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저도 헌터니까요
"왜 그런 얘기를?"
그룹 사람들에게 회사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라고 하니 윤정석은 황당해했다.
"요즘 블랙 헌터들 때문에 상황이 많이 안 좋잖아요."
강주혁이 의뢰를 맡기기 전까지 윤정석은 블랙헌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마 먼 옛날의 도시 괴담 정도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헌터관리국과 대형공략회사의 합동조사단이 블랙 헌터들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언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블랙 헌터에 관한 기사를 쏟아 내고 있었다. 윤정석도 이런 분위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근데요. 팀장님."
"네."
"우리는 회사 소속의 헌터잖아요."
"그렇죠."
"몬스터 잡아서 돈 버는 게 우리 일 아닙니까? 우리는 경찰도 헌터관리국도 아니잖아요. 팀장님께서 이 일에 이렇게 열을 올리시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이해합니다."
강주혁은 블랙 헌터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다. 그의 집안이 겪었던 불행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블랙 헌터에게 있다. 그놈들이 신대성을 부추겼으니까.
그리고 강주혁에게는 경산마존의 손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블랙 헌터들이 활개를 칠 때마다 귀찮은 일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윤정석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보상을 제시해야 한다.
"제가 블랙 헌터들에게 맺힌 게 많은 사람이라서 그래요."
"그놈들한테 사기라도 당하신 거예요?"
"그놈들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큰 고생을 했죠."
"그러셨군요. 팀장님 입장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한테 회사와 무관한 일을 시키시는 건 좀 그렇군요."
"시키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일이죠. 물론, 제 부탁을 들어주느냐 마느냐는 정석 씨의 선택이죠. 들어준다면 개인적으로 감사를 표시하겠지만, 못하겠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을 겁니다. 약속하죠."
"저도 팀장님께 신세를 진 게 많으니 팀장님을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팀원으로서 팀장님을 돕고 싶지, 이런 식으로 돕고 싶진 않습니다."
강주혁은 윤정석에게 회사의 직원이라는 소속감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강주혁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과는 별개로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싶어진 것이다.
"스파이 노릇 하라는 건 솔직히 안 내키네요. 그냥 경찰이나 헌터관리국에 신고하면 안 됩니까?"
"정석 씨는 그룹 친구들을 신고할 수 있어요?"
"……종수 형이 정말로 선을 넘으면 그렇게 해야겠죠."
"안타깝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을 겁니다. 정석 씨만 친구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겠죠."
"왜요?"
"경찰에게는 헌터들을 컨트롤할 만한 힘이 없고 헌터관리국은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이니까요. 정석 씨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겁니다."
광야에 있는 블랙 헌터의 수는 최소 백 명이 넘는다. 그들을 모두 소탕하는 건 전투가 아니라 전쟁에 가깝다.
이런 긴박한 상황인 데도 이 일의 핵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헌터관리국 관리부장은 강주혁을 이용해 태원공략에 뭔가를 뜯어낼 궁리나 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이번 일에서 알 수 있듯이 헌터관리국에서도 정보가 새고 있었다.
"그 친구들한테는 블랙 헌터랑 싸울 의지가 없어요. 분명 대충 들쑤시기만 해서 잔챙이들만 잡겠죠. 그런 식으로 블랙 헌터들에게 대응할 수 있는 시간만 마련해 주겠죠."
"그래서 팀장님이 직접 나서시는 겁니까?"
"그런 셈이죠. 우리끼리 확실히 해 놓은 다음에 헌터관리국을 끌어들여도 늦지 않습니다."
윤정석은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강주혁은 윤정석의 그룹을 의심하게 된 후로 그룹에 대해서 나름대로 조사를 해 봤다.
인터넷으로 확인해 본 결과, 젊은 각성자들의 모임은 동호회 수준으로 많았다. 윤정석의 그룹도 그것들 중 하나일 뿐.
표면상으로는 친목 도모와 서로의 실력 향상이 목적이다. 법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다. 느슨한 조직이니까 사람 한두 명 정도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을 안 쓴다.
블랙 헌터들은 분명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야금야금 모아 왔을 것이다. 마치 조직폭력배들이 학교에서 주먹 좀 쓰는 양아치들을 신규 조직원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물론, 평범한 그룹도 있겠지만 적어도 윤정석이 속한 그룹은 블랙 헌터와 연루된 것이 확실하다. 김종수가 경산마존을 알고 있으니까.
"정말로 회사를 그만두라고 하면요?"
"제가 원하는 건 정석 씨가 회사를 그만두는 겁니다."
"네?"
"그래야지 종수 씨가 정석 씨를 완전히 신뢰할 테니까요."
"종수 형을 여전히 못 믿으시는군요."
"정석 씨는 믿을 수 있나요?"
자기 입으로 그룹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했으니 예전처럼 신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석 씨에게 우리 회사에 들어가라고 권한 사람이 종수 씨라고 했죠?"
"네. 팀장님."
"왜 그랬을 것 같아요?"
"일종의 도장 깨기가 아니었을까요?"
"종수 씨가 블랙 헌터랑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묻는 겁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 종수 씨가 정석 씨를 시험한 것 같습니다."
"시험이요?"
"블랙 헌터들도 사람이 필요합니다. 실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좋죠. 이번에 사라진 친구들도 종수 씨랑 정석 씨 다음으로 강하다고 했죠?"
"네."
"아마 블랙 헌터들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을 겁니다. 메이저 공략회사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재능이 아주 없지는 않으니까요. 세상에 대한 불만도 많고 블랙 헌터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잘 모르죠."
"그럼 저한테는 왜 안 물어봤을까요?"
"실력만 놓고 보면 정석 씨가 최우선 영입 대상이었겠죠. 하지만 정석 씨는 그런 제안을 받기에는 실력이 너무 좋았어요."
"실력이 좋은 사람을 찾는다면서요."
강주혁은 이해를 못 하는 윤정석에게 신광공략의 한태성에 대한 얘기를 해줬다.
"그런 사람이 있었군요."
"실력이 좋지만 욕심에 비해서는 모자라는 사람이었죠.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블랙 헌터들이 만든 불법적인 영약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그런 유혹을 느끼기 어려운 것 같아서 제외된 걸까요?"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정석 씨는 좀 전에 말한 친구들과는 달리 메이저 공략회사에 들어가서도 잘 적응할 만한 실력을 가졌어요.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컸죠."
윤정석은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그 자부심을 산산이 부숴 버린 사람이 강주혁이었으니까.
"사람은 스스로 부족하고 아쉬운 게 있어야 일탈의 욕망을 느낍니다. 하지만 정석 씨에겐 그런 게 없었죠."
"그랬던 것 같네요. 근데 그거랑 저한테 취직을 권한 거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정석 씨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비교 대상이 동년배 친구들입니다. 하지만 메이저 공략회사에는 정석 씨를 능가하는 고수들이 많아요."
"맞아요. 팀장님 같은 분도 계시니까요."
"아마 정석 씨가 회사에서 벽을 경험하고 좌절을 느꼈을 때를 노렸을 겁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순간을 맞이하기 마련이죠. 그 때 실력을 단기간에 올려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한번 해 보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윤정석은 회사에 들어온 후 강주혁이라는 통곡의 벽을 만났다. 그 벽 앞에서 좌절했지만, 벽을 저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꼼수를 찾기보다는 우직한 방법으로 발전하고자 했다. 강주혁에게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강주혁을 뛰어넘고 싶어 했다. 한태성 같은 인간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만약 정석 씨가 출신 성분 때문에 회사에서 차별이라도 당한다면 더 나은 세상을 보여 주겠다면서 영입을 제안하겠죠."
"그래서 이번 일을 핑계로 회사를 그만두라는 겁니까?"
"네. 그럼 분명 정석 씨에게 자기들과 한배를 타자고 제안할 겁니다."
윤정석은 얼굴을 찌푸린 채 강남게이트단지를 내려다봤다. 표정이랑 구도만 보면 꼭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 같았다.
"그다음은요? 제안을 받아들이나요?"
"네. 받아들이세요."
"정말로 어딘가로 데리고 가면요? 따라가요?"
"네. 놈들이 가자는 대로 끝까지 따라가세요. 가서 놈들의 뿌리까지 찾아가세요."
"그런 제안을 안 하면요?"
"이윤철 사장님께 말씀드려서 정석 씨가 회사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정석 씨는 잘 모르겠지만 사장님 세대부터는 블랙 헌터와의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회장님은 그 전쟁에서 사모님을 잃으셨죠. 우리 세대랑 이 일을 대하는 온도가 달라요. 신광공략이 우리 회사의 라이벌인 건 알죠?"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평소에는 으르렁대면서 싸워도 블랙 헌터가 나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협력합니다. 제가 임원들과 함께 투입된 작전에서도 그랬죠. 돈이 안 되는 작전이지만 태원과 신광의 임원들이 대거 투입되었죠. 블랙 헌터는 헌터 업계를 넘어서 이 사회 전체의 문제니까요. 그 문제가 회사의 이익보다도 우선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블랙 헌터랑 싸우는 데에 도움을 준다면 보상이 있을 거라는 말씀이시죠?"
"물론입니다. 정석 씨가 큰 공을 세우면 회사에서 탄탄대로가 펼쳐질 겁니다. 사실, 제가 이번 일에 열을 올리는 이유 중에는 그런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적만큼이나 중요한 게 명예니까요."
"진즉 그렇게 말씀하시죠."
그제야 윤정석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혹시 사장님도 팀장님 계획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정석 씨가 제 제안을 받아들이면 말씀드려 볼 생각입니다."
윤정석은 잠시 생각을 한 끝에 답했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회사 안에서든 밖에서든 정석 씨는 제 팀원입니다. 제 팀원은 제가 끝까지 책임질 겁니다."
* * *
윤정석의 동의를 구한 후 강주혁은 곧장 이윤철 사장에게 가서 계획을 알렸다.
"정말인가?"
"네. 사장님."
이윤철 사장은 강주혁을 보면서 황당해했다.
"너무 가능성이 희박하지 않은가?"
"다른 단서가 없지 않습니까?"
귀화초 서식지를 조사했지만, 광야에 최소 백 명 이상의 블랙 헌터가 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그 이상의 소득은 없었다.
인피면구를 만드는 장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근거지가 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한반도보다 몇 배나 큰 광야를 샅샅이 뒤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블랙 헌터들을 와해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블랙 헌터들이 광야에 마을이라도 건설하지 않는 이상, 그 놈들의 머릿수가 그렇게까지 불어난 걸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분명 외부에서 유입되는 인원들이 있을 겁니다."
"내 생각도 그렇긴 하네."
"그 인원들이 어디서 오는지를 추적하면 조직의 핵심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군. 헌터관리국에서 그런 식으로 접근해 보면 좋을 텐데."
"헌터관리국은 그냥 이번 일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강주혁은 헌터관리국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뭐? 그놈이?"
이윤철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디까지나 암시만 했을 뿐입니다."
"최도준 부장에 대한 얘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네. 진짜로 자네 아니, 우리한테 뭔가 바라는 게 있을 거야."
"바라는 게 있으면 내주실 겁니까?"
"당연히 아니지. 내가 좀 편하자고 그렇게 했다간 회장님이 노발대발하실걸?"
강주혁과 이윤철은 마주 웃었다.
"한준은 몰라도 우리는 건드리기 어렵지. 이제 이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기업인데."
"아마 사장님 앞이라면 그런 헛소리를 못 했을 겁니다."
"그건 자네를 평범한 팀장으로 봤다는 거고 그만큼 이 업계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뜻이지. 자네가 우리 회사와 헌터 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딴 헛소리를 입 밖에 꺼내지 못했을 거야."
강주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도준에 대한 인식이 이윤철이 가진 인식과 일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네 말대로 문제긴 하군. 이 시국에 그런 짓이니 하고 말이야."
강주혁의 예상대로 이윤철 역시 헌터관리국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것 같았다.
"정석 씨 복귀시키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 친구가 남 주기에는 아까운 실력자라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사장님."
강주혁은 이윤철에게 고개를 숙였다.
"회사 일만으로도 바쁠 텐데 블랙 헌터 잡는 일까지 신경 쓰려면 몸이 둘이어도 모자라겠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라도 있나?"
이윤철의 표정을 보니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저도 헌터니까요."
헌터니까 블랙 헌터랑 싸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강주혁은 자신이 블랙 헌터랑 싸워야지만 비로소 헌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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