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일행의 여정은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중심부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흐르는 용암 위에 석판을 띄어놓고 그것을 타고 가는 건 그다지 빠른 방법이 아니었다.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체력관리에는 좋았지만.
“후우, 덥긴 하네요.”
김정현은 손부채질을 하면서 말했다.
아무리 석판을 두껍게 만들어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용암의 열기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난 온돌 같고 좋은데요. 히히.”
신유정은 여전히 쾌활함을 잃지 않았다.
“이런 것도 없이 여길 들어왔던 걸 생각하면 끔찍하군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유한길은 바람을 만들어내면서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단의 힘으로 언제든 시원한 바람과 차가운 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것까지 없었다면 진즉 탈진해서 공략을 포기했을 것이다.
“좀 더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느긋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한태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초조해했다.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강주혁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육로로 갈 수도 있잖아요.”
“이 지역의 땅은 극도로 불안정합니다. 지형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길을 잃을 가능성도 큽니다. 장애물을 계속 만나기 때문에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고요.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곱니다.”
“나도 동감이요. 걷지 않고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보존에 도움이 됩니다. 육로로 가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오.”
강주혁의 설명에 유한길도 동의했다.
의견이 갈릴 때 경험자인 유한길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유한길까지 나서서 반대하자 한태성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저기 또 오네요.”
망을 보고 있던 안다정이 말했다.
수백 마리의 임프와 패밀리어가 일행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또 시작이군.”
김정현이 기지개를 켰다. 임프와 패밀리어의 공습은 하루에도 두세 차례씩 있었다.
처음에는 기진맥진하던 일행들도 경험이 쌓이자 좀 더 수월하게 대응했다.
딱 두 사람 빼고.
한 사람은 이제 팀의 구멍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한태성. 시간이 지날수록 기량이 현저지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본인은 계속해서 괜찮다고 했지만 전투에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약이 없어서 그러냐고 물어도 아니라고 우겼다.
다른 한 사람은 갑자기 폼이 떨어진 안다정. 여전히 제 몫을 하고는 있지만, 이전처럼 눈에 띄는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비행 능력이 있는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는 궁사가 돋보일 수밖에 없는데도 그랬다. 안다정답지 않게 빗맞는 경우가 잦았다.
이처럼 두 사람이 계속해서 부진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분발한 덕분에 전투는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다.
그날 밤.
일행은 여느 때처럼 야영을 했다.
강주혁이 제안한 대로 불침번은 두 명씩 섰다. 한 사람은 바람의 힘으로 화산재를 밀어내고 다른 한 사람은 주변을 살피는 식이다.
불침번 조는 제비뽑기로 정했는데 오늘은 안다정과 한태성이 같은 조가 되었다.
안다정과 한태성이 불침번을 설 차례가 되었을 때, 강주혁은 자는 척을 하면서 한태성의 동태를 살폈다.
“좀 둘러보고 올게요.”
안다정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 정찰에 나서는 것 같았다.
한태성은 일행들 한복판에 앉은 채 바람의 힘으로 화산재를 밀어내고 있었다.
‘움직여라. 어서. 완벽한 기회잖아.’
강주혁은 한태성의 기척을 주시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5분 정도 지났을 때. 한태성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주혁은 귀를 쫑긋 세운 채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한태성이 뿜어낸 살기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강주혁은 언제든 일어나서 한태성을 두들겨 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살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인 채 어디론가 이동했다.
충분히 떨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강주혁은 눈을 떴다. 한태성은 조용하지만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걷고 있었다. 한태성이 이탈해버리자 화산재가 일행들 위로 쌓이기 시작했다.
강주혁은 몸을 일으켰다.
리치의 반지를 이용해 투명화와 소음 제거를 자신에게 걸었다. 그리고 거리를 유지한 채 한태성을 추적했다.
멀찌감치 떨어진 채 한태성을 추격한 강주혁은 그가 안다정이 보이는 곳에서 몸을 낮추는 걸 확인했다.
안다정은 야영지 근처에 있는 낭떠러지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취침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그쪽으로 가달라고 부탁을 해두었다.
절대 뒤쪽을 돌아보지 말라는 주문도 덧붙였다.
‘역시나.’
한태성은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안다정에게 조심스레 접근했다. 안다정 역시 아마 그의 접근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주혁이 말해뒀기에 알면서도 모른 척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한태성은 안다정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바로 뒤에 강주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한태성이 안다정을 덮치려고 몸을 날리는 순간, 강주혁이 손을 뻗었다. 안다정도 몸을 돌리면서 발차기를 날렸다.
“악!”
강주혁에게 머리채를 잡힌 한태성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퍽!
“컥!”
안다정의 발차기가 한태성의 복부에 꽂혔다. 한태성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어요?”
안다정이 비소를 흘리면서 말했다.
낮 동안 벌어졌던 전투에서 폼이 떨어졌던 건 일부러 그렇게 해달라는 강주혁의 부탁 때문이었다.
강주혁은 한태성이 가지고 다니는 약물이 부족해지면 반드시 사고를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약물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먹어야 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한태성은 자기 때문에 공략이 실패로 끝나는 걸 두려워했다. 이 공략의 중요도를 감안했을 때 그렇게 되면 헌터로서의 경력은 완전히 끝난다. 현상유지는 할 수 있을지라도 위로 올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강주혁은 한태성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공략이 중단되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실종되거나 큰 부상을 당해서 공략이 중단되면 책임을 모면할 수 있으니까.
한태성은 안다정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
강주혁은 안다정에게 일부러 허점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타깃으로 삼을 테니까.
안다정은 전투 중에 실수를 연발했고 한태성의 경계심은 그만큼 옅어졌다. 분명 자신이 성장해서 이제 안다정보다 한 수 위일 거라고 단정했을 것이다.
“왜, 왜 이러는 겁니까?”
한태성은 배를 잡은 채 신음을 토했다.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다. 왜 안 팀장님을 노렸지?”
투명화와 소음 제거를 해제한 강주혁이 물었다.
“시간이 지나도 안 돌아오셔서 찾으러 간 것뿐입니다.”
“개소리하지 마라. 그럼 그냥 부르면 되지 뒤에서 덮치려고 해? 내가 못 봤을 것 같아?”
말문이 막힌 한태성은 대꾸하는 대신에 몸을 일으켰다.
“시팔 것들, 보자보자하니까.”
한태성에게서 갑자기 사이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몸에서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는군.”
강주혁은 씩 웃었다. 그의 예상대로 한태성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사람이었다.
“죽어라!”
한태성이 강주혁을 향해 신형을 쏘았다.
“안 팀장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세요!”
강주혁은 그 말을 한 후에 한태성에게 주먹을 날렸다. 한태성 역시 강주혁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쾅!
두 사람의 주먹이 격돌한 곳에서 폭발이 터져 나왔다.
“윽!”
예상대로 곁에 있던 안다정은 폭발의 여파로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미리 낭떠러지 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추락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크윽!”
한태성 역시 뒤로 쭉 밀려가더니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입에서 검은 피를 왈칵 토해냈다.
오직 강주혁만이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네, 네놈…… 권사였군.”
“아니, 검사야. 권법은 취미지. 널 잡는데 굳이 검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한태성의 얼굴에 굴욕감과 절망감이 번져갔다.
“한 팀장님! 안 팀장님!”
“강 팀장님도 있었구나. 다행이다.”
폭발 소리를 듣고 깨어난 일행이 세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왜 이러는 거예요?”
“한 팀장이 저를 공격하려고 했어요.”
안다정이 말했다.
“우리 한 팀장님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셨습니다.”
강주혁이 씩 웃으면서 덧붙였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한태성에게 향했다. 그의 눈빛도 풍기는 기운도 평범한 헌터의 것이 아니었다.
“한 팀장님? 어떻게 된 거예요?”
신유정이 물었다.
한태성은 숨을 몰아쉬면서 헉헉거렸다. 입에서는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날 무시하는 새끼들은 전부 죽어야 돼.”
눈에서 광기가 번뜩였다. 한태성이 일어나면서 자신의 격을 발산했다.
“크윽!”
강주혁을 제외한 네 사람은 한태성의 기세로 인해 주춤거렸다.
“당장 그만둬요! 명령이에요!”
신유정이 명령했으나 한태성은 기세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기세와 더불어 한태성의 근육이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찌직!
상의가 찢어지면서 우락부락한 근육이 드러났다. 옆통수에서 피가 나더니 갑자기 뿔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피부색도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니라 꼭 악마처럼 보였다.
‘저건 또 뭐야?’
이번에는 강주혁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블랙 헌터거나 성장에 대한 욕심 때문에 블랙 헌터랑 거래하는 등신인 줄로만 알았지 저런 괴물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공격해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신유정이 명령을 내렸다.
김정현이 돌진 계열 기술을 사용해 단숨에 한태성에게 쇄도했다.
척!
하지만 김정현이 휘두른 망치가 몸에 닿기도 전에 한태성이 안쪽으로 파고들어서 한 손으로 망치의 손잡이를 잡았다.
김정현이 두 손으로 휘두른 망치를 한 손으로 잡아챈 한태성은 다른 한 손으로 김정현을 복부를 가격했다.
“억!”
김정현의 피를 토했다.
철퍼덕!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김 팀장님!”
한태성이 지금까지 보여준 적이 없는 괴력에 일행은 경악했다.
펑! 펑! 펑!
유한길이 쏜 매직 미사일이 한태성을 때렸다. 하지만 그는 그걸 무시하고는 곧장 유한길에게 달려들어 몸통박치기를 했다.
“으억!”
유한길이 뒤로 멀찌감치 날아가 근처에 있는 흙더미에 처박혔다. 그 역시 기절한 건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한태성은 곧장 다음 타깃인 신유정에게 돌진했다.
쉭!
안다정이 한태성의 눈을 노리고 화살을 날렸다.
캉!
한태성은 팔을 들어 화살을 막았다. 고강한 내공이 실린 화살은 피부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콰지직!
신유정의 검이 황금빛 전격에 휘감기면서 천둥소리를 토해냈다. 그녀는 검으로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한태성을 찔렀다.
“죽어라!”
한태성은 검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쾅!
검과 주먹이 맞부딪치면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검이 날아오르자 뱀처럼 날을 휘감았던 전격도 사라져 버렸다.
“아…….”
신유정은 검을 잃었지만 한태성의 주먹은 멀쩡했다.
“죽어라!”
한태성의 엄청난 스피드로 움츠러든 신유정에게 쇄도했다. 당황한 그녀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자기도 모르게 찔끔 감고 말았다.
퍽!
“크어어어!”
하지만 날아간 건 신유정이 아니라 한태성이었다. 바닥에 길쭉한 자국을 남기면서 뒤로 끌려간 그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부장님.”
신유정 앞에 선 강주혁이 말했다. 그가 한태성을 날려버린 것이다.
“네?”
“헌터는 어떤 상황에서든 눈을 감으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네.”
신유정은 민망해져서 얼굴을 붉혔다.
“저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두 분은 부상자들을 돌봐주세요.”
“알겠어요.”
강주혁은 천천히 한태성에게 다가갔다.
“진작 좀 그렇게 싸우지 그랬냐.”
강주혁은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한태성에게 말했다.
“으아아아!”
한태성은 괴성을 지르면서 강주혁에게 돌진했다. 좀 전처럼 엄청난 속도였다.
휙!
한태성이 덮쳐오기 직전, 강주혁의 신형이 사라졌다.
퍽!
한태성의 등 뒤에서 나타난 강주혁이 발차기로 그의 뒤통수를 갈겼다.
“컥!”
한태성은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휙!
다시 한태성 앞에서 나타난 강주혁은 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커억!”
앞으로 날아가던 한태성은 허리가 직각으로 꺾이면서 반대로 튕겨져 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한태성은 몸을 움찔거리기만 할 뿐 일어나지 못했다.
‘저건.’
순간이동을 하듯이 한태성의 앞뒤에서 나타난 강주혁을 보면서 안다정과 신유정은 경악했다.
방금 강주혁이 보여준 건 종로투왕 권대호의 유명한 보법인 귀멸축공보(鬼滅縮空步)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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