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정말로 저를 죽일 생각이었군요
봄꽃이 부슬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가만히 선 채 그 비를 맞고 있는 신다은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새하얀 도복 차림에 머리는 단정하게 위로 말려놓았다.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다.
꽃구경을 하러 온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2년 만에 보네요. 잘 지냈어요?”
2년 전 송년회에서 봤을 때에는 철이 덜 든 말괄량이 아가씨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좀 더 차분하고 성숙한 인상을 풍겼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강주혁은 권대호와 함께 있는 자리에 신 씨 집안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아무리 권대호가 신대길과 그의 여식을 총애한다고 해도 그랬다.
“유정 언니가 재미있는 얘기를 하더군요,”
“재미있는 얘기요?”
“대호 할아버지한테 권법을 배운다면서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강주혁은 약간의 원망을 담아 권대호를 바라봤다. 그는 그저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대호 할아버지가 우리 집안사람들을 제외하고 권법을 가르쳐 준 사람은 강 팀장님이 처음이에요. 할아버지가 점찍은 제자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왔어요.”
“너랑 한 판 붙어보고 싶단다.”
권대호는 킬킬거리면서 말했다.
“저하고요?”
강주혁은 황당한 눈으로 권대호와 신다은을 번갈아 가면서 봤다.
확실히 신다은의 복장이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가 강 팀장님 얘기를 많이 하세요. 회사에서 명성이 자자하다면서요?”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죠.”
“그 소문 한번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네요.”
강주혁은 한 발 물러섰다. 부회장의 외동딸을 다치게 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두려우세요?”
신다은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헌터가 아닌 사람이랑 싸우는 게 싫을 뿐입니다.”
신다은이 검의 천재라는 말은 익히 들어왔지만, 현역 헌터로 활동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신 씨 집안사람이니 유명 헌터 아카데미를 다니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친척들과는 달리 신다은은 헌터로 활동하지 않았다. 강주혁이 알기로는 그랬다.
척!
강주혁이 신다은의 도발에도 넘어오지 않자 권대호가 갑자기 품에서 약병을 하나 꺼냈다.
“뭡니까?”
강주혁이 물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명약이다. 둘 중 하나가 죽어도 살려낼 수 있으니 걱정 말고 싸워라.”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그런 약이 어디 있습니까?”
효과가 아주 뛰어난 치유 물약이 있을 수는 있어도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치유 물약 같은 건 없다. 그건 S급 힐러의 특권이다.
“어허, 이놈아. 속고만 살았느냐?”
“왜 이렇게 싸움을 붙이지 못해서 안달이십니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과 불 구경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싸움 구경이 으뜸이지.”
“…….”
강주혁은 고개를 돌려 다소곳이 서 있는 신다은을 봤다.
2년 만에 만났는데 다짜고짜 시비부터 걸어오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다은 씨는요? 굳이 저랑 싸워야 할 이유가 있나요?”
“있죠.”
“뭡니까?”
“함께 무도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호기심?”
“제가 걷는 길과 다은 씨가 걷는 길은 겉보기만 같을 겁니다. 제 검은 괴물과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제 검은 장식품처럼 보이시나요?”
신다은이 천재라는 소문도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헌터 업계는 실력검증에 관해서라면 아주 깐깐한 곳이니까.
아무리 신태원의 아들이라고 해도 신대성이 그저 그런 실력자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신다은의 실력이 거품이라면 천재라는 얘기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뼛속까지 헌터인 강주혁에게 무언가를 죽이지 않는 검술은 그럴듯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는 목적이 다르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강주혁은 예의상 돌려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더욱 제 검술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실전에서 몬스터를 베어가면서 만든 검술이랑 어떤 점이 다른지 보여드리죠.”
신다은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 빼고 붙어봐라. 너도 배우는 게 있을 거다.”
권대호까지 부추기고 나섰다. 강주혁은 한숨을 쉬고는 칼집에서 멸마검을 뽑았다.
사실, 실력자를 상대로 멸마검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신다은이 그만한 실력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신태원이 애지중지하는 손녀라면 아주 형편없지는 않을 것이다.
“봐 드리지 않을 겁니다.”
강주혁이 자세를 잡자 신다은도 자기 검을 뽑으면서 웃음을 흘렸다.
권대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봐주면 아빠한테 얘기해서 강 팀장님 자르라고 할 거예요.”
“…….”
“전력을 다해주세요.”
“안 잘리려면 그래야겠군요.”
“제가 한 수 아래니까 먼저 갈게요.”
신다은은 강주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보법을 펼쳤다.
‘음?’
갑작스럽게 돌진해 상대를 위협하는 것도 현란한 움직임으로 상대를 속이는 것도 아니었다.
신다은은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선을 그리면서 강주혁에게 천천히 미끄러져 왔다.
‘싸우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강주혁은 신다은의 움직임에서 살기도 투지도 읽을 수 없었다.
‘단번에 끝낸다.’
봐주지 말라고 했으니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촤악!
강주혁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단순한 검격이었지만 그것에 담긴 힘과 속도만큼은 진심이었다.
휘릭!
하지만 신다은은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미끄러지면서 강주혁의 검을 흘려내는 동시에 옆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젠장!’
강주혁은 갑자기 옆에서 파고드는 검을 보고는 잽싸게 몸을 뒤로 빼야만 했다. 다행히 칼은 그의 옆구리를 스치기만 했다.
‘뭐지?’
검을 휘두른 게 아니라 검을 들고 옆으로 지나가는데 그 길에 우연찮게 강주혁이 있어서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검에 당연히 담겨야 하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빠르시네요.”
신다은은 강주혁이 주춤거리면서 뒤로 빠졌는데도 다가오지 않았다.
“제게 겸손함을 알려주시는군요.”
강주혁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신다은이 아무리 천재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실전에서 경험을 쌓는 자신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다은은 강주혁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검술을 보여줬다. 강주혁은 이 싸움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직 부족함이 많아요.”
“회장님께서 가르쳐 주신 건가요?”
신유정과 신태훈을 통해서 접한 검술과는 차이가 컸다.
실력에서 급이 다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혀 다른 검술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기초만 다져주셨죠. 지금은 저만의 검술을 만들어보려고 노력 중이에요.”
“제가 그 노력에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지금도 충분히 그러고 있어요.”
“다행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가죠.”
“좋아요.”
강주혁은 실전에서 그렇게 한 것처럼 단숨에 신다은에게 쇄도했다.
촤악!
이번에도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휘이잉.
신다은은 이번에도 바람처럼 강주혁의 검을 흘려내고는 옆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촤악!
강주혁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공중에서 왼손으로 낚아채면서 반대 방향으로 휘둘렀다.
이번에는 다리. 예상대로 신다은은 낮게 도약해 검을 밑으로 흘려보냈다.
공중에 떠 있을 때가 땅에 발을 디디고 있을 때보다 움직임을 읽기 쉬운 법. 강주혁은 곧장 검을 위로 쳐올렸다.
탓!
신다은은 공중에서 방향을 틀면서 강주혁의 검을 흘려보냈다. 권대호의 귀멸축공보처럼 내공으로 공기를 조작한 게 아니었다.
‘꽃잎을?’
지금도 나무에서 꽃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신다은은 공중에서 그것들 중 하나를 밟고 공중에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엄청난 보법이군.’
강주혁은 계속해서 신다은을 압박해갔다.
그녀는 떨어지는 꽃잎을 디디고 날아다니는 신기를 계속해서 펼쳐 보였다.
그렇게 강주혁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예의 그 무심한 검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사아악!
예기가 넘치는 검이 강주혁의 눈앞에서 꽃잎 하나를 반으로 갈랐다.
머리를 빼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강주혁의 미간에 큰 흉터가 남았을 것이다.
‘유려하다.’
바람에 실려 꽃과 함께 하늘거리는 신다은의 검은 보는 눈을 즐겁게 했다.
마치 정상급 발레리나가 펼쳐 보이는 발레처럼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다.
강주혁은 신다은의 검술을 일종의 장식품이라고 판단했다. 그 강함을 알게 된 지금에도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확실히 그녀의 검술에는 예술작품처럼 미학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효율적이다.’
마치 춤을 추듯이 움직이고 있지만 움직임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바람에 몸을 맡긴 꽃잎이 날기 위해 힘을 쓰지 않는 것처럼 신다은도 힘을 전혀 들이지 않으면서 회피와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강주혁은 맹렬한 검격으로 그 흐름을 깨트리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유유히 빠져나갔다. 마치 공기를 베는 느낌이었다.
척!
수십 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신다은은 움직임이 크지 않아서 그랬고, 강주혁은 체력이 압도적으로 좋아서 그랬다.
항상 싸움에서의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강주혁은 신다은에게 말려서 자신의 페이스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졌군요.”
강주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강 팀장님은 기술을 하나도 안 쓰셨잖아요. 봐주고 있는 거 다 알아요.”
신다은이 따졌다.
“그 기술은 적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죽이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설사 그걸 쓰더라도 다은 씨가 맞아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죠. 우리 조금만 더 해봐요. 저도 밑천을 드러낼게요.”
“좋습니다.”
강주혁은 자신이 이 싸움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해지기 위한 배움은 언제나 그를 즐겁게 했다. 신다은과의 대련은 권대호의 말대로 배울 점이 많았다.
신선하면서도 유쾌한 충격이었다.
‘반드시 파훼한다.’
강주혁은 어떻게든 신다은의 저 신묘한 보법을 깨부수고 싶었다.
광역 기술을 사용하면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게 하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강주혁은 실전 헌터만이 가질 수 있는 감각으로 신다은을 뛰어넘고 싶었다.
탁!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신다은은 바람에 실려 오는 듯했고, 강주혁은 마치 태풍을 끌고 오는 것 같았다.
강주혁은 엄청난 기세로 다가갔지만 정작 신다은에게 닿은 후에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의 공격을 흘리려던 신다은은 잠시 멈칫했으나 개의치 않고 그의 옆으로 빠져나갔다.
강주혁은 때를 놓치지 않고 휘두르지 않았던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온다!’
하지만 그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면서 정수리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강주혁은 몸을 회전시키면서 신다은을 공격하는 대신, 앞으로 몸을 날려 자리를 이탈했다.
콰지직!
엄청난 크기의 벼락이 강주혁이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거의 청룡강림검을 썼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벼락이었다.
휙!
공격을 피한 강주혁이 전격을 향해 내공이 실린 검을 던졌다.
벼락이 때맞춰 사라지고 그 뒤에 무방비로 서 있던 신다은이 나타났다.
탁!
어느 틈엔가 나타난 권대호가 강주혁의 검을 낚아챘다. 권대호의 손에 걸린 멸마검이 파르르 떨렸다.
칼끝에는 눈이 휘둥그레진 신다은이 서 있었다.
딱!
“아!”
권대호가 바로 옆에 있던 신다은은 머리에 꿀밤을 날렸다.
“왜 때려요!”
신다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ㅁ
“이 한심한 것아, 준비도 안 된 상태로 비전절기를 날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그래야지 맞는다고요! 할아버지가 뭘 안다고 잔소리예요!”
“그래서 맞았냐? 저놈이 맞았냐고?”
신다은은 아무 말도 못하고 씩씩거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고고해 보이던 여인이었는데 꿀밤을 한 대 맞더니 성질이 더러운 소녀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싸울 때는 항상 다음 수를 생각해놓으라 그랬지. 저놈은 아직 꺼내 들 카드가 9할 넘게 남았다.”
“뭐가 9할이에요! 강 팀장도 칼 던졌잖아요!”
“저놈은 주먹질도 칼질만큼 잘해! 이것아!”
신다은은 혼자서 뭐라고 구시렁거리면서 땅에 꽂혀 있던 자신의 검을 뽑았다.
파직. 파지직.
칼날 주위에는 여전히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그게 비전절기였습니까?”
강주혁이 물었다.
“파천제왕검의 비전절기다. 태원 형님이 썼다면 우리 셋 다 사이좋게 타죽었겠지.”
권대호가 대신 답했다.
“정말로 저를 죽일 생각이었군요.”
강주혁은 어이가 없어서 신다은을 쳐다봤다. 그녀는 먼 산을 보면서 변명조로 말했다.
“그, 그래야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