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죽이지 않고 제압해야 합니다
“쿨럭!”
김정현은 피를 토하면서 앞으로 축 늘어졌다.
김정현의 등 뒤로 붉은색 갑주를 입은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덮개(visor)로 가리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으나 그 속의 시선은 분명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악령이 깃든 붉은 갑주. 공략 초반에 일행을 창으로 저격한 적이 있는 레드 아머였다.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강주혁도 이번에는 놀라고 말았다. 보스룸에 레드 아머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여기에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게다가 레드 아머의 접근을 일행 중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마도 계단 뒤쪽에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가.’
강주혁은 미노타우로스 왕과 싸우느라 모든 내공을 소진했다. 왕으로부터 내공을 일부 흡수하기는 했지만, 아직 부족했다.
부족해진 내공이 신체 능력의 일시적인 하락을 야기한 것 같았다. 그래서 레드 아머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레드 아머가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숨길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으아아아!”
악령이 깃든 붉은 갑옷이 쥐고 있던 창을 틀었다. 몸속에 박힌 창이 돌아가자 김정현이 비명을 질렀다.
“김 팀장님!”
위이잉!
일행들이 공격에 나서려는 찰나, 창을 중심으로 내공이 모여들었다.
펑!
창을 중심으로 폭발이 일어나면서 김정현의 배에 구멍이 뚫렸다.
털썩!
김정현이 피를 왈칵 쏟으면서 무릎을 꿇었다. 배의 상처가 너무 커서 등 뒤에 있는 레드 아머가 보일 지경이었다.
“공격해요!
레드 아머는 김정현의 몸에서 뽑아낸 창을 일행에게 겨누었다.
콰지직!
신유정이 뇌기를 끌어내는 것과 동시에 유한길의 손에서 라이트닝 볼트가 뿜어져 나갔다.
팡!
레드 아머는 창을 빙글빙글 돌려서 라이트닝 볼트를 막아냈다.
“부장님은 김 팀장님을!”
강주혁은 앞으로 달려나가려는 신유정의 어깨를 잡고는 말했다.
“알겠어요.”
신유정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김정현에게 달려갔다.
강주혁이 봤을 때 저 정도 상처면 치유 물약으로 수습할 수 없다. 뛰어난 힐러가 필요한데 문제는 그 뛰어난 힐러가 김정현이라는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챙! 캉!
안다정이 가장 먼저 레드 아머와 교전을 시작했다. 강주혁도 합세해 합을 나눴다. 뒤에서 유한길이 마법을 지원해 줬다.
카아아앙!
레드 아머가 강주혁의 대검을 창으로 막아냈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통로에 울려 퍼졌다.
자세히 보니 창대까지 쇠로 되어있는 창이었다.
“으아아아!”
안다정이 기합을 내지르면서 레드 아머를 압박했다. 양손으로 사용하는 장창으로는 그녀의 빠르고 경쾌한 검술을 막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콰직!
안다정의 검이 붉은 갑주에 연달아 상처를 남겼다. 갑옷이 두꺼워서 결정적인 한 방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분명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했던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
퍽!
“윽!”
하지만 너무 깊이 파고든 탓에 레드 아머의 체술에 당하고 말았다.
레드 아머의 발차기를 맞은 안다정이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제때 호신강기를 둘렀기에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자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레드 아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창을 찔렀다.
펑! 펑! 펑!
하지만 유한길이 때맞춰 날린 매직 미사일을 두들겨 맞아서 공격이 더뎌졌다.
강주혁과 안다정이 본격적으로 교전을 시작한 후로 유한길은 오폭의 위험이 있는 상급 마법을 쓰기 보다는 파괴력이 떨어지지만 정확도가 높은 마법을 썼다.
그런 마법들로는 레드 아머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는 없었지만 흐름을 끊어놓을 수는 있었다.
레드 아머는 여전히 창을 내지르고 있었으나 그 움직임은 처음처럼 날카롭지 못했다.
부웅!
강주혁은 레드 아머가 주춤하는 틈을 노리고 대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레드 아머는 딜레마에 빠찔 수밖에 없었다. 창을 완전히 뻗으면 안다정을 찌를 수 있지만 동시에 자신은 강주혁에게 두 쪽이 날 것이다.
카아아앙!
강주혁이 전력으로 휘두른 대검이 또 한 번 창대에 막혔다. 레드 아머는 안다정을 공격하는 대신 방어를 택한 것이다.
육신이 악령의 숙주에 지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다.
‘청룡뇌즉참.’
강주혁은 그 상태에서 또 한 번 전력을 끌어냈다.
파지직! 빠각!
또 한 번 힘이 실린 데몬의 흑검이 기어이 쇠창을 부러뜨리고 레드 아머의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크악!
레드 아머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대로 몸뚱이를 반으로 갈라버릴 수도 있었으나 강주혁은 일부러 막판에 힘을 뺐다. 레드 아머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미궁 밖에서 처음 조우했을 때 죽이지 않은 것도 지금 공격에서 정수리가 아니라 어깨를 노린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푸악!
강주혁이 어깨에 박혀 있던 검을 뽑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크아아아!
레드 아머가 괴성을 토하면서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내 상체를 일으켜 강주혁에게 덤벼들었다.
퍽!
강주혁은 대검의 손잡이로 머리통을 찍었다. 레드 아머가 완전히 나자빠졌다.
“강 팀장님?”
강주혁이 몬스터를 죽이지 않자 안다정이 의아해했다.
“사람입니다.”
“뭐라고요?”
“이 안에 사람이 있다고요.”
“레드 아머에요? 설마?”
레드 아머는 주인 잃은 갑옷에 악령이 깃든 몬스터. 레드 아머 안은 대개 텅 비어 있다.
주인의 흔적이 남아있어도 해골만 남아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걸 보세요.”
강주혁은 대답 대신에 레드 아머의 투구를 벗겼다.
피부가 익사한 시체처럼 창백하고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분명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깐만!”
유한길이 달려왔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 차장!”
레드 아머의 얼굴을 알아본 유한길이 그를 끌어안으면서 오열했다.
“아는 사람입니까?”
유한길은 이미 넋이 나가버린 상태였기에 강주혁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팀장님, 진정하시고 물러나세요. 이 사람은 더 이상 헌터가 아닙니다. 깨어나면 팀장님을 공격할 겁니다.”
강주혁은 일단 유한길을 레드 아머에게서 떼어놓았다. 유한길도 뒤늦게 위험성을 인지하고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10년 전에 실종된 헌터인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얼굴이 좀 상했지만 분명 이정종 차장입니다.”
마음을 진정시킨 유한길이 답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안다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유한길도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는 인상을 썼다.
“더 이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단, 김 팀장님 상태부터 체크하죠.”
강주혁은 두 사람을 데리고 신유정과 김정현에게 돌아갔다.
“팀장님…….”
신유정은 김정현을 꼭 끌어안은 채 울고 있었다. 그녀가 흘린 눈물이 턱 끝에 맺혔다가 김정현에게로 떨어졌다.
“어떻게 된 거예요? 김 팀장님은?”
신유정은 울먹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예상대로 김정현은 숨을 거두었다.
치유 물약은 제때 쓰기만 하면 잘려나간 팔다리도 붙여줄 수 있을 만큼 치유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손상된 장기를 회복시키는 것은 어렵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하긴 하지만 장기는 다른 부위에 비해 재생되는 속도가 많이 느리다. 그래서 장기가 회복되기 전에 생명 기능이 멈춰버리는 경우가 많다.
지금처럼 장기의 일부가 아예 없어져 버린 경우에는 생존이 더더욱 어렵다.
물론, 영력이 높고 그걸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상급 힐러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S급 힐러의 부활 스킬은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절명해 버렸다.
“저 사람은 뭐죠?”
신유정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레드 아머를 노려보았다.
“이전 공략 때 실종되었던 사람입니다.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지만 살아있는 건 분명합니다.”
강주혁이 답했다.
“저 사람이 누구든 내가 반드시 죽일 거예요.”
신유정이 검을 빼내 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기절한 레드 아머에게 달려들 것 같은 기세였다.
“안 됩니다. 저 친구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유한길이 신유정을 막아섰다.
“술에 취해서 사람을 죽인다고 죄가 없어지나요?”
신유정의 살기는 유한길을 향했다. 유한길도 지지 않고 기세를 끌어올렸다.
“둘 다 그만 하세요!”
안다정이 호통을 치면서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쾌락.”
강주혁이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일행은 황당한 시선으로 강주혁을 쳐다봤다.
“여기에 들어오는 데 필요했던 단어는 쾌락이었습니다. 쾌락하면 떠오르는 몬스터 없어요?”
강주혁은 묻는 얼굴로 세 사람을 쳐다봤다.
“……서큐버스.”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안다정이 정답을 말했다.
“90년대 말에 영국에서 서큐버스의 매혹에 빠져서 3년 동안 던전에 잡혀 있다가 구출된 헌터가 있었습니다. 3년 동안 제대로 먹고 마시지도 못했는데 살아 있었다고 하더군요. 3년 동안의 기억은 완전히 잃어버렸지만 요양 후에 헌터로 다시 복귀했을 정도로 건강했다고 합니다. 서큐버스에게 매혹 상태에 빠진 노예들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방법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요?”
신유정이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강주혁은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유한길에게 질문했다.
“유 팀장님, 10년 전 공략팀에 S급 힐러가 있었습니까?”
공략 불가 지역에 대한 공략이고 무려 세 개의 팀이 동원되었으니 없을 수가 없었다.
공략팀이 와해 된 건 미궁 안이다. 하지만 일행은 미궁에서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
10년 전이라고 해도 전투를 벌이다 사망했으면 옷가지라도 남아 있어야 한다. 미노타우로스들이 주기적으로 미궁을 청소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고로 헌터들은 높은 확률로 서큐버스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던전의 구조상 이 지역의 진정한 주인은 서큐버스. 강주혁의 기억대로라면 그냥 서큐버스가 아니라 서큐버스 여왕이다.
“있습니다. 바로 저 친구죠.”
유한길이 기절해 있는 이정종 차장을 가리켰다.
“S급 힐러가 창을 저렇게 잘 다룬다고요?”
안다정이 경악했다.
“딱 김정현 팀장 같은 케이스였죠. 클래스도 실력도. 임원 자리가 내정된 인재였습니다.”
유한길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잘 됐군요. 우리가 서큐버스를 잡으면 이정종 차장의 매혹 상태에서 풀릴 겁니다. 그럼 이정종 차장의 도움을 받아서 김정현 팀장을 살리는 겁니다.”
“그런 방법 있었군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일행은 탄성을 터뜨렸다. 날카로워졌던 신유정의 표정도 풀렸다.
“유한길 팀장님은 여기에 남아계시죠. 일단 김정현 팀장의 육신을 얼려주세요. 최대한 부패를 늦춰야 합니다.”
부활 주문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다.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면 먹히지 않는다. 시체를 최대한 온전한 상태로 보존하려면 냉각이 필수다.
“그리고 이정종 차장이 정신을 차렸을 때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는 얼굴이면 더 좋겠죠. 깨어나면 곧장 김정현 팀장부터 부활시키세요.”
“알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서큐버스를 잡기 전에 이정종 차장이 깨어날 경우, 팀장님을 공격할 겁니다. 죽이지 않고 제압하실 수 있겠어요?”
마법사는 대량학살에는 적합하지만 일대일 싸움에는 약하다. 김정현을 일격에 보내버린 실력자라면 유한길이 감당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객관적인 스펙은 저 친구보다 떨어지지만 싸울 때 나타나는 안 좋은 습관은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때 제 부사수였던 녀석이니까요.”
“잘 됐군요. 그럼 뒷일을 부탁합니다. 가시죠.”
강주혁은 안다정과 신유정을 데리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달렸다. 통로는 점차 어두워지다가 갑자기 탁 트인 곳이 나타나면서 밝아졌다.
왕실의 대전처럼 잘 꾸며진 홀이었다.
“저기.”
안다정이 손가락으로 홀의 끝에 있는 왕좌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한 악마가 도도하게 다리를 꼰 채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는 모두 열한 명의 레드 아머가 각자의 무기를 든 채 도열해 있었다.
일행을 발견하고도 어디 한번 덤벼보라는 듯 지켜보고만 있었다.
“신 부장님.”
“네?”
“10년 전 이 지역에서 실종된 헌터가 열두 명이라고 했죠?”
“네. 맞아요.”
“모두 살아있는 것 같군요.”
이정종 차장에다가 열한 명을 더하면 정확하게 열두 명이다. 모두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큐버스의 노예로 살아온 것이다.
“죽이지 않고 제압해야 합니다.”
강주혁은 신유정을 보면서 말했다.
김정현을 살리겠다는 마음이 앞서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아시겠어요?”
강주혁이 재차 물었다.
“……알겠어요.”
신유정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에서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상황만 악화됩니다. 그걸 아실만한 분이 계속 이러니까 답답하군요.”
강주혁의 질책에 신유정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미안해요.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봐요.”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세요.”
“알겠어요.”
“갑시다.”
강주혁은 대검을 들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