 못했고 그저 마력을 조금 높여주는 목걸이로만 판명해 버렸다.
이번에도 연구팀은 똑같은 결론을 낼 것이다. 김주호가 죽었으니 이 세상에서 이 목걸이의 진실에 대해 아는 사람은 강주혁뿐이었다. 강주혁은 공략기여도가 가장 높은 사람으로서 이 목걸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생각이었다.
‘무서운 물건이긴 하지.’
아주 유용한 동시에 극도로 위험한 물건이기도 했다. 회귀 전, 인센티브로 이 목걸이를 받아 간 헌터는 목걸이의 숨겨진 능력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걸 이용해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목걸이의 힘을 남용하다가 조금씩 의심을 사게 되었고 어리석게도 자기보다 월등히 뛰어난 임원에게 목걸이를 사용했다가 들통이 나고 말았다.
목걸이의 진정한 능력과 헌터가 그걸 이용해 저지른 만행들이 드러나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김주호는 감형을 대가로 목걸이에 대해서 진술했다. 덕분에 강주혁도 목걸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딱 필요한 곳에만 쓴다.’
강주혁은 오랜 경험상 이런 물건들이 주인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에 계속 의존하다가 이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목걸이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모두 광기에 사로잡혔던 걸 보면 분명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목걸이가 꼭 필요한 시기.
강주혁은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데몬의 흑검도 굴복시켰으니 이 목걸이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댕댕댕.
그때, 바깥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음?’
다크 엘프 제사장이 뭐라고 외치자 보초들이 밖으로 나갔다.
"너도 나랑 나간다."
강주혁이 제사장과 함께 보초들을 따라갔다.
피라미드의 최상부에서는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어?"
강주혁은 당황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일행이 마을의 정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이다. 일행은 온갖 기술을 쏟아부으면서 자신들을 막아선 수백의 다크 엘프들에게 돌진했다.
‘공 대리?’
선두는 전사인 이창옥이 아니라 공허진이었다. 그런데 평소하고는 모습이 달랐다.
‘저건?’
공허진의 양손을 휘감은 황금색 빛이 멀리 떨어진 강주혁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신태훈을 두들겨 팼을 때도 딱 저랬다.
손뿐만이 아니었다.
공허진이 영력을 사용할 때마다 그녀를 중심으로 백금색의 광체들이 뿜어져 나갔다. 하얀색 빛을 잔상처럼 남기면서 눈앞의 적들을 부숴버리는 공허진은 지옥의 악마들을 단죄하는 대천사처럼 보였다.
다크 엘프들은 배를 만난 파도처럼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기세로 적들을 몰아세우는 건 공허진뿐이었다. 뒤따르는 일행들은 미친 듯이 달려가는 그녀를 따라가느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강주혁은 머리를 싸맸다.
일행에게는 망원경이 있다. 분명 대기 장소에서 강주혁이 잡혀가는 걸 보고는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다들 위험하다는 이유로 반대했겠지만 공허진 혼자 고집을 피웠을 가능성이 컸다. 그녀는 강주혁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무대포로 달려올 사람이니까. 그 마음은 고마웠지만, 오히려 그 결정 때문에 상황이 꼬여버리고 말았다.
‘위험하다.’
공허진이야 저 상태로 피라미드까지 돌파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문제였다. 조금이라도 뒤처지는 순간, 수백의 다크 엘프에게 둘러싸일 테니까.
공허진은 전투의 광기에 휩싸인 건지 뒤따르는 사람들의 템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공허진 혼자서 다크 엘프들을 뚫고 강주혁에게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수백의 다크 엘프를 모두 상대할 수는 없었다.
강주혁은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연기를 시작했다.
"보초들을 시켜서 나를 포박해라. 줄은 느슨하게 하고."
강주혁은 제사장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일부러 제사장 옆에 무릎을 꿇었다.
제사장이 명령하자 보초들이 밧줄을 들고 와서 강주혁을 묵었다.
"저들을 생포해서 이곳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해라."
제사장이 마력을 담은 목소리로 다크 엘프들에게 명령했다. 목소리가 마을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후열에 있던 다크 엘프들이 피라미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포박되어 있는 강주혁을 보게 되었다.
제사장은 강주혁을 가리키면서 다시 한번 외쳤다. 이놈처럼 전부 산 채로 잡아 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공 대리님!"
강주혁은 그 상태에서 목에 내공을 실어 외쳤다. 한창 다크 엘프의 머리통을 부수고 있던 공허진은 강주혁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팀장님!"
"모두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어요. 싸우지 말고 그냥 투항하세요. 저한테 다 계획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다크 엘프들은 강주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 정황상 생존을 위해 동료들에게 투항을 권하는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툭!
공허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들고 있던 철퇴를 버렸다.
그러곤 일행들에게 뭐라고 했다. 강주혁의 말을 전달한 것 같았다.
일행은 우물쭈물했다. 적진 한복판에서 무기를 버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공허진이 거듭 재촉하자 하나둘씩 무기를 버렸다.
"저들을 포박해서 여기로 데리고 오라고 해. 무기도 같이 가져와서 근처에 내려놓고. 그리고 조금 전에 가져간 내 검도 가져와."
강주혁은 제사장에게 명령했고 제사장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명령은 곧바로 이행되었다.
"강 팀장님!"
밧줄에 꽁꽁 묶인 상태로 압송된 팀원들은 강주혁 옆에 앉혀졌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일단은 지켜보기만 해요."
강주혁은 제사장에게 말했다.
"저기 둘 빼고 전부 내려가라고 해."
강주혁은 목걸이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측근 두 명 빼고는 전부 피라미드 아래로 내려가게 만들었다.
말뜻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강주혁이 계속해서 제사장에게 말을 걸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팀원들은 강주혁이 시키는 대로 하는 제사장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전사들에게 이렇게 얘기해. 인간들이 이 숲을 더럽히는 걸 더 이상 볼 수 없다. 숲 밖의 인간들을 처단해야 한다. 지금부터 총공격을 개시한다."
제사장은 양팔을 하늘 위로 뻗으면서 목소리를 돋우었다. 웅변조로 몇 마디를 하자 피라미드 밑에 있던 다크 엘프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호응했다.
척!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지평선을 가리켰다.
다크 엘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자의 무기를 챙기고 대열에 맞춰서 마을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마을 안에 있던 수백의 다크 엘프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원래도 조용했던 마을이 거의 폐촌처럼 보일 정도로 썰렁해졌다.
남아 있는 다크 엘프는 제사장과 측근 두 명, 그리고 피라미드를 에워싸고 있는 열 명의 보초뿐이었다.
"저들을 이 위로 불러들여."
제사장이 명령하자 피라미드를 둘러싼 보초들이 모두 위로 올라왔다.
이 마을에 남아 있는 모든 다크 엘프.
강주혁은 숲으로 들어간 다크 엘프들이 충분히 멀어졌다고 생각될 때까지 기다렸다.
투둑!
강주혁은 힘으로 자신을 감고 있는 밧줄을 뜯어내는 동시에 보초가 가지고 있던 멸마검을 집어 들었다.
목걸이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크 엘프들이 깜짝 놀라 검을 겨누었다. 하지만 제사장이 가만히 있자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을 뿐 강주혁을 공격하지 않았다.
강주혁은 제사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강주혁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줄이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생긴 건 사람에 가깝지만 잡아 온 헌터들의 심장을 산 채로 적출 하는 괴물. 강주혁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사실상 이 지역의 보스나 다름없는 제사장의 목을 날아갔다.
"라카쉬!"
강주혁을 지켜보고 있던 다크 엘프들이 절규했다.
"모두 무기 챙겨서 싸워요!"
일행의 무기는 조금 떨어진 곳에 떨어져 있었다. 원래 포로의 무기는 안전을 위해서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 게 원칙.
하지만 제사장의 명령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고 일행은 단숨에 무기가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펑! 펑! 펑!
상대적으로 무기 의존도가 떨어지는 주선우와 김명섭이 매직 미사일을 날려서 다크 엘프들을 견제했다.
그사이에 다른 팀원들이 무기를 챙겨서 곧장 교전을 시작했다.
서걱! 스걱!
하지만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강주혁의 검에 대부분의 다크 엘프들이 쓰러졌다. 일행은 잔당들을 어렵지 않게 해치웠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다치신 것 같아요."
공허진이 물었다.
"좀 얻어맞기는 했는데 괜찮습니다. 공 대리님은 괜찮아요?"
"네. 저는 괜찮아요."
"우린 공 대리님 때문에 죽을 뻔했어요. 갑자기 그렇게 막 들어가시면 어떡해요!"
뒤늦게 주선우가 불만은 터뜨렸다. 한준공략의 헌터들도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죄, 죄송해요. 강 팀장님이 위험하실 것 같아서요."
정신을 차린 공허진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일부러 잡힌 건데요."
강주혁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거 봐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강 팀장님은 이런 잔챙이들한테 은신을 들킬 분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주선우는 역정을 냈다.
"왜…… 그러셨어요?"
공허진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강주혁에게 물었다.
"피라미드의 경계가 너무 삼엄해서 들키지 않고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제사장에게 다가가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정말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공허진은 다른 헌터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우린 괜찮습니다."
이창옥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동안 공허진이 공략에 기여했던 부분이 워낙 컸던지라 너그럽게 넘어가려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한준공략의 헌터들은 진즉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근데 좀 전에 그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류은정이 강주혁에 물었다. 어떻게 제사장에게 명령을 내렸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다크 엘프들의 왕 노릇을 하던 인간이 있었습니다."
"인간이요?"
"네. 이름은 김주호라고 했습니다. 한준공략 헌터였다고 하던데 혹시 아시는 분 있나요?"
"이름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알고 지내지는 않았지만."
가장 경력이 오래된 이창옥이 말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사장과 이 신전의 보초들이 그 사람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더군요."
"최면 마법 같은 건가가?"
마법사의 마법 중에도 최면을 걸 수 있는 게 있다. 잘 걸리지도 않을뿐더러 목걸이처럼 효과가 오래가지도 않아서 잘 쓰이진 않는다.
"그런 것 같습니다."
강주혁은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중에 톨게이트를 통과할 때 제출은 하겠지만 그냥 신전에서 발견한 물건이라고 보고할 생각이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죽였습니다."
"……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