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그러니까 알아서 기어요
블랙 헌터 소탕 작전 당일.
태원공략의 별관에 있는 소(小)강당에 30명의 헌터가 모였다.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세 공략회사의 헌터들이었다.
헌터들의 얼굴에서 짜증과 불만이 번져오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했지만 지금은 각자의 시계를 힐끗거리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것들 봐라.’
강주혁도 시간을 확인한 후 얼굴을 굳혔다.
10시까지 온다고 했던 헌터 관리국 소속 헌터들은 11시가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오겠다는 말도 없었다.
강주혁은 헌터들을 훑어봤다. 내로라하는 대형 공략회사에서 대표로 보낸 사람들이다. 임원까지는 아니지만 다들 이 바닥에서 한 가닥씩 하는 인물들이다. 아마 이런 경우를 경험한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벌컥.
그때, 소강당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열댓 명의 헌터들이 들어왔다. 다들 흉흉한 기세를 풍겨서 꼭 싸우러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선두에 선 중년 남자가 오만한 시선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을 쭉 훑었다.
‘하필이면 저 인간이…….’
강주혁은 남자를 보면서 인상을 썼다. 회귀 전부터 알고 있던 인간이었다.
“다 모였습니까?”
남자의 이름은 차도준.
헌터 관리국의 관리부 부장으로 회귀 전에도 헌터들을 괴롭히는 걸로 악명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결국에는 자신이 쌓은 업보로 인해 몰락했지만, 그동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헌터 업계에 수많은 패악을 남겼다.
“셋, 여섯, 열.”
차도준 뒤에 있는 직원이 손가락으로 헌터들의 머릿수를 새기 시작했다.
헌터들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뭐라 하지 못했다. 헌터 관리국에 찍혀봤자 귀찮은 일만 생길 테니까. 물론, 임원쯤 되는 사람이 나오면 헌터 관리국에서도 눈치를 본다.
차도준도 상대가 사장쯤 되면 굽실거리기 바쁘다. 회장이 나오면 발바닥이라도 핥을 것처럼 굴고.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인간이니까. 조금이라도 자기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되면 어떻게 해서든 짓밟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 임원들이 참여하지 않는다고 이미 통보를 한 상태였다. 차도준은 자기가 여기에서 자기가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저러는 것이다.
“스물…….”
“다 왔으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강주혁이 인원 체크를 하던 헌터의 말을 잘랐다. 소강당에 있는 헌터들이 모두 강주혁을 쳐다봤다.
“왜 이렇게 늦은 겁니까?”
강주혁이 앞으로 걸어나가 차도준 앞에 섰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공략회사 헌터들이 놀란 눈으로 강주혁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기대와 걱정이 섞여 있었다.
차도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강주혁을 노려보았다. 강주혁도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일이 좀 있었습니다.”
차도준이 무심한 투로 답했다.
“우리는 일이 없어서 한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는 줄 압니까?”
“이름은?”
“그렇게 묻는 댁은 누구신데요?”
차도준이 눈을 부라리면서 자신의 기세를 끌어올렸다. 강주혁도 자신의 격을 드러냄으로써 맞불을 놓았다.
관리국 헌터들도 기세를 드러내 강주혁을 위협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주혁이 드러낸 기운이 그들을 압도해 소강당 전체를 뒤덮었다.
“가, 강 팀장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른 헌터들이 강주혁을 말리기 위해서 그에게 다가왔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지 계속해서 비틀거렸다.
강주혁의 시선을 받고 있는 차도준은 상황이 더 심했다. 느끼는 것만으로도 수명을 줄여버릴 것 같은 살의를 정면에서 받아낸 차도준은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관리국 소속의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만난 짐승이 꼬리를 말듯 그들은 자신들의 기세를 얼른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딱 한 사람.
맨 뒤쪽에 있는 강주혁 또래의 헌터는 다른 헌터들이 맥을 못 추는 와중에도 당당히 서 있었다.
강주혁의 시선이 그 헌터에게 향했다. 그 역시 강주혁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 맞부딪혔다.
그 헌터는 자신의 기세를 드러내 강주혁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강주혁의 기세에 굴복하지도 않았고. 그저 관찰자의 시선으로 강주혁을 뜯어볼 뿐이었다.
‘제법이군.’
강주혁은 격을 거두어들였다.
“헉!”
압박감에서 해방된 차도준은 신음을 토했다. 관리국 소속 헌터들도 휘청거렸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건 공략회사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들 표정만큼은 통쾌해했다.
“관리국에서 오신 건 알고 있습니다. 이름이랑 직함은?”
“차도준 관리부장이오.”
차도준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눈빛은 적의로 이글거렸지만 차마 강주혁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했다.
“태원공략의 강주혁 팀장입니다. 많이 늦으셨군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이 있었습니다.”
“그건 그쪽 사정이고요. 늦으면 늦는다고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서 이렇게 죽치고 앉아 있는 줄 알아요?”
“강 팀장님, 그 정도로 하시죠.”
“에이, 같이 싸울 사람들인데 왜 그러세요.”
강주혁이 너무 강하게 나가는 것처럼 보이자 주변의 헌터들이 그를 말렸다.
헌터 관리국과 트러블을 일으켜봤자 좋은 꼴을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강주혁에게 세무조사가 들어가거나 회사에 감사가 들어올 수도 있었다.
아마 여기에 있는 헌터들도 되도록 헌터 관리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당부를 받고 왔을 것이다.
“게이트 밖에서 진행하는 작전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차도준이 변명조로 말했다.
“그럼 그걸 미리 알려주셔야죠.”
“미안하게 됐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은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사과를 받아냈으니 이 정도로 하기로 했다.
“피차 바쁜데 곧바로 진행하시죠.”
“그럽시다.”
차도준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국 직원이 작전에 대해서 설명했다. 사실, 작전이랄 것도 없었다. 각자가 맡은 지역에 있는 귀화초 서식지에 가서 흔적을 찾는다. 블랙 헌터를 만나면 교전하되 되도록 생포한다.
이게 끝이었다. 던전 안에 들어가면 통신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 제대로 된 합동 작전을 펼치기도 어려웠다.
“그럼 곧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강주혁은 태원공략의 헌터들을 데리고 움직이려고 했다.
“우리랑 가시죠.”
차도준이 말했다.
관리국의 헌터들도 작전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장까지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부장님까지 가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입니다.”
차도준은 자신이 대단한 실력자인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강주혁은 그의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 잘 알고 있었다.
차도준은 원래 지방에 있는 중소 공략회사 소속의 헌터였다. 그의 실력으로 갈 수 있는 곳은 그곳이 한계였다. 출세를 꿈꾸는 차도준에게는 성에 안 차는 자리였을 것이다.
차도준에게는 좋은 집안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정부 고관으로 있는 친척의 도움으로 헌터 관리국으로 옮긴 그는 그곳에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물론, 헌터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인맥과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일선에서 헌터들을 대하는 직급 중 가장 높은 관리부장이 된 차도준은 그때부터 전횡을 일삼았다.
특히, 대형공략회사 헌터들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강주혁은 그게 엘리트 헌터들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끝나고 보지.”
차도준은 관리국 소속 헌터들을 세 팀으로 나눈 후 두 팀을 다른 회사의 헌터들을 따라가게 했다.
명목상으로는 지원이었지만 그 회사의 영역에 들어가서 트집을 잡을 만한 건수를 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갑시다.”
차도준과 한 개의 팀이 태원공략 헌터들을 따라왔다. 강주혁과 대등한 기세를 보여주었던 헌터도 함께였다.
강주혁은 그들을 데리고 태원공략 쪽 웨이포인트를 넘었다.
“여기서부터 도보로 이동해야 합니다.”
귀화초가 있는 지역에 도착한 일행은 숲을 헤치면서 천천히 나아갔다.
강주혁은 선두에 서서 일행을 이끌었다. 차도준은 은근슬쩍 그에게 따라붙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확실히 블랙 헌터의 핏줄은 다르더군요.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입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강주혁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차도준은 거만한 표정으로 강주혁을 바라보았다. 좀 전의 치욕은 잊어버린 것 같았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할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된 후 정부에서 강 씨 집안을 감시하고 있었을 거라고 추측해왔다. 정부 입장에서는 극도로 위험한 사람이니까 절대 그냥 둘 리가 없었다.
아마도 회귀 전에도 감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정부 부처는 당연히 헌터 관리국이다.
“인상 깊었다니 다행이군요.”
강주혁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차도준은 그를 따라가면서 말을 이었다.
“반역죄를 짓고도 처벌받지 않은 사람은 조부님이 유일하시죠.”
차도준이 빈정거리는 투로 강주혁의 속을 긁었다. 일부러 말소리를 낮추는 게 나는 네 비밀을 알고 있다고 은근히 협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주혁은 애초에 혈통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박종근 회장과의 일을 겪으면서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있었으니까.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더라도 실력으로 편견을 압살할 자신도 있었고.
“그럼 우리 집안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만약 정부가 경산마존을 주시하고 있었다면 그의 사후에 자식들이 겪었던 불행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정부의 정보력이라면 그게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정부가 신대성이 저지른 짓을 알고도 눈감아줬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였다.
“악인의 자식들에게 어울리는 최후였죠.”
“저한테 이러시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강주혁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말했다.
“이 바닥에서 생매장당하기 싫으면 알아서 기어라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강주혁은 어떻게 이런 쓰레기가 관리부장이라는 지위까지 올랐는지 의아했다. 어쩌면 헌터 관리국 전체가 썩었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막 나가는 걸 보니 한준그룹 장 회장님이 용돈을 두둑이 챙겨주시나 봅니다. 잘려도 노후 걱정이 없으니 그런 거겠죠?”
회귀 전 차도준이 몰락한 것은 뇌물수수 때문이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공략회사로부터 뇌물을 받고, 특혜를 주는 식이었는데 그 기간이 10년이 넘고 금액이 수십억에 이르렀다.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더러운 거래를 일삼고 있을 것이다.
“뭐?”
이번에는 차도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강주혁도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표정관리를 못하고 있었다.
“너 이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차도준이 언성을 높였다. 뒤따르던 헌터들도 화들짝 놀라서 발걸음을 멈췄다.
“목소리 낮추십시오. 우리는 작전 지역에 있습니다. 블랙 헌터들 전부 도망치게 만들 셈입니까.”
다른 헌터들도 기가 차다는 얼굴로 차도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가시죠. 거의 다 왔습니다.”
강주혁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행은 다시 움직였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아는 것 이상으로 당신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알아서 기어요.”
강주혁은 차도준 근처로 다가가 속삭이듯이 덧붙이고는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새하얗게 질려버린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일행은 타오르는 불처럼 생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들판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흩어져서 확인해 보죠.”
헌터들은 들판을 포위하듯이 넓게 흩어져서 이동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쪽은 안 건드린 모양이군요.”
일행은 다시 들판 중심으로 모였다.
“돌아갑시다.”
차도준이 결론을 내렸다.
바로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주혁은 그 소리가 차도준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캉!
“히익!”
강주혁을 상대로 대등한 모습을 보여줬던 헌터가 칼을 휘둘러 차도준의 머리를 노리던 화살을 튕겨냈다.
차도준은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제길, 어디서 쏜 거야?”
당황한 헌터들이 우왕좌왕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는 탁 트인 들판뿐. 지평선 너머에서 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저 정도 거리에서 저격을 한다는 건 임원급 궁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주혁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어서 머리를 굴렸다. 그의 시선이 발아래로 향했다.
“아래다!”
강주혁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들판의 바닥에서 수십 개의 신형이 튀어나왔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