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저놈들을 따라갑시다
다음 날에도 공략은 계속되었다.
일행은 석판을 타고 용암을 따라 내려갔다. 석상으로 변한 한태성은 야영지에 남겨놓고 돌아갈 때 찾아가기로 했다.
한태성 사건으로 분위기는 다소 다운되어있었지만 다른 문제는 없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임프와 패밀리어의 습격이 있었지만 위험하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전투의 흐름을 끊어놓던 한태성이 빠찌자 오히려 전투가 수월해진 느낌이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으신가 봐요.”
김정현이 안다정을 보면서 웃었다.
첫 전투 후로 빗나가는 화살이 많았는데 갑자기 백발백중으로 돌변하니 신기했던 것이다.
“그건 일부러 그런 거예요.”
“일부러요?”
안다정은 강주혁의 제안에 따라 한태성에게 일부러 빈틈을 보였다고 얘기했다. 예상대로 한태성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인 동시에 가장 만만해 보이는 안다정을 타깃으로 삼았다.
“한태성은 두 분한테 낚인 거군요.”
“강 팀장님한테 낚인 거죠.”
“진짜 무서운 분이시군요.”
김정현은 강주혁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폼이 살아난 안다정 덕분에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거의 다 온 것 같군요.”
점심 무렵, 유한길이 말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서 용암의 강이 끝났다.
낭떠러지 아래로 용암이 폭포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휩쓸려서 아래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이쯤에서 내리시죠.”
조타수 역할을 하덕 강주혁이 석판과 육지를 이어 붙였다.
상륙을 끝낸 일행은 도보로 낭떠러지로 이동했다.
“이전 공략팀이 들어온 건 저기까지였습니다.”
유한길이 절벽 아래에 보이는 용암 호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위에서 내려다봐도 그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커다란 호수였다. 이곳이 광야가 아니었다면 용암 호수가 아니라 용암 바다로 오해했을 것이다.
호수 한복판에는 커다란 섬이 있었고 그 위에 미궁으로 보이는 건축물이 지어져 있었다.
“우리가 죽으면 이런 데 떨어지겠죠?”
신유정이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환경도 사람을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눈앞의 용암 호수만큼은 아니었다.
“부장님은 그럴 겁니다.”
김정현이 히죽거리면서 말했다.
“김 팀장님은요?”
“저야 저 하늘 높이 올라가겠죠. 누구랑은 다르게 착하게 살았거든요.”
“퍽이나 그러시겠네요.”
“부장 자리를 꿈꾸는 팀장들이 한 트럭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저주를 퍼부을 테니 부장님은 지옥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왕 가는 지옥, 김 팀장님을 용암에 떠밀고 가야겠어요.”
“그러면 뒤에 계시는 강 팀장님이 석화의 저주로 정의의 심판을 내리실 겁니다. 그럼 한태성이랑 오붓하게 잡혀가시겠죠.”
“짐이 너무 많아서 안 됩니다. 신 부장님은 두고 갈 겁니다.”
강주혁이 거들었다.
“그럼 이 지역의 명물이 되시겠군요. 후배 헌터들이 타락한 부장 헌터의 동상을 보면서 헌터 생활을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겠죠. 타산지석이 되는 겁니다.”
“어휴, 진짜! 빨리 내려가요. 김 팀장님을 용암에 처넣어야지 속이 풀리겠어요.”
신유정은 씩씩거리면서 로프를 꺼냈다.
강주혁과 눈이 마주친 안다정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웃었다.
로열패밀리인 신유정에게 저런 농담을 거리낌 없이 해대는 걸 보니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이다.
일행은 가지고 있는 로프를 이어서 절벽을 내려갔다. 절벽 높이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아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호숫가에 도달했을 때 강주혁이 섬을 보면서 물었다.
“헌터들이 당한 장소가 저기군요.”
“네. 미궁에 있는 몬스터들에게 당했습니다. 길 자체도 복잡해서 실종 당한 친구들도 있습니다.”
유한길이 착잡한 얼굴로 답했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막상 문제의 장소에 도달하니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순 없죠. 어서 가요.”
신유정이 씩씩하게 말했다. 강주혁은 앞장서서 용암에 대지의 힘을 쏟아부었다.
지글지글거리는 용암이 딱딱한 석판으로 바뀌었다. 일행은 용암 위에 생겨난 돌다리를 이용해 섬으로 건너갔다.
가까이서 본 미궁의 벽은 높이가 수십 미터에 이르렀고 표면이 매끈해서 디딜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위로 넘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이쪽입니다. 입구가 하나뿐입니다.”
유한길이 일행을 미궁의 입구로 안내했다.
“길을 기억하십니까?”
“꽤 깊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몬스터는 미노타우로스죠?”
“네. 보통 놈들이 아니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일행은 장비를 점검한 후 미궁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횃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으나 간격이 상당히 넓어서 통로를 완전히 밝혀주지는 못했다.
미노타우로스들이 돌아다니는 곳이라서 그런지 통로가 상당히 넓었다.
“갈림길이군요.”
“이쪽이나 저쪽이나 비슷해 보이는데요.”
안다정의 말대로 미궁의 내관은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모든 것이 똑같았다. 이정표로 삼을 만한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 기억에 따르면 이쪽입니다.”
유한길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에 들어왔을 때도 지도는 만드셨죠?”
강주혁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도 제작을 담당하는 친구가 실종되는 바람에 소실되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만들죠. 제가 하겠습니다.”
강주혁도 이 미궁에 어떤 트릭이 있는지는 알지만 길까지 외우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나중을 위해서 지도를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길이 잘못되더라도 금방 알아낼 수 있으니 걱정 말고 가시죠. 여기서부터 별가루를 이용하겠습니다.”
일행은 헌터들이 던전에서 흔적을 남길 때 사용하는 가루를 조금씩 뿌려가면서 내부로 진입했다.
“이쪽이 아닌 것 같군요.”
지도와 별가루까지 동원했으나 일행은 번번이 막다른 길을 만났다. 한 시간 동안 헤맸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좀 전의 그 길이었나 봅…….”
쿵!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유한길의 말을 끊었다.
“미노타우로스입니다.”
전방의 어둠 속에서 소의 머리를 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는 사람 키만 한 날을 가진 도끼를 들고 있었다.
키랑 덩치는 오거랑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랭크는 더 높다. 오거는 힘만 믿고 막무가내로 무기를 휘두르지만, 미노타우로스는 제대로 된 도끼술을 사용한다.
푸우.
미노타우로스가 뜨거운 콧김을 뿜어냈다. 등 뒤에서 두 마리의 미노타우로스가 더 나타났다.
우우우!
쿵! 쿵!
미노타우로스가 일행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쿵! 쿵!
“반대편에서도 와요!”
반대편에서도 열댓 마리의 미노타우로스가 나타났다. 그 우람한 체구에 넓은 통로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상대적으로 한정된 공간에서 중대형 몬스터와 싸우는 건 위험하다. 피할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공격도 위험하지만 밟히거나 몸에 부딪히는 것도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중대형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는 반드시 탁 트인 공간에서 교전을 벌여야 한다.
“여기서 싸우는 건 불리합니다.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이쪽으로!”
강주혁은 메고 있던 대검을 꺼내 들면서 세 마리가 있는 쪽을 향해 돌진했다. 일행은 강주혁을 따라서 달렸다. 등 뒤에서 열댓 마리의 미노타우로스가 일행을 쫓았다.
우우우우우!
강주혁이 택한 방향에 있던 미노타우로스들 중 선두가 도끼를 번쩍 들어 올렸다. 번쩍이는 도끼날은 꼭 단두대처럼 보였다.
“조심해요!”
일행들의 경고에도 강주혁은 개의치 않고 돌진했다.
부웅!
그레이트 엑스가 파공성을 흘리면서 강주혁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카앙!
섬광이 번쩍이면서 날카로운 금속성의 마찰음이 미궁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강주혁의 대검을 찍은 도끼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미노타우로스의 전력이 담긴 찍기를 흘리거나 피하는 대신 정면에서 튕겨내 버린 것이다.
우어어.
도끼를 휘두른 미노타우로스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강주혁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계속해서 돌진했다.
부웅. 부웅.
하늘 위로 날아올랐던 도끼가 빙글빙글 돌면서 떨어졌다.
“우어어!”
당황한 미노타우로스가 서둘러 몸을 피하려고 했다.
콰직!
우우욱!
하지만 그때, 미노타우로스에게 도달한 강주혁이 대검으로 고간을 찍어버렸다. 격통에 사로잡힌 미노타우로스가 울부짖었다. 그동안에도 도끼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푹!
도끼가 미처 피하지 못한 주인의 이마에 박혀버렸다. 미노타우로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이내 퍼져버렸다.
탁! 탁! 탁!
죽은 미노타우로스의 몸 위로 뛰어오른 강주혁은 이마에 박힌 도끼의 손잡이를 계단처럼 디디면서 달려갔다.
탁!
강주혁은 도끼 손잡이의 끝에서 높이 도약했다.
우어어어!
바로 뒤에 있는 미노타우로스가 강주혁을 노리고 횡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붕!
하지만 강주혁은 공중제비를 돌면서 도끼날을 피했다.
파지직!
강주혁의 대검이 푸르스름한 전격을 토해냈다.
“으아아아!”
강주혁은 기합과 함께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를 대검으로 찍었다.
파직!
대검이 두꺼운 두개골에 박혔다.
‘청룡뇌즉참!’
강주혁은 그 상태에서 기술을 사용했다. 순간적으로 최대치의 힘이 더해진 뇌검(雷劍)이 두개골에 이어 몸까지 쪼개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쩌적. 쩌저적.
미노타우로스의 거체가 정확하게 양분이 되면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강주혁은 그 피를 모두 뒤집어썼다.
우우우우!
세 번째 미노타우로스는 뒷걸음질을 치더니 비명을 지르면서 달아났다.
“이쪽은 끝난 것 같군요.”
강주혁이 돌아보면서 말했다.
나머지 네 사람은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우, 우리도 도망가고 싶네요.”
신유정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강주혁은 악마처럼 웃으면서 그녀 뒤에 있던 미노타우로스들을 봤다.
일행을 쫓기 위해 열심히 달려오던 그들은 발걸음을 멈춘 채 강주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주혁은 그것들의 눈에서 공포와 절망을 읽었다. 애초에 피할 수 있었던 피를 뒤집어쓴 것도 그것을 위해서였다.
저벅!
강주혁이 미노타우로스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쿵!
선두에 있는 미노타우로스가 뒷걸음질을 쳤다. 뒤에 서 있던 미노타우로스들도 슬금슬금 물러났다.
헌터들은 미노타우로스가 생긴 것만 황소지 사람을 잡아먹은 식인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회귀 전, 미노타우로스들과 지겹도록 싸워본 강주혁은 알고 있었다. 놈들에게 여전히 소와 비슷한 구석이 남아있다는 것을.
우월한 신체 스펙에 비해 온순하고, 겁이 많아서 인간에게 길들여진 소와 마찬가지로 미노타우로스들도 은근히 겁이 많았다.
눈앞에서 일격에 반 토막이 난 동료는 그들에게 잊고 지내던 공포를 상기시켜주었다.
저벅.
쿵!
저벅.
쿵!
강주혁이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미노타우로스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걸 본 강주혁이 씩 웃었다.
“으아아아!”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던 강주혁이 함성을 지르면서 돌진하자 미로타우로스들이 허둥지둥 달아나버렸다.
“저놈들을 따라갑시다.”
강주혁이 일행에게 말했다.
“네?”
“여기에 사는 놈들이니까 길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일행은 황당한 발상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다.
“좋아요.”
신유정이 결정을 내렸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강주혁은 본격적으로 소몰이를 시작했다.
우우우!
미노타우로스들은 피칠갑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동족의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대검을 들고 쫒아 오는 인간을 보고는 전력 질주로 달아났다.
“으아아아!”
강주혁은 따라잡을 수 있음에도 일부러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미노타우로스들을 쫓아갔다.
강주혁의 예상대로 미노타우로스들은 갈림길에서도 망설임 없이 길을 골랐다. 길을 잘 알고 있어야지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우우우!
우우! 우우!
도중에 미궁을 배회하는 다른 미노타우로스들을 만나기도 했다. 재밌는 건 새로 만난 미노타우로스들도 영문도 모른 채 동료들이 도망가자 같이 피난길(?)에 올랐다는 점이다.
그렇게 한참을 미노타우로스들을 추격한 끝에 일행은 미궁의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퍽!
중심부에 진입하자마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주 중인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피해요!”
일행은 강주혁의 외침에 따라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쿵!
땅에 처박힌 건 도주 행렬의 맨 앞에 있던 미노타우로스였다. 얼굴이 흉측하게 쪼개져 있었다.
강주혁은 도주 행렬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주변보다 높은 단상이 있었다.
푸우.
갑주를 입은 미노타우로스가 단상 위에 우뚝 선 채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른 미노타우로스들보다 덩치가 훨씬 더 컸다. 황금빛 도끼날에는 좀 전에 응징한 부하의 피가 묻어 있었다.
주변에 도열한 열댓 마리의 미노타우로스들도 미궁에서 만난 겁쟁이들과는 격이 달랐다.
미노타우로스의 왕이 살기를 머금은 눈으로 도망쳐 온 미노타우로스들을 훑어보았다. 도망자들이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자 왕의 시선이 일행에게 닿았다.
“저놈이 이 미궁의 주인인 것 같군요.”
강주혁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우우우!
왕의 포효와 함께 모든 미노타우로스들이 일행을 향해 돌진했다.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