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숭배받는다고 인간이 신이 되는 건 아니야
강주혁은 투명화와 소음 제거를 사용한 상태로 요새에 접근했다. 석벽 위에서 파수를 보는 다크 엘프들은 강주혁을 발견하지 못했다.
마을의 입구는 철문으로 막혀 있었기에 석벽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벽돌을 이용해 만든 벽이 아니었기에 잡고 오를 만한 돌출부는 수도 없이 많았다.
일행들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강주혁의 진짜 목적은 다크 엘프 제사장이 아니었다. 물론, 최종적으로 제사장을 움직여서 다크 엘프들을 마을에서 내보내겠다는 작전은 맞다.
하지만 일행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만약 강주혁이 다크 엘프 제사장을 인질로 잡아서 다크 엘프들을 협박하면 그들은 제사장의 말을 따르기보다는 제사장을 구출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제사장의 권위만큼이나 그의 안위도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하니까.
따라서 최선의 길은 제사장이 자발적으로 그런 명령을 내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일행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존재가.
탁!
보초를 피해 석벽 위로 올라온 강주혁은 곧장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아주 가까이에 있지 않은 이상 적들은 강주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만큼 강주혁은 자신의 기운을 철저하게 갈무리했다.
그 상태로 강주혁은 피라미드를 향해 접근했다.
‘개자식들.’
곳곳에 세워진 장대에는 성벽과 마찬가지로 헌터들의 시신이 걸려 있었다. 모두 가슴 부분이 뻥 뚫려 있었다.
강주혁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군.’
다크 엘프들은 전투 중이 아닌데도 흉흉한 살기를 풍겼다.
수백 명이 모여 있는 마을인데도 말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끔가다가 명령만 내릴 뿐 일상적인 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과는 다른 이종족이라고는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행동하는 것만 보면 생명체가 아니라 꼭 언데드 같았다.
‘귀찮게 됐군.’
피라미드 앞에 도착한 강주혁은 인상을 썼다. 보초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들키지 않고 내부로 들어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보초들은 천으로 된 옷을 입은 다른 다크 엘프들과는 달리 철갑옷과 장창으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딱 봐도 다른 이들보다는 수준이 높아 보였다.
‘뭐 이러나저러나 똑같겠지.’
강주혁은 태연하게 피라미드의 계단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예상대로 보초를 서고 있는 다크 엘프들이 기척을 느끼고는 강주혁이 있는 쪽을 노려보았다.
휙!
다크 엘프 한 명이 강주혁이 있는 곳을 향해 투창을 던졌다.
강주혁을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컥!"
투창을 몸으로 받아낸 강주혁이 뒤로 넘어졌다. 백호금강갑을 사용해서 피해는 없었지만 지금은 부상을 입은 척해야 했다.
"카아 쉬 나크!"
다크 엘프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몰려와 쓰러진 강주혁을 에워쌌다. 강주혁은 계속해서 누워 있었다.
툭! 툭!
"으으으."
보초병들이 창대로 강주혁을 건드렸다. 강주혁은 신음만 흘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카보에 라아 씬."
누군가 강주혁의 검을 가져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강주혁을 일으켜 세웠다.
그들은 강주혁을 질질 끌면서 피라미드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최상부에는 회귀 전의 기억대로 내부로 진입하는 통로가 있었다.
내부는 넓은 홀이었고 조명 역할을 하는 횃불이 별로 없어서 상당히 어두침침했다.
"오, 헌터는 오랜만이군."
안에서 낯익은 언어가 들려왔다.
배가 볼록하게 나온 인간 남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턱이 두 겹에다가 얼굴이 기름기로 번지르르했다. 작고 옆으로 찢어진 두 눈은 몹시 교활해 보였고, 눈빛도 상당히 탁해 보였다. 목에는 황금빛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뒤로 키가 크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다크 엘프 여성이 따라 나왔다. 다른 다크 엘프들과는 달리 로브차림. 강주혁의 기억대로라면, 저 여성이 바로 이곳의 제사장이다.
두 사람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은 없었다. 실내에는 강주혁과 그를 잡고 있는 두 명의 보초까지 포함해서 전부 다섯 명뿐.
"한준공략인가?"
남자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한국어로 물었다.
"허, 헌터입니까?"
강주혁은 일부러 놀란 척을 했다.
"한때는 그랬지."
남자는 기분 나쁘게 씩 웃어 보였다.
"여기는 뭐 하는 곳……."
남자가 손짓을 하자 강주혁의 팔을 붙잡고 있던 다크 엘프가 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퍽!
"큭……."
강주혁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질문은 내가 한다. 한준공략에서 보낸 건가?"
"……맞습니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이 팔찌를 썼습니다."
강주혁은 팔찌를 벗어서 앞으로 내밀었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손을 떨었다.
남자는 다가오는 대신, 다크 엘프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강주혁을 붙잡고 있는 다크 엘프 한 명이 팔찌를 챙겨서 남자에게 공손히 건넸다. 남자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면서 웃었다.
"꽤 쓸 만한 물건이군. 여기에는 왜 온 거지?"
"공략 중에 숲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길을 잃은 놈이 이곳에 들어왔다고? 밖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못 봤나?"
"식량과 물이 필요했습니다."
"식량과 물을 구하려면 바깥에 있는 집들을 뒤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왜 피라미드로 온 거지?"
"그냥 앞으로 지나가려다가 걸린 겁니다."
남자가 다시 손짓했다.
퍽! 퍽!
곁에 있던 다크 엘프들이 강주혁을 구타했다.
"크헉!"
강주혁은 호신강기로 타격 부위를 방어하면서 버텼다. 고통은 심하지 않았으나 일부러 비명을 지르면서 고통스러운 척을 했다.
"말해. 무슨 목적으로 온 거지? 누가 시켰나?"
남자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시켜서 온 게 아닙니다."
남자가 다시 손짓했다.
퍽! 퍽! 퍽!
다시 구타.
좀 과장해서 말하면 솜방망이 수준이었으나 일부러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이래도 말 못하겠다고?"
"저, 정말입니다."
퍽! 퍽! 퍽!
또 다시 구타. 강주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늘어져 버렸다.
"다시 한번 묻지. 누가 보냈나?"
강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날 귀찮게 하는군."
남자가 손짓했다. 다크 엘프들이 남자에게로 강주혁을 끌고 가서 내려놓았다. 강주혁은 곤죽이 된 사람처럼 주저앉았다.
"날 봐라."
남자의 명령에도 강주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남자는 강주혁의 턱을 잡고 거칠게 들어올렸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쓸데없이 고집은."
남자는 혀끝을 차더니 자신의 목걸이를 강주혁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잘 봐라."
강주혁은 목걸이를 들여다봤다.
"엑시움 라 키르베."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자 목걸이 한복판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이 은은한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강주혁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두피를 뚫고 들어와 뇌를 움켜잡고 흔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런 기분만 들었을 뿐, 그 이상의 문제는 없었다.
"따라 해라. 나는 진실을 말할 것이다."
"나는 진실을 말할 것이다."
강주혁은 남자의 말대로 따라했다.
"누가 보내서 왔나? 정체가 뭐지?"
바로 그 순간, 강주혁은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손을 뿌리쳤다.
애초에 다크 엘프들은 근력으로 강주혁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강주혁이 이미 그로기 상태가 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힘을 빼고 있는 상태였다.
손쉽게 양팔의 자유를 얻은 강주혁은 곧바로 눈앞에 있는 목걸이를 낚아챘다. 그리고 남자의 복부에 주먹을 쑤셔 박았다.
"컥!"
한국 최고의 권사에게 배운 주먹이다. 남자의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스르릉.
강주혁을 구타했던 다크 엘프들이 칼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걸 휘두르기도 전에 강주혁은 이미 앞으로 몸을 날려 거리를 벌렸다.
"엑시움 라 키르베. 지금부터 내 명령을 따른다. 멈춰라."
강주혁은 다크 엘프 보초병과 마법을 쓰려고 손끝에 마나를 모으던 제사장에게 번갈아 가면서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목걸이로부터 뿜어져 나간 불길한 기운이 그들의 머리로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그들은 강주혁을 공격하기 위해서 들었던 팔을 다시 내리고는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지켜만 본다."
강주혁은 한 번 더 명령을 내린 다음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쿨럭! 쿨럭!"
그때, 기절해 있던 남자가 신음과 피를 토하면서 정신을 차렸다.
"으악!"
남자는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비명을 토하고는 다시 드러누웠다. 강주혁에게 맞은 복부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축제는 끝났다. 김주호."
강주혁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김주호는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네, 네놈은 누구지?"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네놈이 죗값을 치를 때가 왔다는 거야."
김주호는 한준공략의 헌터로 몇 년 전에 이 지역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공략팀은 전멸했고 그는 혼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밀림을 헤매다 우연히 목걸이 하나를 발견했다.
훗날 <정신 지배의 목걸이>라고 불리게 된 목걸이는 상대의 정신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아티팩트였다.
그 후, 김주호는 밀림을 떠돌다 다크 엘프들에게 발각되어 제사장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산 채로 심장을 적출당할 위기에 처한 김주호는 절체절명의 순간, 목걸이가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목걸이가 말해주는 문구를 따라했고 다크 엘프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제사장을 완전히 자신의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불행을 겪은 헌터가 하늘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해낸 영웅담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보는 기이하고도 끔찍했다.
다크 엘프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김주호는 밀림 밖으로 나가는 대신, 다크 엘프의 마을에 남아서 그들의 신으로 군림하는 걸 택했다.
왜 김주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미스터리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성실하고 실력이 좋은 헌터였다. 번듯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고.
김주호가 헌터로 일하면서 모종의 범죄에 가담했고 그게 들통이 나는 게 두려워서 밀림 속에 남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주호는 바깥세상에서 보낸 암살자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강박 속에서 살았다. 다크 엘프들이 생포한 헌터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잔인하게 고문해서 죽인 것도 김주호였다.
그래서 심연과도 같은 밀림이 김주호를 미치게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놈을 죽여라! 어서!"
김주호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다크 엘프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다크 엘프는 인간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것도 혐오스러워한다. 그런 그들이 김주호를 신으로 떠받들었던 것은 전적으로 목걸이가 가진 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목걸이는 지금 강주혁의 손에 있었다.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 텐데."
강주혁은 목걸이를 흔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어, 어떻게 목걸이에 대해서 아는 거지?"
"던전에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지. 나도 그 중 하나를 우연히 손에 넣었을 뿐이야."
강주혁은 악마처럼 웃어보였다.
"어떻게 내가 네놈 따위에게……."
김주호는 강주혁을 보면서 혼란스러워했다. 목걸이의 힘은 사용자보다 약한 사람에게만 작용한다.
김주호는 실력과 관록을 갖춘 베테랑 헌터였다. 한준공략에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그래서 다크 엘프 제사장의 정신까지 지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S급에 미치진 못했다.
강주혁은 김주호가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약한 척을 해왔다. 다크 엘프들에게 일부러 잡혔고, 당장 여기에 있는 모두를 죽일 수 있는데도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다.
만약 그 전에 진짜 힘을 드러냈다면 김주호가 다크 엘프들을 불러들이고 자신은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면 일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강주혁은 김주호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확신을 가지도록 연기를 했다.
"날 죽이면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거다."
"글쎄. 내 생각은 다른데."
"그 목걸이만으로는 이 미친놈들을 통제할 수 없다! 오직 나만이 이놈들을 다스릴 수 있다! 이놈들에게 나는 신이다!"
"이봐요. 김주호 씨."
강주혁은 싸늘한 눈빛으로 김주호를 노려보았다. 그의 몸이 공포로 뻣뻣하게 굳어갔다.
"숭배받는다고 인간이 신이 되는 건 아니야."
강주혁은 왼손으로는 김주호의 어깨를 오른손으로는 팔목을 잡았다.
"뭐, 뭐하는 거야?"
"이건 네놈이 죽인 헌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다."
강주혁은 순수하게 완력만으로 김주호의 팔을 몸에서 뽑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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